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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安心)·안신(安身)의 의미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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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숙녀 작성일2018.12.15 조회6,0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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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천21 방면 정무 하숙녀 

 

‘바쁜 직장생활로 도(道)에서 마음이 잠시 멀어지다’

  2001년도에 선사 임명을 모시고 도의 일을 하던 중 2003년도에 직장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직장 일로 늘 바쁘던 나는 방면 회관의 큰 행사와 가끔 주말에 들게 되는 도장 치성이나 참배에 참례하는 정도만 겨우 할 수 있었다. 2년 전 봄. 나에게는 회사에서 새로운 업무 하나가 부여되었다. 3~4개월 정도가 소요되는 단기업무였지만, 기본 업무에 추가로 부여된 것이었기에 이래저래 스트레스와 과로로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새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기간 안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일을 정해진 기간 내에 끝내지 못할 경우 회사에 미치는 손해와 사주가 주는 무언의 책임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현실이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평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타입이기에 업무에 관한 한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으나, 새 업무만큼은 다른 직원과 연계하여 진행하는 동안 매끄럽지 못한 일 처리 과정 등으로 은근 스트레스가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업무가 잘 마무리되어 해당 기관으로부터 OK 판정을 받던 날, 전 직원의 회식과 함께 기분 좋은 보너스까지 받은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근했다. 집에 도착하여 차에서 막 내리려고 발을 딛는 순간, 마치 온 세상 공기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 갑자기 호흡하기가 힘들어짐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엄습해 오는 공포감과 함께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밖으로 나와 무조건 택시를 잡아타고 인근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기본적인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 맥박 등은 다 정상으로 나왔지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공포감을 해소해 줄 수는 없었다. 이대로는 집에 못 가겠다고 하는 내가 딱해 보였는지, 의사는 안정제를 주사액으로 처방하여 맞고 있던 링거 수액에다 투입했다. 처음 맞아보는 안정제는 약물의 농도가 얼마나 강한지 주사하자마자 머리가 핑 돌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별일 없었다는 듯 다시 출근했다. 그러고는 또 바쁜 일상의 며칠이 지났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며칠 전 있었던 증세가 과호흡증후군 내지는 공황장애일 수도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호흡곤란을 경험한 이후 나에게는 간헐적으로 이러한 증세가 나타났고, 이로 말미암아 두어 번 더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예기불안01으로 인한 극심한 공포까지 더해져 증세는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인근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다 받아 보았지만, 전공의도 증상에 대한 뚜렷한 원인을 알지 못했다. 다만 스트레스, 과로, 피로누적 등이 증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진단이 다였다. 진단이 이렇다 보니 의사는 나에게 신경안정제만 처방하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검진하라고 당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나인지? 평소 일에 대한 불평, 불만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긍정적이란 평판도 듣는 데다 우울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과로하여 체력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친분이 두터운 친구 몇 명에게만 나의 증세를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너 그럴 줄 알았다.”라는 대답들이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매사 직장 일이며, 사회활동을 너무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그럴 줄 았았다.”라며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초반에는 워낙 상태가 심했던 터라 예기불안으로 인하여 외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설상가상 체력마저 급속도로 더 떨어져 숨쉬기조차 힘들어지면서 건강상태가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다. 일상생활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더 이상은 회사생활을 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하는 수 없이 장기간의 휴직 신청을 선택했다. 휴직 후 약 3개월을 어머니 집에서 지내야 했다. 삼시 세끼를 팔순 어른이 해주는 밥을 얻어먹어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다. 어머니는 고단백 식품 위주로 매일 차려 주셨으나 기력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마저 거의 나오지 않아 가족들끼리 대화도 힘들 정도였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세끼의 식사와 간식과 약 복용, 해 질 녘 아파트 주변 공원을 겨우 걸어 트랙 몇 바퀴를 도는 게 전부였다. 그즈음 옆에서 지켜보던 여동생과 가끔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이 내게 내민 책 한 권이 있었다.

 

 

‘자신의 부족한 내면을 찾아보게 되다.’

  모 스님이 호오포노포노 관점에서 마음 수행(치유)에 대한 방법을 설법한 책. (호오포노포노는 하와이 언어로 호오는 ‘목표ʼ, 포노포노는 ‘완벽함ʼ이며, 완벽을 목표로 수정하는 것, 즉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호오포노포노란 ‘자신을 사랑하는 것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ʼ, ‘용서하세요ʼ, ‘사랑합니다ʼ,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다.
  친구들 말대로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내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내면을 찾아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밤잠을 설치는 경우 홀로 명상 아닌 명상을 해보기도 하고, 기도를 모실 수가 없는 상황이라 상제님께 심고를 드리면서 자신으로부터 무엇이 문제였으며,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계속 생각하며 그동안 배려하지 못해 망가진 나의 마음과 몸에게도 용서를 구했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직장생활에다 사회활동까지 병행하여 늘 바쁘다는 명분으로 가끔 도의 일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늘 시간에 쫓겨 마음이 불편했다. 직장에선 나름 인정받던 위치라 잘난 멋에 업무를 불합리하게 처리하는 오너의 태도에 항상 불만이었고, 사회 활동하면서 간부까지 맡고 있어 행사라도 있을 때면 자료 준비로 퇴근 후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숨돌릴 틈 없이 바쁜 일상에 끼니를 제때 챙겨 먹는 일조차 등한시 한 터라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게다가 직장에서 새 업무를 맡았을 시기에 시아버님마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병원과 시댁을 오가며 치료와 요양을 하시는 동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맏며느리로서 심적 부담도 컸다.

 

 

 

 

‘생사의 기로에서 상제님을 찾다.’                       

  직장에 장기휴직을 신청하고 요양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4개월이란 시간이 지났다. 기력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만, 주일 기도와 도장참배는 한 번씩 참석했다. 5개월째 접어들면서 입도 후 17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강원도 금강산토성수련도장 연수에 참석할 기회가 닿았다. 햇수만 오래되었지 처음 간 연수에서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운 마음과 설렘으로 연수 내내 거의 밤잠을 못 잤던 것 같다. 도장에서 기도 시간에 맞추어 기도를 모시게 되었는데 나오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기도에 집중하려고 애를 쓰면서 주성에 힘을 모았다. 중반쯤 되었을까? 갑자기 목청이 탁 트이면서 예전 나의 목소리가 나오는 게 아닌가! 수개월을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서도 금방 회복되지 않고 있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왔다. 상제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함과 감격의 눈물이었으리라.
  강의 시간에는 자신을 어여삐 여기라는 말씀을 들으며 그동안 자신을 등한시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삼 조상님들의 공덕에 대하여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어 감사함과 죄송함에 다시 한번 속이 울컥하였다. 연수를 마치고 지방으로 내려온 이후로 회관에서 정해진 수련시간에는 꼭 참석하여 수련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척추와 목 디스크 증세까지 있어 통증 때문에 틈만 나면 병원에서 물리치료 받는 게 일상이었다. 수련하며 틈틈이 걷기운동도 병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전의 건강상태로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지만 조금씩 단단해져 가는 몸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복직을 하고 나서도 병원에 가는 대신 수련이 드는 날에는 퇴근하여 직장과의 거리가 제법 먼 회관까지 가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일지라도 수련을 꼭 하고 집으로 귀가했다.
  그러다 올해 초, 직장에 양해를 구해 다시 휴직 신청을 하고, 연수와 수강공부를 연달아 들어가게 되었다. 본부도장 수강에서는 사시 기도와 강사분들의 교화 내용에 집중하다 보니 2박 3일 일정이 짧게 느껴질 만큼 금방 마무리되곤 하였다. 자주 올 수 없는 귀한 연수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연수 기간에는 병으로 기력이 쇠약해졌음에도 정성껏 도전님 능소 주변 청소에 참여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한 덕인지 연수를 다녀온 후에는 지독한 독감에 심한 몸살까지 겹쳐 매번 열흘 이상을 몸져누워 있었다. 워낙 몸살감기가 심했던 터라 복용 중인 신경안정제를 재처방 받기 위해 병원에 내원해야 하는 예약일도 지나치게 되었다. 추가 처방을 받지 못해 신경안정제는 몸살감기가 다 낫도록 복용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용하던 약의 증량도 없었지만 줄지도 않은 상태였다.
  담당의사는 갑자기 약을 줄이거나 끊으면 상태가 심해져 치료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약을 꾸준히 먹을 것을 권유했다. 증세가 더 심각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치유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가 약 복용을 줄이지 않은 데는 또 다른 이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증세가 점차 호전될 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세상은 온통 세월호 사태로 떠들썩했고, 그 사건은 혼자 생각하기도 끔찍하기도 하거니와 내가 경험하는 호흡곤란 증상을 더 악화시킬 여지가 다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물속에서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 숨을 쉬지 못해 죽을 것만 같은 불안과 공포가 나의 경험과 중첩되곤 하였다. 담당 의사는 증세가 더 악화될 수 있기에 더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주기적인 병원 내원을 당부했다. 하지만 예정된 대학병원 내원 일을 지나쳐 다음 내원예약까지는 약을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심한 감기몸살을 두 차례 겪는 동안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았고, 또 자칫하면 평생 이 약에서 못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신경안정제를 무려 3주 동안 복용하지 않았지만, 몸이나 심리적인 상태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게 아닌가? 그래도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을 내원하여 4주분의 약을 처방받아 왔다.
  식탁 위에 얹어두고는 실험 삼아 계속 안 먹어보기로 했다. ‘여차하면 비상시를 대비해 추가로 처방받은 농도가 강한 약을 다시 먹으면 되니까’라고 하면서.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 이주일, 시일이 지날수록 이제는 완전히 끊어야겠다고 확고히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전처럼 심한 증세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체력 탓에 쉬 피로해졌고 그럴 때마다 숨이 가빠오면서 심장을 조여 오는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이러다 또? ….’라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지만,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방면 선각은 상제님 전에 심고 잘 드리고 안심·안신하여 일심으로 수도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때부터 상제님께 심고 드리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사실 평소에는 자신의 병 치유가 우선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수도의 목적을 되새기며 일상에서의 과부족을 살피니 마음과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다. 
  ‘상제님, 이제는 막연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천하 창생을 구하고자 인세에 강세하셔서 천지공사를 행하신 그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늘에서 맡겨주신 소임을 제가 다하지 못한 채 잘못될까 두렵습니다. 마음에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 하셨거늘, 모든 것은 제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 제 몸을 제 것 인양 함부로 하여 조상님 공덕에도 누를 끼치고 나태해져 남을 원망하던 부족한 도문소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음을 고쳐먹고, 진심으로 심고를 드릴 때마다 순간순간 되살아나던 공포감은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는 원인 모를 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상제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순회보>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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