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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39회, 김도인의 선물 깨달음 편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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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의성 작성일2018.12.15 조회6,1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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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25 방면 평도인 김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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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유용한 정보들을 팟캐스트(pod cast)를 통해서 많이 접하게 된다. 팟캐스트는 오디오 파일 또는 비디오 파일 형태로 뉴스나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를 인터넷망을 통해 제공하는 서비스다. 애플의 아이팟(iPod)과 방송(broadcasting)을 합성한 신조어이다. 기존 라디오 프로그램과 달리 방송시간에 맞춰 들을 필요가 없으며, MP3플레이어·스마트폰 등을 통해 구독 등록만 해 놓으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는 관심 프로그램을 내려 받아 아무 때나 들을 수 있어 인기를 얻고 있다.01 팟캐스트의 가장 큰 매력은 보통은 할 일 없이 보내게 되는 시간에 선택적으로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양한 팟캐스트를 이동 중이나 운동할 때, 혹은 밥 먹을 때나 잠자기 전에 즐겨 듣는다. 몇 년 전에 정부 비판의 목소리로 큰 인기를 끌었던 “나는 꼼수다”를 비롯해서 최근에는 과학에 대해서 폭넓게 다루고 있는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 있네”, 법륜스님의 인생 상담이 담겨 있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시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것은 알기 싫다”, 청취자의 기괴한 경험들을 코믹하게 소개하는 “요즘은 팟캐스트 시대” 들을 즐겨 듣는다. 이밖에 다양한 콘텐츠를 다루고 있는 “벙커1 특강”과 영어회화나 뉴스, 책을 읽어주는 것들도 있어 애청하고 있다. 그런데 특히 요즘 가장 즐겨 듣는 팟캐스트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다.
  여기서는 시사, 정치, 괴담, 영화, 책, 단체, 인물, 교육, 수학, 과학, 종교, 철학 등 말 그대로 넓고 얕게 다분야의 내용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방송의 진행은 4명이 하는데 그중 채사장은 자칭 신자유주의와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교통사고로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경험이 있는 사람 같지 않은 장난기 많은 전체 진행자이다. 많은 독서 경험으로 박학한 면모를 보이며 같은 이름으로 책을 출간한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깡선생은 서양철학과 종교학을 전공한 진보적 성향의 사람이고, 이와 다르게 독실이는 기독교와 과학에 독실한 사람으로 이공계를 전공한 사람이다. 마지막 김도인은 닉네임처럼 20대를 명상과 도 닦기에 바치고 후에 학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유일한 여성 진행자이다. 개성 넘치는 이 네 명은 매주 다양한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에 대해서 번갈아 가며 내용을 준비해 오면 서로 얘기를 듣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토론하게 된다. 그중에 수도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올해 초에 김도인이 새해 선물을 준다는 마음으로 깨달음에 대해서 준비했던 내용이다.     
  내가 여기서 준비한 깨달음은 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문제 상태가 해결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본 것이다. 문제 상태는 삶에서 발생하는 고통이라고 광범위하게 정의될 수 있다. 심리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아닌 것이 문제 상태이다. 문제의 원인은 (환경적 문제는 제외하고 개인적 차원에서만 볼 때) 고정된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반복된 삶을 통해 자아감을 가질 때 개념화된 내용으로 고정된 자아가 형성된다. 그러면 그 자아에 맞게 하루하루를 똑같이 생활한다. 자기의 경험 내용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경험하는 내용 중에서 고정화된 자아와 일치하는 경험들만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면 새로운 관점으로 삶을 보는 능력이 저하된다. 기본적으로 문제해결 능력도 저하되고 그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불만감 등을 겪게 된다.
  이런 고정화되고 개념화된 자기가 매일 똑같은 삶을 살게 되는 심리적 원인으로는 반추적 사고를 들 수 있다. 소가 꼴을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이 새로운 경험정보들에 대해서는 제거하고 계속 그 사건만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보통은 행복한 감정에 대해서 반추하기보다는 고통의 감정이 더욱 강렬해서 그것을 회피하려는 감정이 크기 때문에 그 사건에 집착하는 경우가 크다. 우울증 환자의 97%가 물리적 사고를 당해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보다 2배 정도 더 많이 누워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원인으로는 경험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고가 있다. 자기가 경험하는 감정, 생각, 경험 내용과 자기를 일치시켜서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거절당하거나 실패한 경험이 있을 때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경험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서 생각할 줄 안다. 시야가 좁아져서 숲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무와 나를 일치시키는 것과 같다. 크게는 이 두 개가 심리적 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보통 심리치료에서 하는 공통적인 방법들이 있다. 고통, 불만족, 싫은 경험들에 대해서 제거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러한 경험들은 똑같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수용하는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괴로움과 고통의 경험들이 자기와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계발서에서 많이 제시되는 자기 긍정적 사고와는 다르다. 긍정적 사고는 자신이 긍정적 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적 상황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를 개인에게 책임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상황에 따른 극도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가령 가족이 아프거나 죽은 상황에서의 고통의 원인이 부정적 사고에 있다고 한다면 개인에게는 긍정적 사고가 강요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삶에서 나쁜 일들을 제거하려고만 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의 방식에는 무수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심리적 관점에서는 자신이 경험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변화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자기가 경험하는 것과 그에 대한 반응이 일시적으로 분리시켜 볼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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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할 수 있는 사고의 힘이 강해지게 되면 경험과 그 경험의 주체를 분리시켜 볼 수 있다. 사건 자체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탈중심화라고 하는데 탈중심화가 되려면 일단 자기경험을 전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경험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경험을 직시하는 상태이며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실제 사람들은 자기라는 성 안에서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에 드는 풍경이 보일 때만 창문을 열게 된다. 그리고 안 좋은 풍경이 오거나 비바람이 치면 창문을 닫고 안전한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고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모든 경험을 완벽히 수용하는 사람들은 없다. 자기가 형성한 자아감대로 선택적으로 경험들을 수용하게 되어 있다.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이러한 방어기제는 효용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데 방어기제가 너무 효과적이고 자동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심리적인 고통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험은 온전히 받아들이되 경험 내용과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기 경험과 경험의 주체가 분리되는 사건을 본 것은 자아가 발생하는 인식적 메커니즘의 원리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그다음에 경험과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는 탈동일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경험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 자체를 인식하는 더 큰 인식(메타인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식들의 내용은 감각, 감정, 생각 등 여러 가지로 형성되지만, 이것을 포괄해서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보고 있는 큰 자아감을 메타인지라고 한다. 메타인지라는 개념은 심리학에서도 쓰이는 용어로 학습과 관련해서는 메타인지가 뛰어난 학생들은 자기와 자기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어 스스로 계획하고 수정하여 환경을 바꾸려 노력하기 때문에 공부를 잘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무수한 경험 중에 썩은 나무에만 집착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나무에서 더 멀리 숲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무를 크게 조망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처럼 자기 삶의 경험의 다채로움을 볼 수 있는 시각과 능력을 메타인지능력이라고 한다. 일상생활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영화 주인공의 입장에서 느끼고 생활하려고 노력하지만 메타인식의 깨달음은 자기가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명상이 깊어지면 자기가 수용하고 관찰하는 대상과 관찰하고 있는 의식을 나누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경험과 자기를 분리시킨 후에 일치시키지 않는 사고이다. 이것을 탈동일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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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을 위해 짐캐리 주연의 “예스 맨”(2008)이라는 영화를 추천한다. 깨달음의 방법으로 영화에 나오는 예스맨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명상의 방법을 삶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면 이런 형태로 할 수 있다. 명상에서는 자기에게 발생하는 모든 경험을 관찰하게 한 후 그것을 의식적으로 깨뜨리는 연습을 한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삶에 적용하면 매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을 ‘예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을 제외하고 ‘예스’라는 대답을 통해서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보통 자기가 삶을 선별하고 통제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자기 경험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가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으므로 자기가 변화하거나 경험할 기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자신이 삶에서 갖고 있던 고정된 시야를 변화시켜 준다. 몇 년간의 명상의 과정을 통해서 얻은 것보다 단기간 예스맨 운동을 하면서 얻었던 것들이 많았다.
  실제로 예스맨 운동을 하면 평소와는 다른 일들이 생기고 마치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예스맨 운동을 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몰려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아라는 것은 일종의 선 긋기이다. 내가 어디까지 선을 그을 것인가에 따라 자아가 형성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왔던 판단들에 대해서 다른 선택을 한다면 선 긋기의 방향이 달라지면서 자아도 달라진다. 또한 이런 예스맨 운동은 나이가 들면서 무뎌지는 순수한 감성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만약 자기가 책임져야 할 역할이 많은 사람이 명상 자체를 사치라고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예스맨 운동은 효과적일 수 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없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다. 3주 정도 예스맨 운동이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예스’라고만 했던 것에 대해서 ‘노’라고 할 수 있는 용기라는 것과는 다른 측면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긍정하자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만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기 삶의 경험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환경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한 개개인의 역량이 필요한데 그 역량은 개인이 경험을 통해서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킬 때 생기는 것이다. 인생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두가 출항해서 항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배는 소용돌이 속에서 같은 자리를 돌고 있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지는 않는다. 시간을 소모하는 사람도 있고 깨닫고 경험하는 여행을 하는 인생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예스맨 운동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상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이 내용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먼저 깨달음을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이라고 보는 생각이 신선했다. 굳이 불교의 열반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보통 깨달음이라고 할 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문득 알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수행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스님들이 오히려 깨달음에 대한 콤플렉스를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얘기는 깨달음을 신비적이고 고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병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깨달음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은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제시한 탈중심화와 탈동일시에 대한 내용은 평소에 많이 생각했던 자기 객관화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유용했다. 우리는 수도하면서 자존감에 관해서 얘기하지만 정작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바로 이 자기 객관화야말로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탈중심화와 탈동일시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어찌 보면 비슷할 것 같은 두 개념은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결국 인생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되어 인생이라는 영화를 즐기는 메타인지적 접근은 자기 삶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은 도와 관련되기 때문에 자존감의 회복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도가 곧 나요 내가 곧 도라는 경지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영화 “루시”(2014)에서 주인공 루시가 뇌의 잠재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결국 온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처럼 도와 내가 합일된 경지는 나라는 자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세계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나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예스맨 운동은 바로 이러한 자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의도적인 행위를 통해 본질적인 나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스 맨”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수도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방면 분들하고 같이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실제로 예스맨 운동을 해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지금 와서 보면 예스맨 운동에 이런 뜻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수도를 배워가는 분들에게 예스맨 운동은 선각의 무수한 조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일 수 있다. 자신이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도의 삶의 방식은 너무나도 다르므로 그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예스맨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상 도가 전해질 방도가 없다. 스스로 행동하고 느끼지 않으면 도는 그저 듣기 좋은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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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도를 느끼고 받아들인 수도인들에게 예스맨 운동은 도와 상관없는 주위의 친구와 가족, 직장상사와 동료의 요청에 대한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일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수도한다는 핑계로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에 게으르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곳에 오래 있다 보면 그곳에 적응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안주하고 고정된다. 이것은 수도한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우리는 도 안에 있다고 하지만 소통하지 않으면 굳어버리기 마련이다. 도전님께서는 『대순지침』에 “도주님 재세 시에 임원들에게 하교하신 후 ‘나의 말은 문지방을 넘어가기 전에 잊어버리라’는 달관(達觀)하신 말씀을 당위(當爲)로 받아들여 내적으로 관조(觀照)하여 근신절도(謹身節度)하여야 한다.”02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겠지만 수도가 언어적으로 고정화되고 굳어버리는 것에 대한 경계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도는 온 세상 그 자체로서 도이다. 여기에 도가 있고 저기에 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우리가 스스로 도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자아의 선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도전님께서는 “우리의 도가 신도(神道)이기 때문에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도수(度數)가 차면 천기자동(天機自動)에 의해 말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 나고, 예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천기자동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일지라도 그 말은 하늘이 시켜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03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자주 곱씹어 보곤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나의 편견으로 그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재단한다. 그러나 도전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하늘이 시켜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라고 하셨다. 나는 예스맨 운동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도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의 말을 신명의 말씀처럼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의 요구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 다음 상제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변화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내용을 정리해 보고 나의 입장에서 수도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혹은 수도하면서 조금만 상황이 좋아도 쉽게 교만해지기도 하고, 때론 조금만 나빠도 쉽게 자신을 학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나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잘 나가든 못 나가든 그것 자체가 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역할이나 상황 속에 나를 가둬버리는 것 같다. 얼마 전 친한 임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공부하다 졸릴 때 잠을 깨지 못해 힘들었는데 졸고 있는 나를 한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니 잠이 깨더라고. 졸고 있는 나를 한 발짝 벗어났더니 졸지 않는 내가 있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더 큰 의식은 도에 의한 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도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도가 곧 나요, 내가 곧 도라는 경지에서 심령(心靈)을 통일하여 만화도제(萬化度濟)에 이바지할지니...”04 팟캐스트를 듣고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대순진리회요람』의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대순회보>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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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02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지침』, 대순진리회 출판부, 1984, 4쪽.
03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회보』, 제5호, 1986.
04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진리회 요람」,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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