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문화 봉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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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효진 작성일2019.02.27 조회6,293회 댓글0건본문
원평2-9 방면 평도인 박효진
입도하기 전, 저의 유일한 낙은 춤이었습니다. TV에 나오는 가수들이 어찌나 멋져 보였는지, 집안이 엄하지 않고 제게 자신감이 좀 더 있었더라면 과감하게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꿈만 간직한 채 대학생이 되었고, 내 원을 풀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대학 안에 댄스팀에 들어갔습니다. 즐거웠던 댄스팀 생활에 적응될 즈음 입도했고, 입도 초반에는 도장 치성에 참석하고는 바로 학교로 가서 댄스 연습을 하고 공연도 다닐 정도로 푹 빠졌습니다. 댄스팀에 몰입한 나머지 수도는 물론 일상에도 지장이 있다고 보신 선각분들이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며 권하셨고 저는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러고 얼마 후 도장 체육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방면 선감께서는 개회식 축하 공연이 정말 멋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공연을 보고 있자니 여태껏 봤던 무대와는 달리 뭔가 맑은 모습에 반했습니다. 이후에 저도 그 자리에 서 보고 싶어서 방면 선감 추천으로 공연팀에 합류하였습니다. 체육대회 공연 준비도 도의 일 중 하나라 수도의 차원으로 저를 바꿔나가는 데 애를 먹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이어서 끝까지 해낼 수 있었습니다.
저희 공연을 좋게 보신 대진국제자원봉사단(DIVA)에서 베트남 문화 봉사를 제안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막연함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연팀 리더인 전 교감께서는 늘 상제님을 믿고 즐겁게 하자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팀원들이 서로를 믿고 즐겁게 공연을 하면 감사하게도 베트남 사람들이 뜨겁게 호응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난 두 해는 즐겁게 시작하여 잘 마무리를 지었다면, 올해는 시작부터 달랐습니다. 일정조차 잡히지 않아 여러 차례 미뤄졌고 봉사 일정 중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팀원 대부분이 수도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이라 각자 방면에서 수도하다가 모여서 연습하고 방면에 복귀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기에 날짜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말 기쁘고 울컥했습니다. 어렵게 일정이 잡히자 이번에는 베트남 쪽에서 공연 곡목이나 의상 사진까지 요구했습니다. 전에는 없던 요구사항들이었기에 놀랍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처음 문화 봉사에 참여한 선무가 공연 때 비가 오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하자 저는 절대 비 맞으면서 공연할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온이 50도가 웃돌아서 베트남 사람들도 밖에 돌아다니지 않던 날씨가 저희가 도착하자 10도 이상 내려가 시원해지기도 하고, 공연 전까지 비가 내려서 시설과 공연을 걱정했다가도 저희가 도착하면 비가 그쳐 선선하게 공연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전경』에 김 덕찬의 아들 결혼에 상제님께서 날씨 부조를 해주셨다는 구절처럼 우리가 하는 일에는 반드시 덕화가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였습니다.
9월 9일 출국해서 도착한 베트남. 묘한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 속에 문화 봉사 첫 일정인 타이응웬성 경제대학교에 도착했습니다. 공연할 야외무대와 객석 위에는 커다란 천막이 쳐져 있었고 ‘비가 오려나? 그럴 리는 없는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신명나게 공연하는 중반 무렵 갑자기 무대 위 왼쪽에서 영화 속 특수효과처럼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관객들은 서둘러 객석 천막 밑으로 모였고 의상 갈아입느라 무대 밖을 오갔던 저희는 비를 조금 맞기는 했지만, 준비했던 공연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고맙게도 관중들은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뜨겁게 호응해 주었습니다. 공연 후에 안 사실인데, 다른 팀은 비가 오면 서둘러 마치는데 우리는 끝까지 공연을 해서 베트남 측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합니다. 비가 오는 것에 의아해했던 저는 그제야 하늘에서 그냥 하시는 일은 없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아침 일찍 중학교 건립 기공식을 다녀온 후 서둘러 오후 2시에 공연할 고등학교로 이동해야했습니다. 오전 행사를 마치고 숙소에 왔는데, 우리가 묵었던 방의 카드키가 전부 먹통으로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오후 2시 공연 후,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저녁 8시에 문화 봉사를 해야 했기에 짐도 싸고 공연 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정말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급함을 누르며 잘 해결되기를 심고 드렸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같던 몇 십 분이 지나고 숙소 문은 마스터키로 모두 열렸습니다.
저희는 재빠르게 준비를 마친 후, 다음 공연 장소에 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공연 전, 팀원 중 한 명이 바지에 이상이 생겨서 급한 대로 제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오후 공연을 마치고는 제 공연용 바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음 공연 장소 가는 버스 안에서 열심히 바지 수선을 했습니다. 바지가 계속 터진다면서 저희끼리 깔깔대면서도 망신당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두 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CNC 기술대학교에서는 학교 측이 원하는 공연 시간과 곡이 계속 바뀌었지만, 이틀간 단련된 바가 있어 바뀐 상황을 금방 받아들였고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습니다.
셋째 날에는 두 군데 고등학교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오전에 공연한 동관고등학교는 저희가 곡을 시작하면 일단 함성으로 반겼지만, 박수를 치거나 무대로 나와 저희와 함께하는 호응이 미미했습니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저희가 무대 위에서 하는 것보다 무대 밖에 나가서 학생들과 같이 뛰는 게 점점 더 반응이 좋았습니다. 저희는 무대 밖에서 학생들과 함께 했고 고맙게도 학생들이 뜨겁게 호응해주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습니다.
다음으로 공연했던 응웬 빙 키옘 고등학교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저희가 공연을 시작하자 학생들은 조용히 저희를 지켜봤습니다. 학생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신문물, 난생 처음 본다!’
이토록 조용한 반응이 너무 어색해서 저는 속으로 ‘상제님 도와주세요!’를 외치며 공연을 했습니다. 문화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학생들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공연 중간에 고등학교 이사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독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는 반드시 긍정적 반응을 이끌겠다는 마음을 서로의 눈빛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미친 듯이 공연하고 무대 밖으로 내려가 학생들과 하이파이브도 하며 온 학교를 뛰어다녔습니다. 저희 마음이 학생들에게 전해졌는지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학생들이 즐거움을 온 몸으로 표현해주었습니다. 공연 후에 안 사실인데, 동관 고등학교는 무대가 위험해 학교 측에서 학생들이 올라오지 못 하도록 조치를 해둔 것이었고, 응웬 빙 키옘 고등학교는 학생들이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너무 쑥스러워서 그랬다고 합니다.
넷째 날 오전에는 베트남·한국 기술전문대학과 오후에는 랑선성에서 각각 문화 봉사를 했습니다. 베트남·한국 기술전문대학에서는 저희 공연에 바로 붙여 다른 행사가 있어서 저희는 짧게 마쳐야했습니다. 소통에 문제가 있었나보다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공연을 할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며 공연했습니다. 다행히 학생들은 흥겨워했습니다.
마지막 문화 봉사는 랑선성 문화회관 실내 공연장이었고,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관객이 저희를 기다렸습니다. 무대가 좁아서 제대로 간격을 두고 설 수 없었지만 저희에겐 무대 크기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성심껏 공연을 했고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폭발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렇게 즐겁고 감사하게 베트남에서 7번의 문화 봉사를 마쳤습니다.
원래는 의료 봉사 계획이 있었지만 일정이 조정되면서 의료진 없이 문화 봉사만 오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베트남 사람들은 즐겁게 봐줬고 저희에게 꽃이나 기념품을 주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저희와 같이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들 만큼 성공적인 반응이었고 호의적인 베트남 사람들이 고마웠습니다. 또 자연스럽게 우리 종단을 알릴 수 있겠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베트남에 다녀온 후 우리나라에 감사하게 된 일이 있습니다. 바로 화장실입니다. 저희는 공연장에 도착하면 화장실을 먼저 체크했는데 갈 때마다 놀랐습니다. 저희가 간 학교의 화장실에는 세면대는커녕 문이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명문고로 소문난 학교도 그랬습니다. 수세식 변기 같은 웅덩이에 물이 조금 차 있고 볼 일을 보고 큰 물통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변기에 붓고 손도 씻는 구조였습니다. 문이 있어도 잘 닫히지 않았고 저희는 서로 돌아가면서 문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문도 없는 옆 칸에서 무심하게 일을 보고 바가지로 물을 부은 뒤 나가는 걸 봤습니다. 여기 학생들은 익숙한가보다 싶으면서도 저희는 당황스럽고 적응되지 않았습니다.
박장성의 베트남·한국 기술전문대학은 베트남과 한국의 기술 합작 학교로 우리나라에서 지어준 학교였습니다. 여기엔 거울과 세면대가 있고, 세 개나 되는 화장실에 각 칸마다 문도 달린데다 자동 물 내림 장치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정말 기뻐서 감사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없어봐야 감사함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베트남 문화 봉사를 준비할 때만 해도 ‘부족하지만 내가 이런 재주가 있는 덕분에 이렇게 쓰일 수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상제님께서 살펴주시고, 선각분들의 마음과 문화 봉사에 신경써주신 분들, 함께 공연했던 도우들의 마음이 합쳐져 가능했던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문화 봉사를 준비하면서 리더 전지용 교감께서 항상 “우리가 연예인이 아니고 K-POP이 인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 이 자리에 쓰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한다.” 라고 해 주신 말씀이 가슴에 남습니다. 우리 종단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에 쓰임이 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이 경험이 앞으로 제가 수도하는 데에 있어서 정말 큰 밑거름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대순진리회가 세계로 퍼져서 모든 인류가 상제님을 알게 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대순회보 2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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