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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 신천 유불사(呼寒信天猶不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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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근평 작성일2018.08.21 조회4,0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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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2 방면 보정 김근평(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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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01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휘젓네.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지.

 

 

삶은 끝없는 반복이다. 다람쥐가 쳇바퀴 안을 돌 듯, 우리는 반복적 삶에 익숙하여 발전이 없다. 이미 익숙하여 편해진 과거의 것에 길들여져 활기와 재생이 시작되는 봄인 ‘4월을 잔인하다’고 느낄 뿐이다. 후천은 상생의 봄날이다. 겨울 같은 상극의 선천은 가고 도화낙원(道化樂園)의 후천이 오고 있다. 변화의 폭풍우가 몰아치려 하는데, 마음에는 메마른 ‘황무지’를 안고, 호한새처럼 달콤한 잠에 빠져 무기력과 무의미한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 안이 평범한 일상이 된 것은 아닌가?

 

상제님께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 말라. 아직도 남아 있는 복이 많으니 남은 복을 구하는 데에 힘쓸지어다. 호한 신천 유불사(呼寒信天猶不死)02이니라”(교법 3장 9절)고 김형렬 종도에게 교훈하신 구절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털이 없는 호한새는 밤마다 추위에 잠을 못 이루고 떨면서 날이 새면 꼭 집을 지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 그렇지만 정작 낮이 오면 지난밤의 맹세는 잊어버린 채 먹이를 찾아 허기를 달래고 이내 잠에 취해 버리는 삶을 되풀이하는 새이다. 이처럼 호한새는 맹세와 망각 사이를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한심한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호한새와 인간의 삶을 병치하여 비교하면 많은 이치가 도출되고, 우리로 하여금 반성을 요구한다.

 

먼저 호한새가 낮에 꾸벅꾸벅 조는 것은 밤에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새를 졸게 만들어 집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겁액이다. 다시 밤을 저승, 낮을 이승이라고 치환해 보면, 밤에 잠을 못 자서 낮에 졸리듯이 우리가 이생을 살아가면서 저승으로부터 가지고 온 겁액으로 삶의 제약이 생기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인이 결과를 만들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존재한다는 인과의 법칙이며, 이러한 인과적 겁액이 내 삶의 두 다리를 보이지 않게 움켜쥐고 나의 의지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호한새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의 겁액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관직에서 쫓겨난 후 관복 차림으로 매일 4시간 이상 고전을 산책했다는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03와 그리고 그의 역작 『군주론』(Il principe)의 탄생이나, 개개 사물과 개인의 행위를 대상으로 존재원리나 당위 법칙들을 끝까지 추적, 탐구하려는 지적 활동인 격물궁리(格物窮理)를 행했던 주자04, 처절한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내하고 참회하며 구도했던 진표율사,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05의 거대한 청새치와 연이어 나타난 상어 떼와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산티아고(Santiago)라는 노인의 예처럼, 역작이든 앎이든 쉬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태도에는 한결같이 불굴의, 집요한 의지가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겁액을 이겨내고, 운명을 변화시키는 길은 보통의 의지로는 부족하며 죽을 것 같은 경험과 초월적 의지가 필요하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의 한계와 겁액을 극복하려 하지만 이러한 초월적 의지를 드러내는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성사(成事)가 없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전경』을 이해하지 못 하면 열 번,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읽어서 그 뜻을 깨우쳐야 하는 것이고, 수반에게 도담을 못하면 애절함으로 수없이 연습도 해봐야 한다. 수도를 게을리하는 후각을 위해서 어떻게 교화를 해줄까 밤잠을 설쳐가면서 몇 날 며칠을 치열하게 고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 도에서는 성(誠)이라 하며, 그리고 지성(至誠) 연후에는 신명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도가 신도(神道)임을 모르는 것은 내가 아직 정성이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대순은 신도이기에 지성 연후는 필연적 신명의 도움이 있음을 반드시 믿고 또 믿자.

 

요약하면 삶의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고 열성을 매개로 하여 내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굴레를 벗게 되고, 운명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구필응(有求必應)06이라 했던가?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 도의 믿음을 성취하고, 거기에 하늘과 인간에 대한 외경이 더해져, 점점 단 한 점의 의심도 없는 상제님에 대한 완벽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수도생활에서 성경신(誠敬信)이라는 삼요체(三要諦)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도통진경(道通眞境)이다. 목련꽃이 꽃망울을 터트릴 때는 추운 겨울을 인내한 결과이듯, 삶의 찬란한 꽃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겁액을 극복한 결과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수도과정의 좌절과 겁액들을 하나씩 극복해 가는 과정은 곧 완벽한 진경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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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호한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실상 매번 저 세상에서 이 세상에 올 때는 얽힌 척을 풀고 업을 닦으며 도성덕립(道成德立)하러 오는 것인데, 우리는 매번 전생(전날 밤)의 기억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현생(낮)의 여러 유혹에 빠져 삶을 향유하다 죽는 것이다. 이러한 호한새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무의미한 반복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윤회의 굴레에서 후회와 맹세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현생의 생활 속에서도 도인으로서의 우리는 하루와 일주일, 아니면 한 달, 일 년이라는 시간적 단위마다 나약하고 게으른 정신력으로 그 무의미한 반복을 벗어나지 못하고, 땀을 흘리며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 더 호한새의 이야기를 우리 삶으로 비유한다면, 먹이를 찾아 ‘배를 채우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는 기본적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고, ‘달콤한 잠’을 자는 것은 돈과 같은 또 다른 욕망의 충족이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일하여 한 손에 허기를 면할 빵을 들고 있는데, 우리는 또 다른 한 조각을 원하며 ‘집짓기’를 미룬다. 분명 배고픔이 해결되었는데도 돈이나 명예와 같은 다른 형태의 욕망에 빠져들고,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법을 어기고 남을 해하는 죄를 지으면서까지 쾌락적 삶을 희구(希求)한다. 소중한 삶 속에서 재색명리(財色名利)에 빠져 남의 행복을 향한 노력을 저해한다. 점점 죄는 눈 덩어리처럼 커지게 되는 것이다.

 

재색명리란 재물욕, 색욕, 명예욕, 이욕(利慾)이라는 모든 욕망의 총칭이며, 유혹에 걸리면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덫과 같은 것이다. 불교적 견해에서 모든 중생은 불·보살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재물욕과 색욕에 걸려 넘어지고, 다시 명예욕과 이욕에 주저앉는다. 그리하여 애석하게도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은 중생 중에서 이를 모두 초월하여 주어진 운명과 팔자를 바꾸는 인간은 극소수일 뿐이다. 결국, 아라한07은 고사하고 예류(預流)08의 경지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진정 나는 과연 이 욕망의 덫을 모두 초월했는가?

 

다시 기독교적인 이야기로 치환하면, 에덴동산의 이브를 유혹한 사탄처럼 금단의 ‘사과’를 따먹게 만드는 유혹자가 삶에는 도처에 놓여있다. 또한, 삶은 신기루와 같은 성질이 있어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고, 실제로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손을 뻗어보라고 유혹한다. 삶은 핑크빛 희망과 성공의 비전을 보여주지만, 실상은 부조리로 가득한 상극이므로, 인간적 몸부림이라 할 수 있는 치열한 노력에도 몸만 상할 뿐이고 내 인생의 귀중한 시간도 잃어버린다. 종국에 손에 쥐는 것은 별로 없기에 삶은 곧 허상이 되며, 인간의 성공에 도달하려는 처절한 몸짓은 비극으로 종결된다.

다음의 『금강경』의 두 구절은 삶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함축하고 있다.

 

①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②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첫 번째 구절은 ‘모든 형상 있는 것이 형상이 아님을 만약 본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으므로 형상 있는 것에 속지 않고 집착하지 말아야 비로소 진리를 바르게 깨우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구절은 유위법(有爲法: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불교적 견해에 의하면 삶의 본질은 결국 공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삶의 유혹을 극복하여 『수타니파타』09에서 말하듯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기”보다는 간혹 뒤를 돌아보고, 수도와 세속적 욕망 사이에서, 혹은 수도생활에서조차도 솟아오르는 여러 욕망10에 갈등하고 방황한다. 즉, 진정한 수도를 갈망하면서 나도 모르게 재색명리와 같은 욕망을 꿈꾸는 자아의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도에서는 이를 일러 두 마음이라 하며, 단언컨대 이러한 일심(一心)이 아닌 이심(二心)을 안고 있는 수도인에게 도의 성공은 없다.

 

우리는 이제 뒤는 초월하고 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무소의 뿔’처럼 직진해야만 한다. 재색명리라는 개인적 욕망 따위는 떨쳐버리고 ‘집을 짓는 일’에 열성으로 맹진해야 한다. ‘호한 신천 유불사’란 구절은 타고난 복이 없는 추운 지방의 호한새도, 부리가 머리 위에 있어 떨어지는 먹이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신천새도 상제님의 덕화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 새들도 나름대로의 복이 있어 연명하는데, 하물며 우리 도인들이 혈성을 다해서 수도할 때 궁극적 실패는 없는 것이다. 지금 실패했다면 이제 성공으로 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생유어사(生由於死)11의 진리를 믿자. 상제님께서 칭양(稱揚)하셨던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마음 하나만 간직했던 전명숙을 본받고, 그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자. 한 번 믿어보려는 자세가 아니라, 나의 모든 존재를 걸고 확고하고, 크게 믿어보자, 미륵으로 오신 상제님이 우리 안에 계시니까, 아!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힘든 50년 공부종필하신 우리 도주님이 계시니까, 도전님이 우리 옆에서 지켜보시니까. 상제님 말씀대로 호한 신천 유불사이니까.

 

 

 

01 이 구절은 20세기 최고의 시인이라 평가받는 T. S. 엘리엇(Eliot)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도입부이다.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정신적 황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02 ‘호한이나 신천 같은 새조차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03 이탈리아의 통일과 번영을 꿈꾸며, 낡은 사상과 관습을 부수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한 정치사상가.

04 주자가 사상채(謝上蔡)의 『논어설』을 읽을 때 “우선 붉은 연필로 해석이 뛰어난 곳에 줄을 긋고, 그 부분을 더욱 숙독하여 잘 음미하여 보면 붉은 줄이 처진 부분이 몹시 번잡하게 생각되었다. 이러면 이번에는 다시 붉은 줄 가운데 더욱 중요한 부분에 검은 줄을 긋고 그곳을 더욱 숙독하여 음미했다. 또 한층 더 숙독하여 검은 줄 가운데에서 정수가 되는 부분을 떼어내어 푸른 줄을 긋고 그다음에는 다시 그 푸른 줄의 정수를 추출했다. 여기까지 오면 얻을 것이 매우 적어져 단지 한두 구절만이 문제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리하여 하룻밤 이 한두 구절에 마음을 집중시켜 완미하면 가슴 속이 저절로 시원해졌다.” 집요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텍스트를 증류해 가는 자세, 이것이 그의 독서법이었다.

05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1952년 출판된 역작으로, 파괴적 숙명과 싸우는 산티아고라는 노인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여기서 큰 고기인 청새치는 삶의 이상이며, 상어는 우주적 폭력 등으로 해석된다.

06 구하는 게 있으면 반드시 (신)응한다는 뜻이다.

07 아라한(阿羅漢): 번뇌와 탐ㆍ진ㆍ치 삼독 모두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열반의 경계를 체득한 분.

08 예류(預流): 초기 불교에서는 수행의 결과에 따라 사람을 범부(凡夫)ㆍ현인(賢人)ㆍ성인(聖人)으로 구별하고 있으며, 다시 성인은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阿羅漢)이라는 네 가지의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예류란 욕계, 색계,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상태로 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 입류(入流)라 한다. 이 세상에 일곱 번만 다시 태어나면 아라한이 되는 존재이다.

09 『수타니파타』는 초기 불교 경전으로, 수타(sutta)는 경(經)이란 말이고 니파타(nipāta)는 모은 것이란 뜻이다.

10 이를테면, 나 홀로 공을 세우려는 욕망, 후각들을 손에 쥐려는 욕망, 윗사람에게 나만 잘 보이려는 욕망, 존경받고 싶은 욕망, 좀 더 편해지고자 하는 욕망 등등이 있겠다.

11 ‘죽음에서 생이 나온다’는 뜻임.

 

 

<대순회보 2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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