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께서 인용하신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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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탁 작성일2018.12.06 조회3,148회 댓글0건본문
김탁 01
『전경』은 증산(甑山) 성사(聖師)의 말씀과 천지공사에 대한 여러 자료를 새롭게 수집하고 기존의 기록을 객관적으로 검토하여 1974년 편찬 간행된 대순진리회의 경전이다. 기존의 기록과는 달리 한글을 위주로 주제별로 새롭게 목차를 정해 정리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증산 성사의 생애와 사상을 알려주는 경전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지만, 성사께서 외워주거나 인용한 한시(漢詩)도 수십 수가 실려 있어 한문 세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증산 성사께서 인용하신 한시(漢詩)가 원래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지었는지를 찾아보는 작업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이는 한글세대가 성사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더해서 그 한시가 성사가 펼치신 대도의 진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밝히는데 조그마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였다.
증산 성사께서 외워주시거나 쓰신 한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학계나 교계에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연구되어본 적이 없는 실정이다. 다만 여러 교단에서 증산 성사께서 행하셨던 천지공사(天地公事)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입장에서 신성하게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증산 성사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문헌에서 인용하신 한시(漢詩)들은 어디까지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시(詩)이며, 이에 대한 해석은 교리적, 신비적 해석과는 별개의 영역에 있다. 다시 말해서 성사께서 일부 글자를 바꾸시며 본래의 맥락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사용하신 한시들은 사실 완전히 새로운 한시라 볼 수 있기에 그 정확한 해석이 어렵지만, 원래 한시들은 그 전통적인 해석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글은 성사께서 변용하신 한시들이 원래 어떠한 상황이나 맥락에서 지어진 것인지 살펴보고 그 전통적 해석을 제시하여 『전경』의 이해에 간접적이나마 작은 도움이 되고자 기획되었다. 이글이 성사의 한시에 대한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용된 한시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소개하려는 것임을 다시 한번 밝히며 연재의 순서는 무작위임을 밝힌다.
송시열(宋時烈)의 [자경음시아손(自警吟示兒孫)]
『전경』 행록 3장 40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에게
明月千江心共照 長風八隅氣同驅
라고 하셨도다.
위의 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제 4권에 실린 「자경음시아손(自警吟示兒孫)」 [스스로 일깨우는 시를 읊어 아손(兒孫)에게 보임]이라는 칠언율시(七言律詩)의 일부 구절과 거의 동일하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자명위대장부(何者名爲大丈夫) 어떤 이를 대장부라 이름하는가?
어재어색시여무(於財於色視如無) 재물과 여색은 못 본 듯해야 하리라.
요교기족장신자(夭嬌豈足戕身者) 요염하고 예쁜 것이 왜 몸을 해치는가?
신귀영능감실호(神鬼寧能闞室乎) 귀신도 어둔 방을 엿보고 있느니라.
제월천강심공조(霽月千江心共照) 갠 달 일천 강에 마음 함께 비취고
장풍팔우기동구(長風八宇氣同驅) 긴 바람 팔방에 기운 같이 달린다.
수간만고영웅사(須看萬古英雄事) 만고 영웅의 사업을 보건데
전전긍긍실작추(戰戰兢兢實作樞) 전전긍긍하는 것이 참으로 요체로다.
송시열이 「자경음시아손(自警吟示兒孫)」이라는 시를 지은 것은 그가 자신의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시의 앞부분은 대장부(大丈夫)란 재물과 여색(女色)을 경계해야 하며, 신적(神的)인 존재가 모든 일을 살펴보고 있으므로 몸을 삼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뒷부분은 대장부는 구름이 걷힌 밝은 달이 천 개의 강을 밝게 비추듯이 마음을 쓰며, 큰 바람이 천지 팔방에 부는 것처럼 기운을 불어넣는 존재여야 하며, 만고에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의 일을 살펴보면 매사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조심하고 삼가서 행동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대장부 즉 영웅의 삶을 살려면 모든 일에 근심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말이다.
송시열이 쓴 시는 ‘제월(霽月)’이라고 적혀 있는데, 증산 성사께서는 ‘명월(明月)’로 바꾸셨다. 두 단어의 뜻은 거의 동일하다. 어쨌든 시의 이 두 구절은 원래 대장부(大丈夫)의 삶의 자세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구름이 걷힌 밝은 달이 천 개의 강물을 모두 밝게 비추는 것처럼 마음을 쓰고, 큰바람이 온 팔방에 기운을 동일하게 몰아주듯이 행동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대장부와 영웅호걸이 어떻게 마음을 쓰고 행동하는지를 시를 통해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사용된 맥락이 많이 다르기에 『전경』의 한시 구절은 다른 관점의 새로운 해석이나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 판단된다.
두보(杜甫)의 [거촉(去蜀)]
『전경』 예시 55절에는 성사께서 친필로 적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萬事已黃髮 殘生隨白鷗 安危大臣在 何必淚長流
이 시구(詩句)는 두보(杜甫, 712~770)의 [거촉(去蜀)]이라는 시의 일부분인데,02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재객촉군(五載客蜀郡) 5년 동안 촉 땅의 나그네 되었고
일년거재주(一年居梓州) 일 년 동안 재주(梓州)에 살게 되었네.
여하관색조(如何關塞阻) 어찌하여 고향길 막혀서,
전작소상유(轉作瀟湘遊) 길을 돌려 소상으로 유랑하게 되었네.
만사이황발(萬事已黃髮) 만사에 이미 황발이니(늙었으니)
잔생수백구(殘生隨白鷗) 남은 인생 흰 갈매기를 좇아 살리라.
안위대신재(安危大臣在) 나라의 안위(安危)야 대신(大臣)에 있나니
불필루장류(不必淚長流) 어찌 눈물을 길이 흘릴 필요 있으리오.
두보가 이 시를 지은 때는 서기 764년 5월이다. 자신을 돌봐주던 절도사 엄무(嚴武)가 갑자기 성도(成都)를 떠나자, 가족을 데리고 자신도 성도를 떠나면서 그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는 두보가 약 5년간 그의 생애에서 편안한 기간을 보내던 촉(蜀) 땅을 떠나면서, 자신의 서글픈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두보는 촉에서 비교적 높은 벼슬을 하면서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생계가 막연한 상태로 다른 지방으로 유랑해야 할 처지였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인생사 모든 일이 운수가 정해져 있고, 이제 나이 들어 세상을 경영해보려는 젊은 시절의 꿈이 수포가 되니, 자연을 벗 삼아 나머지 생애를 편안히 마치고자 하는 작가의 고독한 정이 배어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두보가 자포자기한 울분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원하기도 한다. 성사께서는 [거촉(去蜀)]이라는 두보의 시 가운데 작자가 자신의 삶을 설명했던 앞의 4구를 생략하고 뒤의 4구만 인용하셨는데 이 부분은 원래 대국(大局)적인 운명의 힘, 자족(自足)하는 정신적 자유의 경지,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뜻한다.
이이(李珥)의[과예안알퇴계이선생황잉정일율(過禮安謁退溪李先生滉仍呈一律)]
성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시도 제자들에게 외워주셨다.
상제께서 정미년 十월 어느날 경석에게 돈 三十냥을 준비하게 하신 후
“이것은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하시면서 어떤 법을 베푸시고
溪分洙泗派 峰秀武夷山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活計經千卷 行裝屋數間 小臣求聞道 非偸半日閑
이라는 시를 읽어 주셨도다. (행록 3장 47절)
이 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예안 땅을 지나다가 퇴계 이선생 황을 뵙고 율시 1수를 올리다(과예안알퇴계이선생황잉정일율(過禮安謁退溪李先生滉仍呈一律)”라는 시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계분수사파(溪分洙泗波) 시내는 수사(洙泗) 물결처럼 갈리어지고
봉수무이산(峯秀武夷山) 봉우리는 (주자의) 무이산 같이 빼어나도다.
활계경천권(活計經千卷) 살아가는 일은 경전 천 여 권
행장옥수간(行藏屋數間) 나고 듦은 두어 칸 집 뿐이로다.
금회개제월(襟懷開霽月) 흉금의 회포가 열리니 마치 구름 걷힌 달과 같고
담소지광란(談笑止狂瀾) 담소는 어지러운 물결 그치게 하네.
소자구문도(小子求聞道) 이 내 몸(찾아뵌 뜻은) 도(道) 들음을 구하려 함이지
비투반일한(非偸半日閒) 반나절의 한가로움 취함이 아니로다.03
『전경』은 위의 시의 3구와 4구를 5구와 6구로 바꾸어 기록하고 있으며, 파(派), 장(裝), 신(臣), 한(閑) 등이 원문에는 각각 파(波), 장(藏), 자(子), 한(閒)으로 적혀 있다.
율곡은 그의 나이 23세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방문하였다. 이 시는 율곡이 퇴계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찾아가 그곳에 묵으면서 느낀 심정을 읊은 것이다.
그 전체적 내용은 산수(山水)를 들어 공맹정주(孔孟程朱)의 학풍을 이어받고 있는 퇴계를 찬양하고, 두어 칸의 산간 초옥에서 경전을 일삼는 생활상과 학덕이 높은 인품을 그가 느끼고 본 대로 말하고 나서, 끝으로 율곡 자신이 와서 퇴계 선생을 뵙는 것은 도를 위한 일임을 밝히고 있다.
율곡은 이 시의 저작 년대를 1556년 명종(明宗) 13년 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56세였으며, 병으로 인해 시골로 돌아가 예안현(禮安縣)의 산골짜기 사이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성사께서는 이 시를 통해 도를 찾고 구하는 태도를 알려주신 듯하다. 즉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꿋꿋하게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퇴계의 생활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으며, 아울러 도(道)는 세상의 속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 아닐까?
김병연(金炳淵)의 금강산시(金剛山詩)
『전경』 행록 2장 6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또 어느 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步拾金剛景 靑山皆骨餘
其後騎驢客 無興但躊躇
를 외워 주시니라.
첫구의 습(拾)은 줍다, 오르다, 올라가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보습(步拾)은 “걸어서 올라가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보습이라는 관용어는 없다. 다만 “길을 걷고 물을 건너다”는 뜻의 보섭(步涉)이 전할 따름이다. 따라서 습(拾)은 섭(涉)과 통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더라도 위 한시의 1구와 2구의 뜻이 선뜻 통하지 않는다. 금강산의 경치를 걸어서 구경하니 푸른 산이 뼈만 남는다는 의미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3구와 4구도 맥락이 통하지 않는다. 금강산의 경치를 배경으로 삼은 나귀를 탄 손님이 흥이 없이 주저할 따름이라고 노래하는데, 나귀를 타고 있는 객과 흥취가 없이 주저한다는 행위는 그다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대순진리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이 시와 유사한 김삿갓이 지은 금강산(金剛山)의 경치를 읊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특별한 제목은 전하지 않는다.04
약사금강경(若捨金剛景) 만일 금강산의 경치를 빼놓는다면
청산개골여(靑山皆骨餘) 푸른 산은 모두 앙상한 뼈만 남으리라.
응지기경객(應知騎鯨客) (그렇게 된다면) 응당 고래 탄 나그네라 하더라도
무흥단주저(無興但躊躇) 흥취가 없이 다만 머뭇거릴 뿐이리.
이 시를 해석하는 가장 큰 실마리는 기경객(騎鯨客)이다. 기경객의 어원과 뜻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경객(騎鯨客)은 중국 당대(唐代)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 701~762)을 가리킨다. 이백은 자신을 해상기경객(海上騎鯨客)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백이 술에 취한 채 채석강(采石江)에서 노닐다가 물속의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은 뒤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속전(俗傳)이 있는데, 훗날 시와 술을 마음껏 즐기며 호방하게 노니는 문인(文人)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기경(騎鯨)이 쓰이게 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입증된다. “이태백(李太白)이 최종지(崔宗之)와 함께 채석에서 금릉(金陵)까지 달밤에 배를 타고 갈 적에 시와 술을 즐기면서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노닐었는데, 뒷사람들이 ‘고래를 타고 가는 이백을 만난다면 (若逢李白騎鯨魚)’이라는 두보(杜甫)의 시구를 빌미로 해서 이백이 술에 만취한 채 채석강에 비친 달을 붙잡으려다 빠져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는 기록이 『당재자전(唐才子傳)』, [이백(李白)]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사와 관련하여 북송(北宋) 마존(馬存)의 시 [연사정(燕思亭)]에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니(李白騎鯨飛上天), 강남 땅 풍월이 한가한지 여러 해라(江南風月閑多年)”라는 구절이 『송예보집(宋藝圃集)』 권 13에도 있다. 그리고 매성유(梅聖兪, 1002~1060)는05 [채석강증곽공보(采石江贈郭公甫)]라는 시에서 이백의 죽음을 두고 “응당 굶주린 교룡(蛟龍)의 입에 떨어지지 않고(不應暴落飢蛟涎), 고래를 타고 푸른 하늘로 올라갔으리(便當騎鯨上靑天)”라고 노래했다.
원래 이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약사(若捨)는 『전경』의 보습(步拾)과는 다르다. 두 번째 구절의 ‘청산개골여’의 의미와 통하는 구절은 김삿갓의 시에 나오는 약사다. 금강산의 수려한 경치를 제외한다면 푸른 산은 앙상한 뼈대만 남게 될 것이라는 한탄으로 앞의 두 구는 해석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경』처럼 보습(步拾)으로 시작하면 이어지는 ‘청산개골여’의 의미는 기존의 해석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뜻이 통할 것이다. 그리고 3구와 4구는 “고래를 탄 손님”, 즉 엄청난 시재(詩才)를 지닌 이백(李白)과 같은 시인이라 하더라도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없어진 뼈만 남은 산 앞에서는 시흥(詩興)이 돋지 않은 채 다만 주저하게 될 뿐이라고 해석해야 자연스럽다. 김삿갓이 지은 [금강산경(金剛山景)]이란 제목의 시가 있고 이 시는 3구가 ‘응지기경객(應知騎鯨客)’이 아니라 ‘기후기려객(其後騎驢客)’이라는 주장도 있다.06 그러나 이 시의 제목과 전체 내용이 정확히 어떠한 문헌을 근거로 하는지를 밝히지 않아 필자가 이에 대해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3구 ‘기후기려객’이 4구와 의미가 통하지 않는데 과연 천재적 시인인 김삿갓의 실제 작품일지 의문이다. 혹 전승 과정에서 경(鯨)이 려(騎)로 잘못 알려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전경』의 ‘보습금강경(步拾金剛景)’으로 시작되는 시는 성사께서 김삿갓의 시를 활용하여 새로운 시를 구성하신 것이고 따라서 원래 시가 가진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순진리에 입각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김병학(金炳學)이 스승 양석룡(楊錫龍)을 위해 지은 만시(輓詩)
『전경』 권지 2장 27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또 다시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의 만사를 외워 주시니 다음과 같으니라.
詩中李白酒中伶 一去靑山盡寂寥
又有江南楊進士 鷓鴣芳草雨蕭蕭
성사에 관한 최초의 언행록인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1926) 139쪽에는 “또다시 남원(南原) 양진사(梁進士)의 자만사(自輓詞)를 외어주시니 아래와 같더라. 시중이백주중령(詩中李白酒中伶), 일거청산진적요(一去靑山盡寂寥), 우유강남양진사(又有江南梁進士), 자고방초우소소(苜苦芳草雨蕭蕭)”라고 적혀 있다. 마지막 구절의 자고(苜苦)는 의미에 닿지 않으므로 오자(誤字)로 보인다. 어쨌든 애초의 기록은 양씨(梁氏) 성을 가진 진사 벼슬을 했던 인물이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 직접 지은 애도시라고 주장되었다.
또한 『대순전경(大巡典經)』 초판(1929)에는 양진사(楊進士)의 자만시(自輓詩)로 기록되었고, 자고(鷓鴣)로 바로잡아져 있다. 『대순전경』 2판(1933)은 한글판으로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대순전경』 3판(1947)에는 ‘남원(南原) 양봉래(楊蓬萊)의 자만시’라고 적혀 있다. 결국 『대순전경』 의 편찬자는 이 시를 “남원에 살던 양봉래의 자만시”라고 주장한 것이다.
봉래(蓬萊)라는 호를 가진 인물로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유명하다. 그러나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남원에 살았던 적도 없던 인물이다. 그리고 양사언의 문집에는 위의 시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나 『대순전경(大巡典經)』 의 저술 또는 편찬자가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추측으로 기록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전경』은 이 시를 양진사의 만사(輓詞)라고 알려주어 정확성을 보인다.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이 스승인 진사(進士) 양석룡(楊錫龍, 1800~1868)을 추모하며 지은 [만양상사(輓楊上舍)]라는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이를 증명한다.07 만사(輓詞)는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이며 상사(上舍)는 진사(進士)와 같은 말이다.
詩中李白酒中伶 시로 유명한 이태백도, 술로 유명한 유령(劉伶)도
一去靑山盡寂寥 청산에 한번 들더니 아무 소식도 들려주지 않네
又哭湖南楊上舍 이제 또 호남의 양상사를 곡하니
鷓鴣芳草雨蕭蕭 자고새는 푸른 풀 위에서 슬피 울고, 비만 소소하게 내리는구나.
이 시가 전해지는 문헌인 『남원양씨대동보』는 위의 시를 “시 가운데의 이태백과 술 속의 광대(도연명)도 청산을 한번 떠나니 고요했는데, 또 호남의 양진사가 가니, 자고 방초도 쓸쓸하구나”라고 해석하였다.08 1구에 나타난 인물이 유령인지 도연명인지는 기록이 엇갈린다. 족손(族孫) 양병익(楊秉益)이 찬한 양석룡의 행장에는 1구가 “시중이백주중도(詩中李白酒中陶)”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뜻에 큰 차이가 없지만 『전경』에는 3구의 곡(哭)이 유(有)로 적혀 있기도 하다.
1구에 나오는 이백(李白, 701~762)은 중국 당나라 때 두보와 더불어 최고의 유명 시인이다. 그리고 유령(劉伶, 225?~280?)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와 서진(西晉)의 시인으로 자는 백륜(伯倫)이며,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평소 술을 좋아한 나머지 유령호주(劉伶好酒)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만약 첫구가 령(伶)이 아니라 도(陶)라면 도연명(陶淵明, 365~427)09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병학이 지은 만사(輓詞)의 주인공인 양석룡(楊錫龍)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성내면(星內面) 옥제(玉提)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이 남원(南原)으로 양지복(楊志馥)의 장남이다. 그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문인으로 좌찬성(左贊成) 김병기(金炳冀),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김병학(金炳學), 예조판서(禮曹判書) 김병필(金炳弼), 이조판서(吏曹判書) 신석희(申錫禧) 등이 있다. 양석룡은 제자들의 권유로 그의 나이 59세 되던 철종 9년(18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2위로 합격하여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에서 장의(掌議)로 뽑혀 수학하였다. 몇 년 뒤 양석룡은 다시 한강 이남에 있는 고향에 내려와 머물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자녀로 3남 1녀를 두었으며, 그의 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에 있다.
시의 작자인 김병학은 순조 21년(1821)에 태어나 고종 16년(1879)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潁樵)다. 김이직(金履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인순(金麟淳)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수근(金洙根)이며, 어머니는 조진택(趙鎭宅)의 딸이다. 그리고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조카이다. 김준근(金浚根)에게 입양되었다. 김병학은 철종 4년(1853) 현감으로 정시 문과의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掌令), 사간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배경으로 대사헌,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할 때도, 고종 즉위에 은밀히 노력한 공로와 딸을 며느리로 줄 것을 약속한 평소의 친분 때문에 고종 1년(1864)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김병학은 이듬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 해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 이유원(李裕元) 등과 함께 찬집소총재관으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하였다. 또 그는 보수적인 척화론자로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의 탄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병인양요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흥선대원군에 권고해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던 이항로(李恒老)를 승정원동부승지로 등용하도록 천거하였다. 영의정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의 체결에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고종 16년(1879) 김병학은 사망하기 직전에도 판부사 홍순목(洪淳穆), 한계원(韓啓源),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좌의정 김병국(金炳國) 등과 함께 연차(聯箚: 연맹으로 왕에게 쓴 건의문)를 올려 일본이 요구하는 인천, 원산의 개항 가운데 인천만은 서울의 백 리 안에 있으므로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병학은 자신의 스승인 양석룡을 이백, 유령, 도연명 등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했고 스승이 별세하자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으로 이 만사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성사께서 1868년에 지어진 이 시를 언급하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백과 죽림칠현인 유령, 도연명 등을 통해 그 뜻을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순회보> 2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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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 박사, 저서 『증산교학』, 『증산 강일순』, 『한국의 관제신앙』, 『한국의 보물, 해인』 , 『조선의 예언사상』 등
02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 14, 『한시대관(漢詩大觀)』 3(경인문화사, 1987), 1305쪽.
03 이이(李珥), 『율곡전서(栗谷全書)』 권 14, 잡저(雜著), [습언(溼言)], 『국역 율곡전서』 4(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35쪽-38쪽.
04 석암 김형태 편, 『김립시집(金笠詩集)』 (1985), 43쪽.
05 북송(北宋)의 현실주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이다.
06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와 일화(하)」, 《대순회보》 112호(2010년 9월호), 32쪽~37쪽.
07 남원 양진사가 양석룡임을 밝힌 최초의 연구는 다음의 논문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한다면 ‘김주우,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에 대한 인물 고찰」, ≪대순회보≫ 124호’ 참고.
08 양만종 편, 『남원양씨대동보(南原楊氏大同譜)』 (회상사, 1998), 97쪽.
09 그의 이름은 잠(潛)이고,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며,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유송(劉宋)] 초기에 걸쳐 생존했는데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 시상현(柴桑縣)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첫 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 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 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 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후 도연명은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러운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도연명은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 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 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 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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