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세” 선유(船遊)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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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승훈 작성일2018.01.21 조회2,806회 댓글0건본문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세” 선유(船遊)놀이
유승훈
월야선유(月夜船遊) vs 주유청강(舟遊淸江)
70~80년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면 한 번쯤은 청평의 M.T(수련 모임)에서 보트를 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배를 타고 물에 떠다니는 기분이야 매우 좋지만은 노젓는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여학생 앞에서 남학생은 이리 저리 노를 휘젓다 빙글 빙글 배가 돌다보면 민망한 기분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도 배 위에서 느끼는 물살의 기운과 강변의 풍경은 젊고 아름답기에 남녀의웃음꽃은 쏟아져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근·현대의 뱃놀이는 젊은 연인들이 즐기는 풍속도이지만 조선 시대의 뱃놀이는 주로 양반들의 풍류 놀이였다. 선유(仙遊), 주유(舟遊)라고 일컫는 뱃놀이는 강과 배, 시(詩)와 술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리는 놀이였다. 그런데 일엽편주(一葉片舟)가 그려진 아름다운 산수화뿐만 아니라 참여 인력과 규모가 커져 대단위의 기록화가 되는 뱃놀이도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 중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가 바로 그것. 이 그림에는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장대한 뱃놀이 풍속이 잘 드러나 있다. <월야선유도>는 대동강 변에서 평안감사 부임을 환영하는 선유(仙遊)놀이가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져 있다. 평안감사가 탄 누선(樓船)과 수십 척의 배가 대동강을 흘러가는 모습도 장관이지만 횃불을 들고 성곽과 강 언덕에 구름처럼 모여든 양반과 백성들의 모습도 스펙터클(spectacle)한 광경이다.
그런데 이 <월야선유도>는 평안감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향연도(饗宴圖)에 가깝다. 양반들의 진정한 뱃놀이 풍속은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 더 잘 나타 난다. 일명 ‘선유도(仙遊圖)’라고도 불리는 혜원의 주유청강(舟遊淸江) 그림은 조선 후기 풍류적 뱃놀이 풍경이 잘 포착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는 바위산을 배경으로 양반과 기생, 악공과 사공 등 총 8명이 배 위에서 다양한 표정과 행위를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단연 세 명의 양반들인데 기생과 함께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백미이다. 장죽을 들이대며 기생을 희롱하는 양반, 강물에 손을 씻는 기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양반들의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당시 양반의 흥취 있는 뱃놀이가 색(色)과 악(樂)을 겸비한 풍류였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자연을 유람하는 뱃놀이
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사대부에게 뱃놀이는 시원한 물놀이의 하나이자, 자연을 감상하는 유람이었다. 뱃놀이는 물의 흐름을 따라 둥둥 떠가는 재미도 즐겁지만 강변에 퍼져 있는 자연의 화폭을 감상하는 것이 일품이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치수공사로 일직선의 초라한 강변이 보이지만 과거에는 용의 허리처럼 굽이쳐 흐르는 강과 우뚝 선 절벽들이 엮어낸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뱃놀이의 미학은 이러한 강변을 따라 흘러가면서 절경의 자연을 관조하는 쾌락에 있었 다.
18세기 중반 조선에서 뱃놀이를 제일 좋아하는 선비로는 아마도 안동의 이종악(李宗岳, 1726~1773)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고성 이씨인 그의 집안은 안동 일대에서도 명가(名家)였으나 이종악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시와 서화를 남겼다. 그는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마침내 작은 배를 타고 낙동강을 선유(船遊)하는 일에 빠지게 되었다. 허주(虛舟)라는 자호(自號)와 배에 항상 실려 있는 거문고·책·다기 등은 그가 배 위에서 즐기는 풍류의 방식을 잘 보여준다.
1763년 4월 4일, 낙동강 상류의 천변은 봄기운으로 완연하였다. 이날 이종악은 집안 아저씨 등과 함께 낙동강 일대의 12경승(景勝)을 유람하기 위하여 뱃놀이를 떠난다. 그가 기획한 뱃놀이는 배를 타고 낙동강 상류를 오르면서 절경을 감상하고, 친인척을 만나 모임을 여는 것이었다. 이종악은 동호(東湖)에서 출발하여 선어대(鮮魚臺), 백운정(白雲亭), 칠탄(七灘) 등을 주유한 뒤 반구정에 도착하여 5일간의 뱃놀이를 마쳤다. 이 장기간의 뱃놀이는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이라는 화첩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던 이종악은 낙동강변의 경승과 뱃놀이의 장면을 실경으로 그려서 남긴 것이다.
이종악의 선유는 강변의 명승을 두루 유람하며, 명승에 도착해서는 지인들과 시회를 열고 거문고를 켜는 등 운치 있는 뱃놀이이다. 이것은 선비들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유가적(儒家的) 뱃놀이이다. 그러나 유가들의 뱃놀이가 자연을 관조하는 철학적 놀이에 불과할 리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양반들의 풍류에는 색(色)과 악(樂)과 더불어 음주가 기본이다. 강의 풍치를 감상하고 시를 읊을 때에는 음주가무의 향연이 함께 따랐다.
선유(船遊)가 남긴 걸작, 적벽부(赤壁賦)
음주가무 뱃놀이를 좋아하는 인물은 농암(壟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였다. 이현보는 안동부사,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며 뱃놀이를 즐겼던 풍류가였다. 그는 안동시 도산면의 분강(分江) 기슭에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이곳을 거점으로 뱃놀이를 즐겼다. 강 가운데 ‘대자리’라는 넓은 평지가 있었는데 이현보는 이곳에 도착하여 흐드러진 술판을 벌였다. 술기운이 물오르면 원님, 백성, 종의 경계가 무너져 버릴 정도의 거나한 술판이 되었다.
농암은 디오니소스적 열광과 취기를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술동이 앞에 어지럽게 혹 스스로 노래하고 재빨리 춤을 추니 누가 권해서인가. 누가 원님이고 누가 백성인가. 사위는 장인을 잡고 서로 춤을 추고 가비(家婢)는 술잔을 들어 함께 주고 받는다.” 술기운이 오르면 일행은 다시 배에 올라서 격렬하게 노래를 부르고 놀았는데, 농암의 표현에 의하면 이 모습이 “매미가 울고 벌이 잉잉거린다”와 같았다고 한다. 농암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퇴계 이황도 이 뱃놀이 일행원으로 함께 참여하였다. 후에 퇴계는 농암으로부터 자연의 즐거움을 깨달았으며, 농암을 참된 즐거움을 아는 은자(隱者)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사대부들이 뱃놀이를 하면서 술을 먹고 시를 읊는 풍속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잘 알려졌듯이 송나라의 소식(蘇軾)은 황저우(黃州)에 유배되었다가 손님들과 적벽에서 배를 타고 노닐면서 ‘적벽부’라는 걸작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도 모두들 선유(船遊)를 하다가 소동파의 적벽부를 한번씩 떠올리고는 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소동파의 적벽부를 본 따 뱃놀이를 한 인물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다. 임오년(壬午年)인 1462년 7월 16일에 그는 벗들과 한강의 광진(廣津)에서 놀았는데, 그 날은 마침 소동파가 적벽에서 놀았던 날이었다. 소동파는 임술년(壬戌年) 7월 16일에 선유놀이를 하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모두 같은 임년(壬年)일뿐만 아니라 노는 장소 역시 적벽과 광진의 석벽이 모두 강의 절벽으로 같았다. 이 우연의 일치를 기뻐하며 서거정 일행은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뱃놀이를 즐겼다. 이후 서거정은 임오년의 ‘적벽놀이’를 떠올리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지난 임오년 칠월 열엿샛날에, 두어 친구와 함께 광나루에서 노닐면서. 풍류를 스스로 적벽의 신선에 비기어, 목란 삿대(배질할 때 쓰는 장대) 계수나무 노로 물결을 저을 제, 구름 새에서 달빛 솟아 황금 물결 이루고, 맑은 술은 넘실넘실 황아(黃鵝, 빛깔이 좋은 술)가 둥둥 떴는데 …(하략)… ”
남녀의 데이트 뱃놀이
구한말에는 뱃놀이를 위한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름하여 ‘선유회(船遊會)’. 이들은 대체로 정부의 관리들로서 함께 뱃놀이를 하면서 뜻을 모아 단합을 하였다. 친일 매국단체인 일진회에서도 선유회를 발기하여 용산에서 뱃놀이를 즐겼는데 이들의 모임은 내부 분열에 자주 삐걱거렸다. 「황성신문」
1909년 7월 31일자에서는 일진회장인 이용구 (李容九)가 윤갑병(尹甲炳)을 야단치는 바람에 뱃놀이가 즐겁지 못하고 풍파에 휘말렸다는 ‘선유풍파(船遊風波)’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부(妓夫)인 기둥서방들이 앞장을 서서 기생들끼리 뱃놀이를 즐기는 선유회도 있었다. 1909년 7월에는 구한말 기생들의 단체인 창기조합(娼妓組合)에서도 마포강에서 선유회를 열고 기생들이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
일제 강점기에는 점차 뱃놀이가 양반들의 풍류에서 연인들의 데이트 놀이로 진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작은 배들이 많아지고, 동력선이 발전하는 등 선박의 대중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1930년대 초가을에 즐기는 한강의 뱃놀이는 서울의 대표적 풍속이 되었다. 1937년 10월 『삼천리』라는 잡지에서는 ‘초추(初秋)의 선유(船遊), 서울의 명승(名勝)을 찾아’라는 제목 하에 뱃놀이 풍속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마다 제철이 돌아오면 산과 바다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
자연의 품속에 안기워 사는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홍진만장(紅塵萬丈) 시끄러운 도회(都會)의 사람들은 시원한 산과 푸른 물결을 여간 그리워하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는 일요일이면 야외로 또는 인천(仁川) 월미도(月尾島)로 또는 ‘뽀트노리’를 하기 위하여 한강(漢江) 방면으로 젊은 남녀들이 쌍을 지여 몰려간다.”
일제강점기 한강의 연인 뱃놀이가 성행하였던 곳은 한강 인도교와 뚝섬 수원지 부근이었다. 그런데 뱃놀이가 급격히 유행함에 따라서 익사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청춘남녀가 밤늦은 시각의 달빛 아래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빠져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리하여 여름철이 오면 해당 경찰서인 동대문서는 강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보트 단속’을 벌였다. 1938년 5월 16일 동대문서가 뚝섬에서 검사한 보트만 해도 51척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불량 보트는 수선을 명하고, 사용이 불가능한 보트는 폐기 처분시키는 등 보트 단속 일이 적지 않으니 일제 강점기 경찰들에게 뱃놀이는 결코 즐거운 놀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찰들의 단속과 익사사고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의 뱃놀이는 계속되었다. 아름다운 달빛이 번지는 한강의 뱃놀이에서만큼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놀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필자소개
경희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청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를 지냈고, 현재 부산박물관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역사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민중생활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있다. 저서로는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민속』 (학술원선정우수학술도서), 『아니놀지는 못하리라』 (우리놀이의문화사)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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