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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방산과 최풍헌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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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철환 작성일2018.02.15 조회2,6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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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환(宋哲煥)*

고흥(高興)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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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高興)군 동강면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두방산(斗傍山)은 보성군에서 고흥반도로 뻗어 들어오는 산맥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그 높이는 489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산세가 가파르며 계곡이 깊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산의 양 계곡에서 흐르고 있다. 정상에 오르려면 용흥사(龍興寺)에서 약 3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산세는 웅장하고 사방이 한눈에 들어와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이 산의 이름은 원래 『증보문헌비고』에는 지래산(智來山), 지리산(地理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언제부터 두방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특히 두방산 옆으로 잇닿아 뻗어 있는 병풍산(屛風山, 482m)과 첨산(尖山, 314m)을 유심히 바라다보노라면, 마치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형상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부처님 형상이 분명할 것이다. 분명 이 산은 수도를 하는 도인과 인연이 깊은 산일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두방산의 9부 능선에는 쌍 석굴이 있는데 한 곳은 맑은 물이 천정에서 떨어져 수정 같은 옹달샘을 이루고 있고, 한 곳은 수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굴이 되어 있다. 그리고 예부터 이곳 물을 마시면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최(崔)도사는 이곳에서 수도하기 전 일찍이 두원면 금성(金城)마을01 류(柳)훈장 집의 대소사를 도맡아 왔는데 류(柳)훈장이 일을 시키면 항시 술 취한 사람과 같이 행동을 하는 것 같으나 모든 일처리에는 한 치의 빈틈이 없이 처리하며 또 언사(言辭)도 매우 거칠었으나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이 뛰어나 류(柳)훈장은 마음속으로 늘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풍헌(崔風憲) 도사는 말없이 훌쩍 훈장 댁을 떠나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두방산의 한 동굴에서 수도에 정진하여 득도하였다고 한다. 구전설화에 따르면 이때가 조선 중종(中宗) 말엽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동굴을 구절암 혹은 귀절암이라고 불렀다 한다. 또한 그는 석굴 옆에다 해조암(海眺岩)이라는 암자를 지어 놓았는데, 항간에는 최(崔)도사가 득도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수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암자 터에는 산죽만 무성하여 그 옛날 수도하였던 터는 찬바람만 쓸쓸하게 스쳐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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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崔)도사는 산 정상에 오르내리면서 동쪽을 보고 붉은 살기(殺氣)가 우리 동방을 뻗쳐 지른다고 하면서 큰 변란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다. 그러면서 하루는 류(柳)훈장 댁을 찾아가 세상 이야기를 나눈 뒤, 큰 국난이 일어나 이 강토가 피로 물들 것임을 언질해 주었다. 또 류(柳)훈장에게 전란(戰亂)이 일어나면 내가 수도하던 지리산(地理山)으로 피하라고 하면서 그 자리를 훌쩍 떠났다고 한다. 역시나 최(崔)도사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선조(宣祖) 25년(1592) 4월 14일 임진란(壬辰亂)이 발발하고 부산진과 동래성이 하루 사이 왜적에게 함몰당했다. 왜군들은 노도(怒濤)와 같이 한양(漢陽)을 침입하니 선조는 황급히 한양 궁궐을 비우고 평양(平壤)으로 파천(播遷)하였으나, 전력(戰力)의 열세(劣勢)로 인해 결국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옛 지명)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전국이 왜병의 발에 짓밟히고 강토가 초토화되자 붓을 잡고 있던 선비, 수도를 하고 있던 스님들은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고 심지어 부녀자까지도 나라를 위해 일어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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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풍헌 도사도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평양까지 달려가 선조를 알현하고 자기에게 나라의 병권을 맡겨준다면 3일 이내에 난(亂)을 평정할 수 있다고 진언하였지만 왕을 모시고 있던 좌우의 대신들은 하찮은 일개 민부가 헛소리 한다고 일언거절하며 한 사람도 귀를 기울여 들어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최(崔)도사는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뒤돌아와 쓸쓸히 금강산에서 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 현 고흥군 옛 지명 찾기 전문위원, 국사편찬위원회 광주전남 고흥군 사료조사위원, 고흥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01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용반리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초엽에 고흥 류(柳)씨와 여산 송(宋)씨가 정착하여 형성한 부락이다.

 

 

<대순회보 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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