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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편답(遍踏)함이 일생의 소계(素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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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승훈 작성일2018.01.08 조회2,0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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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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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호인 금강호가 장전항으로 첫 출항을 떠났을 때 눈물을 흘리는 이산가족들이 많았다. 북에 고향을 두고 남으로 내려온 이산 가족들에게 금강산 관광은 꿈에나 그리던 일이었다. 그들에게 금강산 관광은 단지 여행 상품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통일을 상징하는 획기적 사건으로 생각되었다. 2005년 6월에 이르면 금강산 관광객은 100만을 돌파하여 시민들에게 대중적인 여행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연로한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관광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허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인하여 금강산 관광은 다시 가물거리는 아지랑이와 같은 희망사항이 되었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에게 금강산 유람은 학수고대하는 일이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여행이었다. 조선 시대 금강산 유람은 여행 경로에 따라서 유람 일정이 차이가 있는데, 짧아도 30일 이상 소요되는 대장정이었다. 또한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라 노복과 말을 데리고 가야 하므로 그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금강산 유람기인 『동유기』를 지은 조선 후기의 학자 농암 김창협은 어렸을 때부터 금강산 유람 한번 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항상 그 뛰어난 경치를 동경하기만 했을 뿐 금강산을 하늘 위에 있는 별세계로 여겨 유람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부친과 형님이 영의정까지 지냈던, 당대 최고의 가문에서 자랐던 김창협이었지만 금강산 유람은 꿈에서나 해볼 수 있었던 별세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창협이 21살이 되자 드디어 금강산 유람을 떠나듯이 조선 후기에 명문가의 사대부들에게 금강산 유람은 한번쯤은 꼭 거쳐야 할 여행코스였다. 요컨대 사대부들에게 명산대천은 인격을 도야시키는 흠모의 대상이며, 산행은 수양의 길이었다. 『논어』에서도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유교적 산수관을 잘 보여준다. 즉, 좋은 물과 좋은 산을 찾는 사대부들의 노력은 지혜롭고 인자한 사람이 되기 위한 수행의 일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금강산 유람은 도덕과 수양의 목적만이 아니라 산을 찾아 즐기는 풍류이기도 하였다. 악공과 기생을 대동한 금강산 유람은 사대부들의 멋과 흥을 보여주었고, 아울러 백성들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귀족 풍류의 하나였다.
  조선후기에는 금강산을 찾아 즐기는 유산(遊山) 풍속이 시대 조류가 되면서 수많은 유산기가 배출되었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금강산 유람을 위하여 전대의 선배 유학자들이 쓴 가이드북을 읽거나 지참하였다. 고려 말 이곡의 『동유기』, 조선 중기 남효온의 『유금강산기』 등이 대표적 여행 지침서였다. 이러한 기행문의 독서 풍속은 요사이 해외 여행을 가려는 사람들이 사전에 여행 가이드북을 읽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대부들이 금강산을 다녀온 뒤에 적은 시와 문장이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화폭에 담긴 금강산 그림도 비례적으로 증가하였다. 잘 알려졌듯이 금강산을 그린 대표적 화가는 겸재 정선이다. 정선은 자주 내금강, 외금강을 드나들면서 산수의 형세를 파악하였고, 그가 금강산을 그리느라 쓴 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룰 정도라 했다. 「금강전도」와 『금강산 화첩』에 담긴 여러 그림들이 이러한 치열한 노력 속에서 태어난 대표작들이다. 금강산의 절경을 직접 찾아서 그리려는 조선 후기 화단의 열정은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낳게 되었다. 금강산은 중국화의 모방을 벗어던지고 조선적인 회화를 도모하는 실경 산수의 진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116_웹이미지_040.jpg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금강산 유람은 어떠하였을까? 이미 고려시대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인 이곡의 금강산 여행기 『동유기』가 대변하듯이, 조선 유학자의 금강산 여행은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다. 금강산 유람에 대한 열망은 현재의 한류 관광의 모태라 할 정도로 한반도를 넘어서는 국제적인 것이었다. 그 유명한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구경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미 고대 사회부터 금강산은 동아시아의 명산 중의 명산으로 추앙받았을 것으로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다.
  한편, 고대 사회부터 금강산은 종교의 성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유불선(儒佛仙)과 민간신앙을 가릴 것 없이 금강산은 모든 종교의 숭배지였다. 관광의 역사를 살펴보면, ‘관광’이란 수난과 고통 속에서도 깨달음을 찾는 종교 순례의 하나로 출발하였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출범하면서 대중적이고 편리한 관광이 창출된 것이지 과거의 유람은 고통을 이겨내는 종교적 행위였다. 금강산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민간신앙과 도교의 숭배지로서 이러한 발자취가 설화나 지명 속에서 수없이 남겨져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 설화’가 전래되는 상팔담을 비롯하여 외금강의 삼선암, 천선대, 오선암 등의 명칭은 금강산의 곳곳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도교적 믿음을 보여준다. 한편, 육당 최남선은 태고로부터 우리 민족의 고대 사상인 ‘산악 중심의 자연 숭배 사상’ 즉, 산신 신앙 아래에서 금강산은 최고의 신격으로 대접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는 금강산을 옛날에는 ‘ 산’이라고 하였는데, ‘’이란 우리 민족이 태양과 산악을 신성시했던 교의를 반영한다고 주장하였다.  
  선도 사상을 따라서 명산대천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에게도 금강산은 숭배의 대상이자 성지였다. 『삼국사기』에서는 ‘화랑은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금강산 유람은 진정한 화랑이 되기 위한 필수적 수련 코스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해금강의 삼일포에는 영랑·술랑·남석랑·안상랑이라는 신라의 네 화랑이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삼일포의 암벽에는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점차 불교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금강산에는 승려들의 출입들이 잦아지고 사찰과 암자들이 크게 늘면서 불교의 성지로 변모하였다. 금강산의 ‘금강’이란 명칭은 〈화엄경〉에서 따온 것이며,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도 비로자나불에서 온 불교적 이름이다. 하지만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풍악과 개골산이란 이름이 금강산보다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금강산의 별칭인 봉래산은 도교적 색채가 매우 짙은 이름이다.
  금강산이 종교적 성지요 최고의 명산이란 브랜드가 붙은 것은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산세와 신비스러운 자태 때문일 것이다. 금강산을 보면 조물주가 인위적으로 창조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삼라만상을 닮은 바위들이 빼곡히 있는 만물초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기암절벽과 계곡, 폭포와 연못 등 산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콘텐츠들이 절묘한 형태로 집약되어 있다. 도저히 융기와 침식, 그리고 풍화 등 물리적인 지각 변동에 의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신묘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최남선이 금강산의 경관에 붙인 “신묘하고 황홀하여 형언할 수도, 헤아릴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경계”라는 표현은 그 어떤 인간적 수식어도 금강산에는 마땅하지 않음을 절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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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선조들은 금강산의 미학을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금강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뻗은 능선 상의 안무재를 기준으로 서쪽을 내금강, 동쪽을 외금강이라 불렀다. 해금강은 금강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서 바닷가의 기암절벽으로 솟아난 절경이다. 내금강에는 비로봉을 비롯하여 영랑봉, 장군봉, 지방봉 등의 준봉들과 만폭동, 영원동, 백천동과 같은 골짜기,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보덕굴 등의 사찰이 있었다. 외금강에는 대표적인 만물초를 비롯하여 채하봉, 옥녀봉, 집선봉 등의 준봉과 구룡폭, 상팔담, 유점사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인들이 외금강의 일부를 자신이 발견한 듯 ‘신금강’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불필요한 구분이다.
  재미있는 점은 내금강과 외금강이 마치 조물주가 작정으로 만든 듯이 도드라진 차이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1671년 안문재에 오른 김창협은 “내금강은 돌이 많고 흙이 적은 반면, 외금강은 흙이 많고 돌이 적다. 또한 내금강은 아름답고 외금강은 힘차고 웅대하다.”고 하였으며, 1921년 금강산에 올랐던 춘원 이광수는 “만폭동은 미인 같지만 구룡연 계곡은 용감한 장부 같다.”고 하면서 내금강과 외금강의 절경을 상징적으로 비교하였다. 금강산의 유람코스도 내금강 혹은 외금강을 먼저 찾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졌다.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철원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노정이 있는 반면, 북쪽의 철령에서 내려와 온정리를 거쳐 외금강으로 들어가는 길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금강산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금강산 유람은 근대식 관광의 하나로 재편되었다. 일제는 금강산을 억압된 식민지의 상황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고자 하였다. 경원선 철도와 금강산 전철, 호텔과 여관 등 근대식 편의 시설이 금강산에 들어서면서 한해 1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금강산을 찾을 정도로 급증하였다. 이러한 근대식 금강산 관광은 대중화의 길을 열었지만 점차 관광의 세속적·일탈적 경향을 부채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강산 역사의 최대 오욕은 역시 분단과 한국전쟁이었다. 분단으로 인하여 남한 사람들은 다시는 금강산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민족의 영산이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로 추락하면서 수없이 많은 절경과 문화유적들이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 등 세계적 문화유산들이 한순간에 재가 되었다. 임진왜란 시 금강산에서 승병장들이 출현하여 왜군을 물리쳤던 국난극복의 현장임을 상기해본다면, 동족상잔에 의한 금강산의 되돌릴 수 없는 파괴는 천만세의 후손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 필자소개
유승훈 : 경희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청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를 지냈고, 현재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역사 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민중 생활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 놀이의 문화사)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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