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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曲阜), 공자의 숨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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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윤 작성일2019.03.06 조회1,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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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김태윤

 


 

  10월 17일 오후 1시 공자와의 만남 첫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4명의 연구위원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3박 4일간의 답사일정에는 공자의 탄생지이자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곡부와 중국 5대 명산의 하나인 태산(泰山)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비행기로 청도(靑島)를 간 뒤, 제남(濟南)을 거쳐 곡부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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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부는 공자의 이름값으로 살아가고 있다.

 

 

곡부는 공자가 태어난 유가의 성지


  중국 산동성(山東省) 서부 사수(泗水)강 남쪽 기슭에 있는 곡부는 공자(B.C. 551~479)가 태어난 유교의 총 본산이다. 비록 지금은 이곳이 인구 10만의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춘추시대에는 노나라의 수도이자, 2,000여 년 넘게 유교의 성지로서 군림해왔다. 그러다가 문화혁명01 시기에는 곡부가 공자의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해서 도시 전체가 지도에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한편 인구의 40%가 공씨(孔氏)인 곡부는 도시전체가 공자의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공자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공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곡부를 성지(聖地)로 알고 찾아왔지만 공자를 상품화하여 이속을 챙기려는 상인들과 그들이 펼쳐놓은 상점들로 인해 성지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공자 상품관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듯했다. 공자의 엄숙한 자태가 새겨진 상품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특히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와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孔林)으로 가는 길목에는 상인들로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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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를 모신 대성전(大成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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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묘 내 비석에는 문화혁명의 상처가 남아 있다.

 

   공묘는 현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찬란한 유가의 문화유산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기네스북에도 기록되어 있다. 공자 사후 1년 뒤인 B.C. 478년에 노나라 애공(哀公)이 세웠다고 하니 그 역사가 거의 2,500년에 육박하고 있다.

  공묘(孔廟)는 공자의 뜻을 기리는 다양한 유적지가 있는 사당이다. 일행은 공묘라는 어감으로 공자의 묘소라고 생각했다가 한자를 보고서야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공자를 모신 대성전에 가기 전까지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각 문마다 공자를 칭송하는 표현과 그의 사상을 담고 있는 글귀가 있다. 제1문은 고대 중국인들이 학문의 수호성(守護星)으로 숭상했던 별의 이름을 따서 붙인 영성문(星門)이, 제2문은 성시문(聖時門)이 나타난다. 조금 더 걷다보면 제3문인 홍도문(弘道門)에 다다른다. 『論語』에 나타나는 ‘인능홍도 비도홍인(人能弘道 非道弘人)’구절에서 인용한 단어로 천지의 도를 인간만이 실현할 수 있다는 유학의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다음 청의 건륭제가 직접 편액한 제4문 대중문(大中門)을 지나면 제5문인 동문문(同文門)이 나타난다. 이때 가이드가 너무나 꼼꼼히 유적지를 담아 가려는 일행들에게 이제 반쯤 왔으니 어서 가자고 재촉한다. 얼마나 더 가야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 하기야 공자 같은 분을 만나러 가는데 멀리 있다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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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도문(弘道門). 유학이 펼치고자 하는 인도(人道)의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제6문인 규문각(奎文閣)으로 향했다. 이곳은 그 성격이 우리나라의 규장각(奎章閣)과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높이 23m에 달하는 3층 목조 누각으로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지어진 건물로도 유명하다. 황제가 하사한 서적이나 붓글씨를 보관한 도서관이었지만 1960년대의 문화혁명으로 건물만 남은 채 내용물은 전소되어 버렸다. 복록은 떨어지고 수명만 남은 듯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규문각을 뒤로 하고 가다 보면 13개의 정자가 느닷없이 나타난다. “역대 황실이 공묘를 방문할 때마다 비석을 세워 자신의 공덕을 남겼다고 합니다. 총 66개의 비석이 있는데 뭐 방명록인 셈이죠.”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보니 역대 황제들이 공자를 얼마나 숭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황제들은 자신들이 지닌 권력을 공자가 제시하는 치정자(治政者)의 도덕성에 부합시킴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공자의 영원성에 같이 머물고자 애쓰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런데 비석을 자세히 보면 금이 가 있던지 깨어진 것을 시멘트로 다시 이어 붙인 모습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02들의 분노가 남긴 상처였다. 공자의 사상이 주나라 구질서를 옹호했다고 해서 공(孔) 자가 들어간 비석은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물론 공자에 대한 평가가 다시 복원되면서 비석도 다시 복원되어졌지만, 한 무제 때 국가이념으로 받들어지던 공자의 이념이 도리어 국가이념에 반한다고 해서 내쳐졌던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다 보니 지금까지 지나온 문과는 달리 용이 여의주를 들고 약진하는 모습을 새긴 돌기둥 2개가 나타났다. 제7문인 대성문(大成門)부터는 이렇게 화려함을 띠며 공자에 대한 위대성을 한층 더 돋보여준다. 다음에 등장하는 행단(杏亶)은 공자가 거문고를 뜯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중국 최초의 사립학교였다. 공자가 여기서 최초의 교육 커리큘럼인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가르치고 후학 양성을 위한 플랜도 짜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공자는 당시 소수 귀족 계층들만 향유한 교육의 기회를 누구라도 접할 수 있게 해 준 교육가이자 개혁자였다. 공자를 빛낸 사람이 그의 제자 72현인이었으니 그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점에서 나타난다. 이런 생각을 하다 이윽고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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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최초의 사립교육기관, 행단(杏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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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전 내에 모셔진 공자(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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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벽(魯璧). 분서갱유 이후 사라진 유학의 책들이 여기서 발견되었다. 

 

  대성전은 중국의 황제가 거처했다는 태화전(太和展)과 그 크기가 거의 같다고 전해진다. 그 웅장함도 대단하거니와 그 화려함도 돋보인다. 그래도 고도 제한을 위해서 벽돌 2장 정도만 낮게 했다고 하니 외관상 거의 같다고 여겨질 만도 하다. 대성전 외부에서 받치고 있는 용모양의 기둥들은 역대 왕들의 기둥보다 더 화려해서 왕들이 올 때마다 붉은 천으로 가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그 천을 풀어 봤다가 못 본 것으로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자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대성전 안 화려한 단청 구조물에는 공자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는 표정으로 여행객을 따뜻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막상 공자의 외양을 보면서 웃음이 나와 무안하기까지 했다. 공자의 모습을 빠트리지 않고 마음속에 담고 싶은 욕심에 자세히 얼굴을 보다 보니 앞니 2개가 튀어 나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성스러움과 속된 감정이 순간 교차해 버렸다.


  대성전 뒤로 가다보면 유교의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아있는 분서갱유와 관련된 흔적이 나타난다. 바로 분서갱유 이후 사라진 유학의 책들이 발견된 노벽(魯璧)이다. 금문고문 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지만 사라진 책들을 다시 볼 수 있었던 중국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공묘 관람을 끝내고 다시 안쪽으로 미로 같은 길을 조금 가다보니 공부(孔府)에 도착했다.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공묘의 2/5를 차지하며 총 463간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 되면 조상 탓’이라는 한마디가 무심코 튀어나왔다.


공자의 묘소인 공림에 가다


  공묘에서 버스로 10여 분 거리를 가다보면 공자의 묘소가 있는 공림(孔林)에 도착한다. 공림은 지성림(至聖林)으로도 불리는데 입구의 새로 단장한 파란색 단청이 너무 강해 오히려 눈에 거슬려 보였다. 이런 것을 일컬어 용두사미라고나 할까? 들어가면서 그 관리의 소홀함에 실망감만 쌓여갔다. 오히려 공자를 브랜드화해서 나온 화려한 상품들만 줄을 서 있다. 현재 중국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경계를 오가고 있는 현실에 놓여있어 필수적으로 보존해야 할 유적들조차 볼거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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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를 상품화한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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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孔林). 지성묘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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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은 공씨 가족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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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묘소

 

  공림은 또한 공씨 집안의 가족묘이기도 하다. 가이드의 말을 빌자면 국적에 관계없이 공씨들은 누구라도 사후 여기서 공짜로 묻힐 수 있는 ‘특혜’가 있다고 하니 죽어서까지 공자의 도움을 받는가 보다. 공자의 ‘빽’이 대단하기만 하다. 5.6km 둘레와, 200만㎡의 면적을 자랑하는 이곳에는 3,600여 개의 석비와 10만 그루의 나무 사이사이 군데군데 올라온 무덤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묘와 달리 별다른 유적지가 없어 공자의 무덤에만 마음이 갔다. 


  그래서일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2,000여 년 동안 잠들고 있는 공자의 묘소에 도착했을 때 외형상 너무 초라하고 관리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공묘의 위용에 비해 잡초에 뒤덮혀 초라하기 그지없는 공자의 묘소! 그래서인지 공림에서 제일 큰 언덕 같은 이미지만 풍겼다. 그냥 방치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단지 비석에는 ‘대성지성선왕묘(大成至聖王墓)’라고 왕의 칭호만 무색하게 나타나 있으니…, 무덤 왼쪽에는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 B.C. 520? ~ B.C. 456?]03이 공자 사후 6년간 묘를 지키던 움막을 기념해 지은 집이 있고 오른쪽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B.C. 483? ~ B.C. 402?]04의 무덤이 있다. 초라함은 자사의 무덤도 피해갈 수 없었다. 답사 두 번째 날의 마지막 일정인 공자 묘소에서 보았던 잡초가 척박한 땅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공자의 환영과 겹쳐져 뇌리에 남아 있었다.

 
봉선제가 행해진 6,666계단의 태산


  태산은 공림에서 버스로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태안(泰安)에 있다. 이제까지 정적(靜的)인 평면답사가 3일째에는 태산(泰山) 등반으로 입체답사로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다. 태산 정상까지 6,666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산에 올라가야 하는데 모두 걱정이 태산인 듯한 표정에 웃음이 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답사 시간 일정상 어쩔 수 없이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로, 내려갈 때는 걸어서 가기로 변경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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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에서 바라본 태산의 6,666계단

 

  태산은 중국인들이 5대 명산으로 자랑하는 오악(五嶽) 중 동쪽에 있는 큰 산으로 동악(東嶽)으로 불린다. 특히 이곳은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봉선제(封禪祭)05가 행해진 유일한 산이었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봉선의식을 했던 군주는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는 치적을 가진 그로서는 당연했을 것이다. 뚜렷한 업적을 남긴 황제만 이 의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무제, 당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현종 등 72명만 그 이름이 남아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태산에 한 번 오르면 지상에서 10년을 더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생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다. 중국인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오르고 싶은 곳 태산. 내 앞에 정말 가깝고도 먼 곳에 있다. 입구에 있는 12개의 용들이 새겨진 기둥들은 태산으로 올라가려는 모습으로 태산의 위용만큼 웅장하게 포진되어 여행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일행은 계획대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버스로 이동했다. 창밖으로 중간 중간 인적이 보이는 것은 청소부들뿐이다. 오히려 신선 같은 풍모로 느긋하게 태산으로 오르는 모습을 보니 ‘뭘 그렇게 급하게 오르려는 게요.’라고 내 마음을 비웃기나 하듯 중국인 특유의 덤덤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이윽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내린 곳이 ‘중천문(中天門)’이다. 순간 ‘이제 중천에 도착했구나.’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블카의 목적지인 남천문(南天門)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2분, 태산에서 여러 하늘을 가본다는 만감이 교차했다. 남천문은 태산 아래에서 시작된 계단의 종착지이다. 오르고 내려가는 길목에서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의 표정들이 엿보인다. 걸어서 30분 정도 올라가니 마침내 정상인 옥황봉(玉皇峰)에 도달했다. 순간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시조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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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천문(南天門). 이곳이 계단의 종착지이다.

    2 태산 정상에는 생뚱맞게도 호텔이 서 있다. 

    3 열쇠가 보여주는 잠금의 속성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속을 기원하게 해 준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아니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 끝부분의 내용이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올라온 나를 가르키는 것 같아 순간 자격지심이 느껴졌다. 그래도 애써 어쩔 수 없었다고 서둘러 합리화시켜 버리고 정상으로 올라가 천하를 내려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주위 여행객들의 소리와 정상까지 이어진 잡상인들로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정상에는 호텔까지 서 있어 태산이 주는 신비감이 싹 가셔버렸다. 중국이 자본주의라는 옷을 엉성하게 입고 있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옥황봉 정상에는 옥황정이 있는데 왼쪽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 관음전(觀音展), 오른쪽에는 관우가 모셔져 있는 재신전(財神展)이 있다. 마당 뜰에는 열쇠꾸러미들이 빽빽하게 걸려있는데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신의 사랑을 맺기 위해서란다. 좁은 장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준비한 ‘막대기 향’을 피우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태산 정상에서의 소란스러운 관람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남천문에 다시 일행이 모였다. 계단의 모습이 철로와도 같이 펼쳐지다 거의 지평선에서 한 점으로 모인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1시간 반 정도 걸려 내려오다 보니 ‘이렇게 해서 10년을 더 살 수 있겠는가?’라는 농이 섞인 말이 무심코 튀어 나왔다. 오히려 큰 뜻을 품고 내려왔으니 양보다 질이라는 답으로 애써 자조했다.

 


  이번 답사를 통해 만난 큰 봉우리 둘! 공자와 태산.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그 여운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본 뒤 남는 감동이라고나 할까?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자신이 공자와 태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는 화두가 뒤늦은 감은 있었지만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01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시행된 극좌 사회주의운동을 말한다. 마오쩌둥은 이 운동을 통해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구시대의 모순을 타파하여 사회개혁을 취하고자 했다. 그 구시대의 모순에 공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02 1960년대 중국공산당 청년운동에 가담한 학생조직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고자 투쟁해 문화대혁명의 한 추진력이 되었다.
03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으로 언어에 뛰어났으며,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宰相)을 지냈다.
04 중국 전국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로 공자의 손자이다. 이름은 급(伋)으로 증자의 제자이며 맹자의 스승이다. 저서에 『중용』이 있다. 
05 시황은 천하통일 전인 본국 진(秦)나라의 옹현이란 산에서 지내던 천신제(天神祭) 의식을 따라 태산에 올라 천신에 대한 제사인 봉(封) 제사를 지낸 다음 그 남쪽 양보산(梁父山)이란 곳에서 지신(地神)에 대한 제사인 선제(禪祭)를 지냈다. 이처럼 봉선제는 천자가 천하를 통치하는 운명과 명령을 천신과 지신 모두에게서 아울러 받았음을 선포하는 최대의 제사의례였다. (2003년 10월 16일 연합뉴스 생활/문화일반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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