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동학농민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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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17 조회6,020회 댓글0건본문
상제님께서 24세 되시던 1894[甲午]년은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01이 일어난 해이다.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큰 규모의 농민 항쟁이었던 동학농민운동은 1년 이상 지속되면서 수십 만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만, 역사에 커다란 멍을 남긴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고 갖가지의 재화(災禍)가 일어나 세상이 참혹하게 된 원인은 상극으로 인해 발생한 원(冤)이 천지에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청난 원(冤)을 야기하는 사건이 상제님 재세시에 또다시 터지고야 말았으니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최근 많은 독자들이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는 요청도 있고 해서, 이번 호와 다음 호에 걸쳐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버린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직접 현장에서 이 사건을 지켜보셨던 상제님의 애끓었던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민란(民亂)의 시대 19세기와 동학의 출현
19세기에 접어든 조선사회는 세도정치로 인해 탐관오리의 행패,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다다라 전국적으로 민란(民亂)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여기에서 삼정(三政)이란 토지세와 군역(군포)의 부과, 양곡의 대여와 환수를 말한다.
세금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서 부과되는 토지세인데, 원래 이 세금은 토지 소유자인 지주들이 내야 되는 세금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 지주들은 땅 없는 소작인들이 소작료와 함께 이 토지세까지 내도록 강요하고 있어서 땅 없는 일반 농민들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다.
토지세 다음으로 큰 세금으로는 병역을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내는 세금인 군포(軍布)가 있었는데, 이것은 1년에 평민 어른 1명당 포 1필을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숫자와는 관계없이 군현 단위로 내야 할 군포량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선후기로 가서 평민들이 돈을 주고 양반 신분을 사서 신분상승을 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평민 어른들의 수는 계속 줄었고, 게다가 관아의 서리들도 돈을 받고 장부상으로 양반으로 허위 기재해주는 일이 많아서 결국 힘없는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군포의 부담은 1년에 1필이 아니라 그보다 몇 배나 더 되는 것이었다.
또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청에서는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양곡을 대여해주고 추수기에 이자와 함께 양곡을 걷어 들이는 환곡(還穀)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강제로 보유 환곡미를 대여해 주고는 이자를 받아 자신들이 챙겼다. 여기에 장부상으로 결손이라고 해놓고는 이 결손을 메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마을 단위로 결손액을 분담시켜 내도록 만들었다.
이 세 가지 즉 토지세, 군포, 환곡을 삼정이라 하고, 이것을 전부 합해 돈으로 환산해서 총액을 산정하여 매년 초 각 군이 부담해야 할 총 세액을 정하여 각 호별로 분담액을 정하였다. 이때 수령 및 서리들의 횡령액이나 장부상 결손액이 모두 총액 속에 끼어드니 농민들이 부담해야 할 호당 부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은 큰 고통에 빠져있었고,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져 허덕이고 있던 무렵, 상제님으로부터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 받은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의 가르침을 펴게 되었다.02 최제우는 포교를 개시한지 불과 3년 만(1861.6~1864.1)에 사도난정(邪道亂政)03의 죄목으로 처형을 당했지만, 후천이라는 신세계를 비전으로 제시하는 동학의 가르침은 힘없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고단한 삶을 살던 많은 민초들은 변화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앞 다투어 동학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갈구보다는 사회적·정치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탈출구로 동학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동학의 진정한 진리를 문답하러 들어오는 자가 적음을 탄식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04
교조신원운동(敎祖伸運動)
동학을 따르는 사람은 늘었으나 관에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에 1892년 10월과 11월, 동학의 지도자인 서장옥(徐璋玉 혹은 徐長玉, ?~1900)과 서병학(徐丙鶴, ?~?)은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의 포교를 인정해 주고 억울하게 죽은 교조(敎祖)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신원(伸冤)05 운동을 벌이는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들의 요구에는 이런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지방관들의 부당한 수탈도 막아 줄 것과 서양과 일본 상인들을 물리쳐 달라는 것까지 포함하는 사회·정치적인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충청감사 조병식과 전라감사 이경직은 동학도들에게 지방관들의 부당한 수탈행위를 단속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의 공인문제는 중앙조정의 권한이므로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다음 해인 1893년 2월, 40여 명의 동학 지도자들은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 앞에 엎드려 교조신원과 동학을 공인해 줄 것을 요구하며 3일 밤낮을 호소하였다.(이를 광화문 복소(伏訴)사건이라 부른다) 또한 동학도들은 외국인들을 배척하는 내용을 담은 ‘척왜양(斥倭洋) 괘서(掛書)06’들을 교회와 외국 공사관, 외국인들의 집 등에 붙였고, 이로 인해 서울 시내는 온통 공포 분위기가 조장되었다.(이를 괘서사건이라 부른다)07
그러자 조정은 동학 지도자들을 체포·탄압하였고, 이를 본 최시형은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기별하여 1893년 3월 10일 동학본부가 있던 보은에 모두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2만 7천여 명에 육박하는 동학도들은 보은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 동학도들은 한 달 가량 보은에 머물면서 외국세력을 몰아내자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깃발을 내걸었고, 이로써 자신들의 운동 성격이 종교적인 신원운동을 넘어서 반외세라는 정치적인 것임을 분명히 했다.
최시형은 교조신원운동이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결국 최시형은 집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다는 정부의 회유책을 받아들여 자신들은 북접(北接)08이니 남접(南接)과는 입장이 다르다고 하면서 대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이로써 보은집회는 맥없이 흩어지고 말았고, 2년간에 걸친 동학의 교조 신원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의 세력이 만만찮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기댈 곳이 없던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으로 동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조병갑의 학정과 고부농민의 봉기
지금은 작은 마을이지만, 19세기 후반 전라도 고부는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넓은 평야와 28개의 주변 촌락을 거느린 가장 번성한 고을이었다.09 1892년 5월, 이곳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하자 고부 지역 사람들은 엄청난 수탈을 당해야 했다. 특히 조병갑은 고부의 만석보 밑에 쓸모없는 보를 쌓아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자신의 아버지 공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강취하였다. 참다 못한 고부 사람들은 그 지역의 동학 접주인 전봉준을 내세워 조병갑에게 찾아가 여러 번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무리로 몰려 갇히거나 쫓겨나고 말았다.
1893년 11월이 되자 전봉준 등 고부 농민 20여 명이 죽산(竹山)마을10에 모여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대한 대응책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조병갑을 죽인 뒤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고 서울로 밀고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봉기에 필요한 준비를 하며 거사 날짜를 잡으려던 상황에서, 갑자기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을 발령 받았다. 따라서 봉기 계획은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조병갑은 아직 수탈할 것이 많던 고부를 떠나고 싶지 않아 뒷돈을 쓰고는 그냥 고부 군수로 눌러앉아 버렸다. 고부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백성들이 받아야 할 고통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배들평[이평] 말목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 조병갑의 비리를 밝히고 봉기를 일으킬 것을 역설하였다. 이곳은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손바래기 마을11에서 북쪽으로 불과 약 10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다.
▲ 동학농민운동의 최초 집결 장소인 말목장터. 당시 말목장터는 전라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큰 농산물 거래시장이 서는 곳이었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소재. 전북 기념물 제110호.
▲ 고부관아 터. 관아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향교이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160번지 소재.
1천여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의 인솔 하에 고부관아로 밀려갔다. 놀란 조병갑은 도망가 버렸고, 관아를 접수한 농민군들은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의 양곡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파면시키고 용암 현감이었던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발령하였다. 박원명이 고부로 와서 “모든 것이 조병갑의 잘못이었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을 시정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인근 백산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전봉준 이하 농민군들은 신임 고부군수를 믿고 해산하였다.
이용태의 탄압과 제1차 동학농민운동
박원명에 뒤이어 조정에서는 고부농민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12로 장흥 부사 이용태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800여 명의 역졸들을 데리고 온 이용태는 고부 농민 봉기의 주모자들을 역적으로 몰고는 농민들을 잡아 가두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며, 살인과 방화를 서슴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봉준은 이용태의 탄압을 피해 고부 인근의 무장으로 피신하였다가, 그곳에서 최경선(崔景善, 1859~1895)과 함께 무장의 동학 접주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을 설득하여 1894년 3월 21일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태인 접주 김개남(金開男, 1853~1895)과 금구(원평) 접주 김덕명(金德明, 1845~1895), 차치구(車致九)13등 전라도의 주요 동학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세력이 엄청난 규모로 발전하게 되니, 이를 제1차 동학농민운동이라 부른다.
▲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들. 좌측부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농민군들은 3월 23일 고부를 다시 점령하고 3월 25일에는 본진을 백산으로 옮겼다. 조정에서는 1,300명의 토벌대를 조직하여 급히 고부로 내려 보냈으나, 4월 7일 농민군들은 황토재에서 관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4월 18일 전라감사 김문현이 파면되고, 뒤이어 4월 23일에는 전라병사였다가 농민군 토벌을 위해 양호초토사로 임명된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京軍: 중앙의 군대) 800명이 내려왔으나 이마저 장성 황룡촌에서 동학군들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4월 27일, 드디어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들은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성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다.
파죽지세인 동학군들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홍계훈은 조정에 청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는 1892년 임오군란과 1894년 갑신정변 때에도 청국군을 불러 온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을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에게는 결정적 호기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와 서로 통보가 없이는 조선에 군사를 파병하지 않겠다는 텐진협정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조선을 장악하려는 야욕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5월 5일 910명의 청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그 다음 날인 5월 6일, 3척의 일본 군함이 인천항으로 들어오고 420명의 일본군이 서울로 진입했다. 뒤이어 5월 7일, 6천여 명의 일본군이 인천으로, 1,500명의 청국군이 아산으로 더 들어오니, 삽시간에 삼천리는 전쟁터가 될 위기에 처했다.
심상치 않은 상황 전개에 놀란 조정은 급히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전봉준과 화해를 하도록 요청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전봉준도 5월 7일, 조정이 27개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맺고는 동학군들을 서둘러 해산시켰다. 이 개혁안은 오늘날 14개의 사항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대략적 내용은 탐관오리들을 몰아내며 정치를 개혁하고 신분차별을 없애면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동학도들의 집강소(執綱所) 통치
동학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난리 직후였던 전라도 지역은 정치·행정이 마비상태였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을 초청하여 이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고, 전봉준의 주장대로 전라도의 각 군현에 농민들이 운영하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정치·행정을 담당하면서 각종 폐정을 개혁할 것이 합의되었다. 이로써 전라도의 거의 모든 지역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농민군들의 세상이 되었다.14 전라도에서 시행되는 모든 공문서조차 김학진의 이름으로 발행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모두 전봉준의 재가를 거친 것들이었다.
전라도가 동학도들의 세상이 되자, 너도나도 동학에 앞 다투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 상제님께서는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달은 어둡고 기러기는 높이 나는데) 선우야둔도(單于夜遁逃: 오랑캐의 왕이 밤에 달아나네) 욕장경기축(欲將輕騎逐: 가벼운 기병으로 쫓으려 하는데) 대설만궁도(大雪滿弓刀: 큰 눈이 활과 칼에 가득 쌓이네)’15라는 글을 외워 주시며, 동학이 눈이 내리는 겨울에 패망할 것이니 동학에 들지 말 것을 사람들에게 권유하셨다. 당시 분위기로서는 상제님의 이러한 말씀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 와중에도 상제님의 예지를 믿은 몇몇 지혜로운 사람들은 몇 달 뒤에 벌어질 참극에서 살아남게 된다.16
01 1990년 6월에 대규모의 학술 토론회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1894[甲午]년 전라도에서 봉기한 사건에 대한 호칭은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동학란,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등 여러 이름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동학농민운동’으로 서술하기로 한다.
02 자세한 것은 『대순회보』 70호에 실린 「상제님께서 최제우에게 천지대도를 내리시다」(pp.10∼15)를 참고 바람.
03 사학(邪學)으로 정도(正道)를 어지럽힘. 당시 유학자들은 이단 혹은 사학(邪學)을 좌도(左道)라고 불렀다.
0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전북』, 도서출판 돌베게, 2000, p.207 참고.
05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
06 작성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여 놓은 글.
07 박맹수, 「동학농민혁명과 북접일기」, 『북접일기』, 태안군, 2006, p.199
08 동학에서는 포교소(布敎所)를 ‘접(接)’이라 하고 이곳을 감독하는 책임자를 ‘접주(接主)’라고 부른다. 북접(北接)과 남접(南接)이라는 말은 동학농민운동 때 최시형과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지역인 충청도에 있는 동학 조직을 북접, 전봉준 등이 주도하는 지역인 전라도에 있는 동학 조직을 남접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09 각주 4의 책, p.210
10 원래는 죽산(竹山)마을이었으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농민 봉기가 시작된 이 마을의 정기를 끊겠다는 의도로 배처럼 떠돌아다니라는 의미인 ‘주산(舟山)’마을로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현재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로서, 아직까지 마을의 이름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11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 신송(新松)마을.
12 조선 후기 민란이 급증하자 조정에서는 민란이 발생한 지역에 안핵사(按使)를 파견하였다. 안핵사의 임무는 민란이 발발한 원인 등을 파악한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의 지시에 따라 민란 발생 원인을 없애는 것이었다.
13 훗날 상제님의 종도가 되는 차경석의 부친이다. 『대순회보』 68호, pp.19~20 참고.
14 전라도의 각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으나, 나주와 남원, 운봉 등은 집강소 설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김개남은 무력으로 남원을 점령하였으나 최경선의 나주 공격은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나주에는 끝내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았다.
15 행록 1장 23절. 상제님께서 읊어주신 시는 당나라 노륜(盧綸: ?~798)이 지은 전 4수의 「새하곡(塞下曲)」 중에서 3번째 시이다.
16 「동학군의 운명」, 『대순소식』 제1호, 2003, p.6 참고.
<대순회보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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