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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상제님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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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23 조회7,0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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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불과 110여 년 전, 조선뿐 아니라 천하에 큰 난까지 동하게 만들었던 동학농민운동! 이 운동의 목적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이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전봉준과 같이 그렇게 애쓴 사람도 있었으나 이 운동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려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보국안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봉준 
  상제님께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으니 결국 이는 후천의 일을 말한 것”01이라고 하시며, “전봉준이 순창 농암에 묻혀있는 큰 기운을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동학이 성공하지 못하였다.”02고 일러주셨다. 즉 동학농민운동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을 이루고자 일어난 운동이었고, 이는 후천의 이상을 말함이니 그 뜻은 옳은 것이었으나 전봉준이 큰 기운을 쓸 수 없어 결국 실패하였다고 하신 듯하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전봉준을 결코 낮게 평가하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백의 한사로 일어나 천하를 움직인 만고의 명장(名將)이 바로 전봉준’03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전봉준을 높이 평가하신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명숙(전봉준을 말함)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 (교법 1장 2절)  


  상제님의 이런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전봉준은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니라 억압받던 천인들을 위해 살다 간 사람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사로잡힌 전봉준이 심문받는 과정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악하고 간사한 관리를 쫓아버려 임금의 곁을 깨끗이 한 후, 몇 사람의 명망있는 선비들을 옹립해서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 동학군들은 바로 시골로 돌아가 농사에 종사할 생각이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난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오명을 덮어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그는 죽음 직전에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千古)에 유감이다.”라는 말과 함께 다음의 시(詩)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 와서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으나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면 영웅도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도다.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잘못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아는 이 어디 있을까 

  
  이런 전봉준이었기에 상제님께서는 사명기(司命旗)를 세워주심으로써 원(冤)도 풀어주시고04, 조선의 명부를 관장하는 직책까지도 내려주셨던 것이다.05  


왕후장상을 꿈꾸다 - 도솔암 마애불 사건 
  한편 상제님께서는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06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공사 2장 19절)고 하시며, 이들의 해원을 위한 공사07도 보신 적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보국안민’이라는 기치 아래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지 않은 숫자가 속마음으로는 제각각 저마다의 욕심 즉 왕후장상을 꿈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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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런 정황을 확인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최고 지도자는 총대장 전봉준을 비롯하여 2명의 총관령 손화중(孫華仲, 1861~1895)과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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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손화중은 22세의 나이에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갔다가 동학에 입교하였고, 전북 무장(茂長)에서 동학의 포교에 힘써 제법 많은 신도를 모은 인물이었다. 당시 그 주변 일대에는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마애불에 얽힌 참언(讖言)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마애불의 형상이 검단대사(黔丹大師)08의 모습이며, 그 석불 명치 부분의 감실(龕室: 성스러운 물건을 넣어둔 곳)에 검단대사가 감춘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고, 오직 새 세상의 주인이 아니면 아무도 이 비결을 열어볼 수 없으며, 이 비결이 나오면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의 나라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옛날 전라감사였던 이서구(李書九, 1754~1825)도 이 비결을 꺼내려고 하다가 뇌성벽력이 일어나 비결을 다 보지 못하고 다만 ‘李書九 開坼(이서구가 꺼내 열어본다)’이라는 글자만 확인하고 다시 넣어두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참언은 더욱 신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2년, 손화중과 그 수하들은 한밤중에 선운사를 습격하여 수십 명의 중들을 포박하여 놓고 마애불의 명치에 있는 감실을 도끼로 부순 뒤 비결서를 꺼내 훔쳐가 버렸다. 날이 밝자 중들은 이 사실을 즉시 관아에 고발하였다. 수백 명의 동학신도들이 잡혀 취초를 당하고 그중 3명은 역적죄로 사형까지 당하였으나 손화중을 비롯한 간부급들은 모두 도망하여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 마애불 감실에서 꺼냈다는 비결서는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11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 비결을 직접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비결서가 과연 진짜였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인데, 일설에는 그 비결서가 정약용의 『목민심서』였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손화중이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감실에서 비결서를 꺼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 당시 그 일대에는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당연히 부패한 조선왕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주인은 손화중일 것이라는 믿음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손화중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비결서 사건 후 2년 뒤 손화중은 동학농민운동에서 대표 지도자로 활약하는데, 그때의 손화중의 행동을 분석해보면 그 자신이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고자 노력했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손화중 본인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가 수립되는데 참여함으로써, 개국공신으로 높은 작위를 받으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조선(南朝鮮)의 왕을 꿈꾼 인물, 김개남

  동학의 또 다른 핵심 지도자인 김개남은 본인 스스로가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분명히 드러냈던 인물이었다. 원래 김개남의 본명은 김영주(金永疇)였으며,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하여 활동을 벌일 때 김기범(金箕範)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동학농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부터 김개남(金開南)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손바닥에 ‘開南’ 두 글자를 써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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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남(開南)’이란 ‘남조선(南朝鮮)을 연다’는 뜻으로 ‘남조선’이란 당시 조선 후기에 널리 퍼진 민간신앙으로 이상세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부터 백성들은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환(外患)을 겪고 안으로는 관리들의 학정(虐政)에 따른 내우(內憂)에 끊임없이 시달렸으며,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지극히 복된 낙원세계에 살기를 갈망하여 왔다. 이로 인해 ‘진인(眞人)이 나타나 고통 받는 민중을 이상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민간신앙이 생겨났는데, 그 이상세계라는 것이 곧 ‘남조선(南朝鮮)’이었다. 따라서 김개남이 스스로의 이름을 김개남으로 바꾼 것은 자신이 바로 남조선, 즉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인공임을 내세우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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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이암. 김개남이 하늘에 기도를 한 곳이다. 상이암은 동학농민운동 때 불태워졌고09 현재의 암자는 1958년 복원된 것이다. 전북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 86번지 소재.

  
  그러나 김개남에게 있어서 남조선은 백성들이 꿈꿔왔던 이상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원한이 많은 계층인 백정, 중, 노비들을 끌어 모은 뒤 양반들을 찾아다니며 재물을 빼앗고 매를 때렸으며 심지어는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부대가 지나간 곳에는 눈물과 한숨, 그리고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그가 보여준 남조선은 불만 있는 사람들이 모여 처절한 복수를 감행하는 곳이었을 뿐이었다. 신라말기 전국이 혼란하던 무렵, 궁예(弓裔, ?~918)가 미륵이라 자칭하고 미륵세상을 연다하며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듯이, 김개남도 남조선을 여는 주인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로는 왕이 되려는 야욕에 불탔다.  
  1894년 5월, 1차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들과 조정 사이에 전주화약이 맺어진 직후부터 김개남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행보를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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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남의 부대가 주둔했던 남원 교룡산성

 

  전봉준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위해 개혁을 성사시키고자 노심초사 뛰어다닐 때, 김개남은 피로한 삶에 지친 백성들을 외면한 채 그의 수하들을 이끌고 전북 임실 성수산 기슭에 있는 상이암으로 들어갔다. 원래 이름이 도선암(道詵庵)이었던 이 암자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자 하늘에서 ‘장차 네가 왕이 되리라’는 소리가 들렸고, 이로 인해 암자의 이름이 ‘상이암(上耳庵)’으로 바뀌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김개남은 일정 기간 동안 기도를 한 뒤 자신이 세우고자 하는 나라인 ‘남조선(南朝鮮)’을 연상시키는 ‘남원(南原)’에 부대를 주둔시킨다. 이후로 그는 스스럼없이 ‘개남국왕(開南國王 : 남조선을 개국한 왕)’이라고 자칭하고 다녔으니, 실로 그는 보국안민이라는 기치 아래 내심으로는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고자 애쓴 인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강진 유생 박기현의 일기인 『일사(日史)』에 “김개남은 자신이 남원에서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선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나, 주한 일본공사였던 이노우에 카우로가 자국의 외무대신에게 보낸 서신에 “김개남 같은 자는 스스로를 개남국왕이라 칭하는 등 역성혁명에 목적을 갖고 있어…”라고 적은 것은 이런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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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대적하기 위해 어렵게 동학 남접과 북접의 연합군들이 결성되었고, 전봉준도 김개남에게 힘을 합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미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그에게 전봉준의 나라를 위한 마음은 전달될 수 없었다. 김개남은 전봉준의 요청을 모멸차게 거절하였는데, 그때 댄 핑계가 ‘남원에 군사를 주둔하고 49일을 지나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비결이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 남원에서 한참을 뭉기적거리던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전봉준이 목메어 기다리던 공주 우금치 전투 현장으로 가지 않고 청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를 해 버렸는데, 그 직후 김개남 부대와 힘을 합치지 못한 전봉준의 동학군 주력 부대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한 김개남 휘하의 동학군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가 버리고 만다. 
  결국 태인에서 관군에게 잡힌 김개남은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고 했다고 한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하루아침에 군사들을 모두 잃고 만 김개남, 그는 다른 동학군 지도자들처럼 서울까지 이송되지도 못한 채, 전주에서 양반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참수되고 만다. 이것은 평소 전봉준이 양반들을 말로써 잘 위무하고 사람들의 목숨을 아꼈으므로 인망을 받고 있었던 데 비해, 김개남은 양반들로부터 엄청난 원망을 받고 있었던 탓이었다. 
  왕을 꿈꾼 사람은 비단 김개남 혼자만이 아니었다. 다른 몇몇 동학군 지도자들도 ‘정씨왕조(鄭氏王朝)’를 상징하는 깃발을 내걸고 다녔다고 하니, 그 외에도 왕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기록된 『피난록(避亂錄)』에 “6조 장관과 방백수령을 미리 계산하여 우두머리들에게 나누어 정해주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대장, 판서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는 난역(亂逆)이 아닌가”라고 적혀있는 것은 이런 정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11

  상제님의 말씀과 같이 동학농민운동에는 보국안민이라는 깃발 아래 수만 명이 모였지만 보국안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도 있었고, 왕후장상을 꿈꾼 사람들도 있었다. 상제님의 말씀을 되새기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제 아무리 명분이 좋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실제 그 일을 하면서 속으로 품고 있는 뜻은 과연 무엇인가? 진정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챙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순회보>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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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공사 2장 19절.
02 공사 1장 27절.
03 교법 3장 30절, 공사 1장 34절. 전봉준이 천하를 움직인 것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대순소식』29호(2006), pp.9~10 참고할 것.

04『대순회보』80호(2008), p.17 참고.
05 공사 1장 7절.
06 제왕(帝王)과 제후(諸侯),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을 아울러 이르는 말.

07 이에 대한 내용은『대순회보』68호(2007), pp.24~25 참고.
08 검단대사는 백제 제27대 임금인 위덕왕(재위 554∼598) 시대의 인물로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아직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09 상이암이 불태워 진 것은 김개남에 대한 복수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평소 김개남은 양반들을 미워하여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죽이는 등 가혹하게 대했다. 그가 관군들에게 잡힌 후 양반들은 복수하기 위하여 그와 관련있는 모든 것을 불 지르고 파괴하였는데, 깊은 산속에 있던 상이암이었지만 김개남이 왕이 되고자 기도를 한 곳이어서 양반들의 손에 무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0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 김영사, 2003, pp.304~307참고.

11 각주 1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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