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도주님의 조부, 취당(聚堂) 조영규(趙瑩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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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2.11 조회5,385회 댓글0건본문
조부[휘 영규(諱 瑩奎)]는 배일(排日) 사상가로서 민영환(閔泳煥) 등과 교우하며 활약하시다가 을사조약에 분개(憤慨)하사 심화(心火)로 토혈 서거(吐血 逝去)하시고 부친[휘 용모(諱 鏞模)]은 조부의 유의(遺意)를 승봉(承奉)하여 그 아우[휘 용의(諱 鏞誼)ㆍ용서(鏞瑞) 2인]와 반일운동(反日運動)에 활약하시다.
1909년[기유년(己酉年), 15세 시(歲時)] 4월에 부조전래(父祖傳來)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으신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께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결정단계에 있음을 개탄(慨嘆)하시고 부친 숙부 등과 같이 만주(滿洲) 봉천지방(奉天地方)으로 망명(亡命)하시어 동지(同志)들과 구국운동(救國運動)에 활약하시다가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救國濟世)할 뜻을 정하시고 입산공부(入山工夫)를 하시다.01
『대순진리회요람』에 따르면, 도주님의 조부이신 취당 조영규께서는 배일(排日) 사상가로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토혈로 서거하셨으며 부친인 조용모는 조부의 뜻을 받들어 아우들과 함께 반일운동을 전개하셨다. 도주님께서는 조부님과 부친으로 전해진 배일사상을 품으시고 1909년 음력 4월 부친·숙부 등과 같이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시어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셨다. 이러한 내용에서 조부님의 배일사상과 토혈 서거가 도주님 가문의 반일운동 및 만주 봉천으로의 망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도주님 가문의 반일운동과 만주로의 망명에 주된 영향을 미친 조부님의 행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문중에서 발간한 글과 조선 시대 공문서 그리고 신문 등의 자료를 통해 조부님의 생애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조부님의 과거급제
취당의 본관인 함안(咸安) 조(趙)씨는 고려 말기부터 함안에 정착하여 대대로 살아온 유서 깊은 집안으로 9명의 과거 급제자와 13명의 충절 등의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이다.02 취당의 선조는 어계(漁溪) 조려(趙旅, 1420-1489), 참의공(叅議公) 조연(趙淵, 1489-1564), 두암공(斗巖公) 조방(趙垹, 1557-1638) 등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충절과 의리가 극진하였다.03 취당의 조부인 휘 화식(華植)은 순조 무진년인 1808년에 태어나 정사년(1857년)에 별세하였으며, 이후 고종 을사년(1905년)에 국가로부터 그 효행을 인정받아 정려(旌閭)를 받았다. 부(父)인 휘 성의(性義)는 순조 기축년(1829년)에 태어난 선비로 신미년(1871년)에 별세하였다.
취당께서는 자는 태견(泰見)이고 휘는 영규(瑩奎)로 철종 신유년(1861년) 함안군 회문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인근에 명성이 높으셨다고 한다. 취당의 「묘갈명(墓碣銘)」과 회문리에 세워진 「유허비명(遺墟碑銘)」에는 취당의 젊은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철종 신유년에 공이 회문리 집에서 나시니 슬기롭고 민첩함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독서함에 바로 문리에 통하고 경의를 연구하고 문장을 잘 짓고 글씨 또한 잘 쓰시니 나이 이십에 명예가 자못 높았고…04
공은 철종 신유(1861)에 나서 어렸을 때부터 이미 총명 재질이 뛰어나 옛글을 읽으면 문득 문리가 통달하여 경의(經義)에 밝고 문장에 능하고 글씨 또한 아름다워 묘령(妙齡)에 성예가 자못 높았다.…05
즉 취당께서는 어릴 때부터 슬기롭고 총명하여 문리에 통달하셨다고 한다. 또한 문장에 능하고 글씨 또한 뛰어나 20세 때에 널리 명망을 얻으셨다. 취당께서는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에 힘쓰시다가, 고종 신묘년 (1891년)에 3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셨다. 조선시대의 문과 급제자를 연대순, 시험종별 그리고 성적순으로 수록한 책자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취당의 성함 또한 기재되어 있다.06 취당께서 합격한 시험명은 ‘신묘28년친림경무대성수사순왕대비전보령망칠중궁전보령망오합3경경과정시별시문과방(辛卯二十八年親臨景武臺聖壽四旬王大妃殿寶齡望七中宮殿寶齡望五合三慶慶科庭試別試文科榜)’으로 정시(庭試)이며 음력 4월 2일에 실시되었다. 이 시험이 열린 이유는 고종이 나이 40세가 되고[聖壽四旬], 대왕대비의 나이가 망칠[王大妃殿寶齡望七] 즉 61세가 되며, 중궁전의 나이가 망오[中宮殿寶齡望五] 즉 41세가 되는 세 가지 경사[三慶]에 따라 시행된 것이다. 당시 고종은 친히 경무대(景武臺)에 왕림하여 정시(庭試)를 참관하였다. 이 시험에 문과 16명, 무과 506명이 합격하였으며 문과에서는 민두현(閔斗顯)이, 무과에서는 한규하(韓圭夏)가 장원급제하였다. 문과에서 병과(丙科) 9위로 합격하신 취당께서는 장원인 갑과(甲科) 1인과 을과(乙科) 2인을 고려하면 총 16명 중 12등을 하셨다.
조부님의 관직 활동
취당의 관직에 대해서 「묘갈명」에는 “통사랑(通仕郞) 지(知)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겸(兼) 지(知)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라고 되어 있으며, 「유허비명」에는 “통사랑(通仕郞)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제수(除授)되어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과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를 겸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즉 조부님의 품계는 정8품인 통사랑(通仕郎)이었으며, 홍문관 정자와 춘추관 기사관 그리고 승정원 주서를 제수받거나 겸직하셨던 것이다.
조선 시대 홍문관은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로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언론(言論) 삼사(三司)에 해당하였다. 조선의 정치체계 내에서 홍문관은 상소 등의 언론 활동을 통해 지대한 영향력을 차지하면서07 홍문관원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고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또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은 출세가 보장되었다. 따라서 젊은 관료들은 홍문관원이 되기를 선망하였으며 홍문관으로의 진출을 둘러싸고 격심한 경쟁이 따르기도 하였다.08 취당께서는 이 홍문관의 정9품직인 정자(正字)로서 국사에 참여하셨던 것이다.
취당이 겸직하셨던 춘추관은 정삼품아문(正三品衙門)으로 정사(政事)를 기록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청이며 기사관은 시정기(時政記)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으로, 역사의 기록·편찬을 담당하였다. 품계는 정6품에서 정9품에 해당하였다. 또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과 같은 기관이며, 취당께서 임명받은 주서는 정7품으로 정원은 2명이었다. 1명은 약방(藥房)을 관장(管掌)하고 1명은 일기(日記)를 관장(管掌)하였으며, 이 주서가 사고가 있을 때는 가주서(假注書)를 임명하였다.
위 문중의 기록 외에 조선 시대 공문서를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언제 취당께서 관직을 제수받고 국사에 참여하셨는지 알 수 있다. 자료의 부족으로 언제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는지는 확인이 안 되며,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 과거에 합격하신 그달 29일(1891년 음력 4월 29일)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조남철이 탈이 있어 그 대신에 조영규(趙瑩奎)를 가주서로 삼았다.09
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해 음력 10월 3일에 이조(吏曹)에서 올린 계목(啓目)10에서 여러 다른 관원들과 함께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추천되었으며, 고종이 이를 윤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1 이 승문원은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외교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로 괴원(槐院)이라고도 하였다. 『승정원일기』를 통해 취당께서 문중의 기록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승문원에서도 국사에 참여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 기록 외 공문서를 통해서는 취당께서 어떤 관직 생활을 언제까지 하셨는지 확인이 어렵다. 다만 「묘갈명」과 「유허비」의 내용을 보면, 취당께서는 어지러운 국사를 바로잡고자 힘쓰셨지만 뜻을 이루기가 어렵게 되자 낙향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히 크게 등용될 만하였는데 공은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벼슬과 록을 구하지 아니하고…12
癸巳에 疏를 올려 愼科擧ㆍ謹租稅ㆍ任賢能ㆍ杜私門ㆍ修武備13 等 五事를 敷陣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醫國의 眞設이였으나 金ㆍ閔14의 頑戚을 中心으로 集結된 宵小輩의 專橫에 依하여 가납되지 못하였다. 公은 宗國淪亡의 前兆를 보고 다시금 榮進할 뜻이 없어 蕭然히 南下하여 孝養하면서 餘生을 마치려하였다. 丙申에 皇帝가 俄館으로 播遷하였음을 듣고 곧 奔問次로 서울에 올라와 여러 차례 疏를 올려 朝政의 闕失로 말미암아 生民이 塗炭에 빠지고 宗社를 보전하기 어려움을 건술함에 忠誠을 다했으나 議政府와 中樞院에서 모두 不報에 부쳤다.15
특히, 「유허비」의 내용에는 취당의 활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893년 취당께서는 나라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과거를 신중히 하고, 조세를 삼가며,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임명하고, 사문(私門)을 막으며, 군사 장비를 마련할 것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김홍집 정권과 민 씨 척족정권의 전횡에 의해 고종에게 수용되지 못하였다. 취당께서는 나라가 망해가는 전조를 보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려 하였으나, 1896년에 고종의 아관파천16을 듣고 다시 상경하였다. 조부께서는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조정의 잘못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종사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의정부와 중추원에서는 모두 불보(不報)에 부쳐버렸다. 이 뒤로 취당께서는 낙향하여 회문리에 계신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1902년 8월 8일 자 《황성신문》에 실린 취당의 글이다. 조부께서는 당시 새로 부임한 경북관찰사 이헌영(李????永)에게 축하의 글을 쓰셨다. 이 글이 현재 남아 있는 취당의 유일한 유문(遺文)이 아닌가 한다.
전 주서 조영규, 경북관찰사 이헌영씨에게 올리는 축하의 글(賀書).
엎드려 듣건데 대감께서 경상도 관찰사에 재임하신다고 하니, 저도 모르게 발로 뛰고 손으로 춤을 추게 되며 배고파도 먹는 것을 잊고 밤에도 잠도 안 오니 이는 우러러 축하드리는 것입니다.
… 무릇 세상의 흥성은 도의의 바름에 있으며, 국가의 흥성은 정교의 다스림에 있습니다. 옛날 주 선왕이 대내적으로는 국정을 다스리고 대외적으로는 적을 물리는 것[內修外攘]이 중흥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도가 무너지게 됩니다. 지금 여러 나라가 개화하고 있으니, 의당 국정을 다스리고 외교에 힘써야 하며 학문을 권장하고 정도에 이르는 것이 천하에 반드시 가져와 취해야 할 법도이니 어찌 중흥의 시기가 아님을 한하겠습니까? 국정을 다스리지 않고 외교에 힘쓰지 않으면 반드시 도를 잃을 것입니다. 국정을 다스리고 외교에 힘쓰는 것은 조정이 현능(賢能)을 쓰느냐에 달려 있으며, 조정이 현능을 쓰는 것은 반드시 성인의 마음에서 비롯되니,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능히 어리석은 무리를 배척하고 군자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성인이 하루를 극기복례하면 천지가 감응하고 귀신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천하가 인에 돌아가며, 천하가 인에 돌아가면 세상을 융성하게 하고 나라를 흥하게 함에 있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 옛 성현의 인의도덕의 설은 진부한 말과 쓸데없는 이야기라 이르고, 우주 안에서 하루도 행하려 하지 않고 사람들은 예의가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고 염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급한 것은 이득이며 다투는 것도 이득이며 이득과 이득 이외는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법도는 문란하고 강기는 퇴폐하며 사치와 화려함은 정도가 없고, 더러운 것을 탐함이 풍조가 되었고 만물은 성기고 인색하여 백성의 식량이 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백성이 식량이 어려우면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 다한 것이며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 다하였으니 나라가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면 나라가 태평하다고 하였으니, 근본이 튼튼하고 나라가 태평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우리 성상의 지덕을 존친(尊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시생이지만 하례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17
▲ 《皇城新聞》 1902년 8월 8일자의 「별보」에 실린 취당의 유문 .
위 취당의 하서(賀書)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취당께서 경북관찰사 이헌영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는 부분이며, 둘째는 이헌영에게 국가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법도를 전하는 내용이다. 셋째는 취당께서 당시의 세태를 걱정하고 국가의 근본인 백성이 튼튼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며, 넷째는 국왕인 고종의 은덕을 칭송하며 이헌영에게 하례하는 부분이다.
특히 둘째와 셋째 부분에서 취당의 당시 우리나라의 세태에 대한 인식과 국가 운영에 대한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취당께서는 당시 조선 사회가 성인의 도덕이 무너지고 예의와 염치가 사라졌으며 오직 이득만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식량 또한 곤궁하여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염려하셨다. 국정 전반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는 당시 여러 나라가 개화하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국정을 다스리고 외교에 힘쓰는 것[內修外交]을 주요한 법도로 제시하고 이를 위해 성인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조정이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써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조부님의 서거
취당께서는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즈음 민영환·이상설 등의 신료들과 함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공께서는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 소인들이 등용됨에 충정공 민영환 및 이상설 제공들과 국정의 위태함을 구원코자 하다가 을사늑약이 성립될 즈음 상소를 올려 일제의 간악함과 대신들의 불충함을 극간(極諫)하였으나 마침내 불청됨에 울분에 못 이겨 피를 토하고 수레에 실려 고향에 돌아와 원한을 품고 별세하니 각 읍 수령과 원근 선비들이 애도하는 자가 수백 인이더라.18
위 내용에서 보듯, 취당께서는 민영환·이상설 등과 함께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리며 국난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조선 지배에 대한 야욕과 간신들의 불충에 의해 그 뜻이 좌절되었다. 이에 취당께서는 크게 분개하여 토혈하시고 수레에 실려 귀향하시어 1905년 음력 11월 1일(양력 11월 27일)에 서거하셨다. 을사늑약이 음력 10월 21일(양력 11월 17일)에 체결되었으니, 늑약 체결 후 10일 만에 서거하신 것이다.
당시 취당께서 남기셨다는 상소문은 현재 확인하기 어려우며 다만 민영환의 상소문은 현재 남아 있다. 민영환은 늑약 체결 이후 음력 10월 30일과 음력 11월 1일 두 차례 상소문을 작성하였으며 음력 11월 4일 오전 6시경 유서를 작성하고 장렬히 자결하였다.19
취당께서 뜻을 함께하였다는 이상설은 늑약 체결 보름 전 대신회의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임명되어 늑약 체결 과정의 전모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는 체결 당시 이를 적극 반대하며 각 대신에게 순국(殉國)의 결의를 촉구하기도 하였다.20 일본군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했던 이상설은 늑약 체결 이후 국망(國亡)을 슬퍼하며 음력 10월 22일·23일·26일·28일과 11월 12일 총 5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는 5차 상소 후 관직을 사임하고 늑약 파기를 위한 거국투쟁을 추진하였다.21
문중의 기록 외에 다른 사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을사늑약을 전후로 한 취당의 보다 상세한 활동은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 늑약에 극히 반대하던 일부 충신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비분강개하였던 상황에서, 취당 또한 충신들과 더불어 상소 활동을 전개하며 나라를 구하고자 진력하셨고 뜻을 이루지 못하시자 원통한 마음에 토혈 서거하셨음을 살펴볼 수 있다.
나가며
취당께서는 경남 함안 지역에서 학문과 충절로 이름난 명문가인 함안 조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문장과 서예가 뛰어나 인근에 칭송을 받았다. 31세인 1891년 과거에 급제한 취당은 홍문관, 춘추관, 승정원,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국정에 참여하셨다. 특히 홍문관은 조선 시대 정치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언론 기관으로 젊은 관리들이 등용되고자 하였던 주요 관청이었던 점에서, 당시 조정에서 취당을 장차 국정을 이끌어 나갈 주요 인재로서 여겼던 것은 아닌가 짐작해본다. 또 취당은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면서 국왕인 고종을 인근에서 보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에 임직하며 당시 조선의 외교 상황 및 국제 정세에도 밝았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그러나 취당의 관직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취당이 국정에 참여한 지 얼마 안 되어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을미사변 등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등 국내외의 정세가 매우 혼란하였다. 조정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를 위시한 민씨 세력의 정권 투쟁이 극에 달하였으며 일본과 청나라가 그 배후에 작용하며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취당께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회문리에 머무신 것으로 보이며, 그러면서도 나랏일을 걱정하여 고종의 아관파천 때 상경하여 상소하였다.
특히 을사늑약을 즈음하여 취당께서는 당시 조정의 핵심 인물이자 충신이었던 민영환·이상설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일제의 야욕과 늑약 체결의 부당함에 관한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늑약에 의한 국권 침탈의 위기를 해소하지 못하셨다. 이후 취당께서는 분격하여 심화로 토혈하셨으며 병을 얻어 고향에서 서거하시게 되었다. 도주님의 부친과 숙부는 이러한 조부님의 뜻을 받들어 반일운동에 활약하셨으며, 1909년 음력 4월 부조전래의 배일사상을 품으신 도주님께서는 부친·숙부 등과 함께 만주 봉천 지방으로 망명하신 것이다.
01 『대순진리회요람』, pp.11-12.
02 허권수, 「함안 조씨의 함안 정착과 大笑軒 가문」, 『남명학 연구』 38 (남명학회, 2013), p.3.
03 취당의 선조인 조정, 조열, 조려, 조방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도주님의 선조」, 《대순회보》 172호 (2015), pp.28-34 참조.
04 「通仕郞 聚堂公 瑩奎 墓碣銘」, “哲宗辛酉, 公生于會文里, 第幼而警敏異於凡兒, 讀書卽通文理, 究精經義, 善屬文亦工書, 妙齡已聲譽頗隆…”
05 「聚堂先生遺墟碑銘」, “公은 哲宗 辛酉에 나서 어렸을 때부터 이미 聰明才質이 뛰어나 옛글을 읽으면 문득 文理가 通達하여 經義에 밝고 文章에 能하고 글씨 또한 아름다워 妙齡에 聲譽가 자못 높았다.…”
06 『國朝榜目』 奎貴 11655 12권.
07 최승희, 「홍문관의 언관화」, 『조선시대사학보』 18권 (조선시대사학회, 2001), pp.47-49.
08 최승희, 「홍문록고」, 『대구사학』 16권 (대구사학회, 1978), p.2.
09 『승정원일기』 3008책, 고종 28년 4월 29일, “趙南轍有頉, 代以趙瑩奎爲假注書.”
10 조선시대 중앙의 관부에서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양식.
11 『승정원일기』 3014책, 고종 28년 10월 3일, “吏曹啓目, 權知承文院副正字金亨善ㆍ朴謙載·…權翼洙ㆍ趙瑩奎ㆍ羅純榮…李重五爲等如, 口傳施行, 何如? 判付. 啓, 依允.”
12 「通仕郞 聚堂公 瑩奎 墓碣銘」, “可不憂其不大用, 而公目見國事之日, 非以其求仕初, 不爲祿位…”
13 과거를 신중히 하고, 조세를 삼가며,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임명하고, 사문(私門)을 막으며, 군사 장비를 마련하는 일.
14 ‘김’은 당시 정권을 잡았던 김홍집 내각을, ‘민’은 민씨 정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5 「聚堂先生遺墟碑銘」.
16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17 필자 역. 원문은 「別報」, 《皇城新聞》, 1902년 8월 8일, “前注書趙瑩奎, 上慶北觀察使李????永 氏賀書. 伏聞大監再任嶺伯云, 不知足之蹈之手之舞之, 飢而忘食, 夜而不寐, 是何等仰賀也. … 夫世之盛不盛, 在於道義之正不正, 國之興不興, 在於政敎之治不治, 昔周宣王內修外攘, 致中興之續, 不修內而外攘, 必敗之道也. 今列國開化, 當內修外交, 勸學正道, 則天下必來取法, 何恨中興之不時, 不修內而外交, 必失之道也. 內修外交, 在於朝廷之用人賢能, 朝廷之用人賢能, 必自聖人之心, 非聖人烏能排群蒙而進君子乎? 聖人一日克己復禮, 天地感應, 鬼神悅豫, 故曰天下歸仁, 天下歸仁, 則於盛世興國, 何難之有? … 古聖賢仁義道德之說, 謂之陳談陋說, 未嘗一日行於宇宙之內, 人不知禮義之爲何物, 廉恥之爲何事, 所急者利, 所爭者利, 利與利外, 無他物事, 法度紊亂, 綱紀頹廢, 侈華無度, 貪墨成風, 萬物疎嗇, 民食極難, 民食極難, 則是民天竭矣, 民天旣竭, 則國何以爲國乎?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不固本而邦寧, 必無之事也. … 凡有血氣者, 莫不尊親我聖上至德矣, 雖至愚之侍生, 不勝獻賀之至.”
18 「注書公 瑩奎」, 『咸安趙氏 斗巖公派世譜』 1 (부산: 아름기획, 1996), p.300, “公이 見國事日非하고 小人見售同이라. 閔忠正公泳煥及李相卨諸公欲救國政於危難之際에 至乙巳韓日保護條約成立하니 則製進敎百言으로 而極陳日官之抉邪와 大臣之不忠하였으나 終不見聽이라. 則激憤吐血하고 載輿而歸鄕하여 含寃而卒하니 可勝惜哉라. 其葬也에 各邑守令及遠近士友之誄送者數百人이라.”
19 외솔회, 『나라사랑』 102집 (외솔회, 2001), pp.164-167.
20 윤병석, 『이상설전』 (서울: 일조각, 1984), pp.32-34.
21 위의 책, pp.38-47. 이상설은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으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ㆍ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힘쓰기도 하였다. 그 뒤 미국에서 독립운동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유인석ㆍ이범윤 등과 함께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을 이어간 그는 1917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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