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청도에서의 도주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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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6.17 조회6,431회 댓글0건본문
도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교운 2장을 읽다 보면 청도(淸道)와 관련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1923년 6월 23일 도주님께서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하시며 「전교(傳敎)」를 내리실 때 모였던 종도 가운데 청도 사람 장득원(張得遠, 1897~1972)이 있었다는 내용의 구절이고,01 둘째는 1923년 6월 24일~9월 사이에 도주님께서 청도 유천(楡川)의 박동락(朴東洛, 1876~?) 종도 집에서 단도수를 행하신 내용의 구절이며,02 셋째는 1923년 10월~1924년 2월 중순 기간의 넉 달 동안 도주님께서 청도 적천사 도솔암에서 단도수를 행하신 내용의 구절이다.03 위의 세 구절은 모두 1923~1924년에 있었던 일로,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어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관련 인터뷰 자료·외부 자료 등을 통해 청도 지역의 도주님 행적지와 종도들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교운 2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청도는 경상북도 최남단에 있는 군으로, 고려 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이 지역에 청도군이 설치되었다. 청도군 가운데에서도 특히 교운 2장에 기록된 도주님의 행적과 관련된 곳은 군의 행정과 경제 등의 중심지인 청도읍이다. 청도읍은 도주님께서 왕래하시던 1920년대에는 대성면으로 불렸으며, 사방이 500m 내외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주변으로는 용각산(696.8m)·화악산(932m)·철마산(633.9m) 등이 높게 솟아 있다. 또한, 청도천이 청도읍 중앙부를 통과하여 밀양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청도에서 도주님의 행적지가 있는 곳은 장득원의 집, 박동락의 집, 적천사 도솔암 세 곳이다. 그중에 도주님께서 가장 먼저 가셨던 장소는 현재 청도읍 음지리04 마을에 있는 장득원의 집이다. 그 시기는 1922~1923년경으로 추정된다. 도주님께서 어떤 연유로 장득원의 집에 가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집에서 2~3달 정도 머무셨다. 그때 도주님께서 장득원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도주님께서 다녀가신 후 장득원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성면의 서기직을 그만두었고, 도에 뜻이 있어 도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05
▲ 장득원의 집이 있던 장소(현주소: 경북 청도군 청도읍 음지리)
▲ 박동락의 집이 있던 초현리 일대(출처: 다음 위성 지도)
도주님의 종도가 된 장득원은 1923년 상제님 화천 치성일 전날인 6월 23일에 도주님께서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하시며 「전교」를 내리실 때 여러 종도들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여 도주님의 설법을 들었다. 「전교」에는 인류 역사 속에서 도의 가르침이 전해지는 과정을 밝히고 장차 새로운 도인 무극도가 세상에 출현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25년 정읍 태인에서 무극도(无極道)가 창도되었다. 장득원은 이때 도 본부에서 일반 사무 일을 하던 ‘찰리(察理)’라는 주요 직책을 맡았다.06 장득원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무극도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07
도주님의 두 번째 행적지는 청도읍 유천의 박동락 집이다. 그 집은 현재의 청도읍 초현리 지역에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교운 2장에 기록된 ‘유천’은 오늘날의 청도읍 유호리·내호리·초현리를 모두 포함한 지역이다.08 전설에 의하면, 1600년대 중엽 이곳에 정착한 김해 김씨가 청도천·동창천이 만나는 곳에 느릅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서 느릅나무를 뜻하는 유(楡) 자를 붙여 ‘유천’이란 지명을 지었다고 한다.09
박동락 종도의 집은 도주님께서 1923년 6~9월 사이에 진인보두법(眞人步斗法)으로 단도수를 행하셨던 곳이다. 진인보두법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지는 수련술 중의 하나로서, 북두구성(北斗九星) 즉 밝게 보이는 북두칠성과 이를 보필(輔弼)하는 두 개의 별([좌보(左輔)와 우필(右弼)]을 땅에 그려놓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우보(牛步)로써 밟아 나가는 법술이다.10 진인보두법은 1924년 4월에 무극도장(无極道場)이 건립될 터에서 치성을 끝내고 행하신 공부에도 사용되었다.
박동락 종도는 도주님의 공부를 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5년 무극도가 창도된 후에는 도의 본부(本部) 직원인 종리(從理)의 직책을 맡았다.11 그 직책은 도 본부에서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의 포덕 책임자인 연락(聯絡)12과 도의 업무를 협리(協理)하는 일을 담당했다.13
박동락 종도의 집이 있던 초현리의 마을회관에서 도로를 따라 차로 20분 정도 가면 청도읍 원리 마을에 있는 적천사가 나온다. 여기에서 다시 20분 정도 산길을 더 걸어 올라가면 도솔암에 도착한다. 도솔암의 본사인 적천사는 664(신라 문무왕 4)년 원효대사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을 지음으로써 창건되었다. 고려 시대에 지눌(知訥, 1158~1210)이 1175(명종 5)년에 크게 중창했는데, 참선하는 수행승이 언제나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의 산내 부속 암자로는 도솔암(兜率庵)·은적암(隱蹟庵)·백련암(白蓮庵)·옥련암(玉蓮庵)이 있었는데, 현재는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도솔암만 남아있다. 이후에 몇 차례 소실과 중수를 겪으면서 지금의 적천사가 되었다.14
도주님께서는 적천사 도솔암에서 1923년 10월~1924년 2월 중순 기간의 넉 달 동안 칠성각(七星閣) 뒤에 돌단을 높이 쌓고 24방위를 정하여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공부 시간은 저녁 일곱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여섯 시까지 정하여 단도수 공부를 행하셨다. 도주님께서 도솔암에서 행하신 단도수 공부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1925년 무극도 창도를 준비하던 시기인 ‘황새마을 시기’15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무극도 창도와 일정 부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지금의 도솔암에는 공부 당시에 있던 칠성각은 없어지고 법당과 산신(山神)·나반존자(那畔尊者)·칠성신(七星神)을 모신 삼성각(三聖閣) 그리고 요사채 건물 등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교운 2장에 언급된 청도에서의 도주님 행적은 1923~1924년 사이에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다. 행적 가운데 특히 이 지역에서 두 차례 이루어진 단도수 공부는 1925년 무극도 창도를 준비하는 시기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아 무극도 창도와 일정 부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하였던 자료 중에서 앞서 살펴본 두 명의 종도 외에도 김홍섭(金泓燮), 한기진(韓杞鎭) 등의 청도 출신 무극도 간부들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17 김홍섭은 박동락과 같은 청도읍 초현리 사람으로 무극도의 본부 직원인 ‘종리’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또, 한기진은 청도읍 음지리 출신으로 지방의 포덕 활동 책임자인 ‘연락’을 맡고 있으면서, 600명 정도의 도인을 이끌어가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무극도 간부들 가운데에 장득원·박동락·김홍섭·한기진 등 청도 출신이 여러 명 있었던 점으로 보아 청도는 당시 포덕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짐작된다.
01 교운 2장 26절.
02 교운 2장 27절.
03 교운 2장 28절.
04 도주님께서 가셨던 당시는 청도군 대성면 음지리였다.
05 2007. 1. 25. 장호상 씨 증언; 장지홍, 『석람 장호상家 사화집』, 김종서 옮김 (서울: 도서출판 문학관, 2010), pp.17-18 참고. 장호상 씨는 장득원 종도의 아들이고, 장지홍 씨는 장호상 씨의 아들이다.
06 전라북도도청, 『무극대도교개황』, 일본학습원대학동양문화연구소소장(M2-87), 1925, p.37 참고.
07 2007. 1. 25. 장호상 씨 증언.
08 군지편찬위원회, 『청도군지』 (구일출판사, 1991), pp.1139-1140 참고.
09 같은 책, p.1154 참고.
10 “진인보두법이란 무엇인가? 도교 경전에 의하면, 보두(步斗)란 보강탑두(步罡踏斗)이다. 두(斗)라는 것은 곧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나타내며, 강(罡)이란 곧 북두칠성의 두병(斗柄)을 가리키는 것이다. 도사들이 행하는 술법에서는 보강탑두를 정식의 법으로 하는데, 이로써 천상성군을 감응하게 하여 신묘한 효과를 보고자 한다. 이러한 법술은 곧 우보와 동일한데, 보강탑두가 나타내는 기본적인 정신과 행법의 순서는 우보와 일치한다. … 중두는 아홉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일곱 개의 별은 밝으며 나머지 두 개의 별은 어둡다고 한다. 별들의 원기(元氣)는 지계(地界)에 감응하며 구기(九氣)의 신명으로 변하는데 이를 일컬어 구령(九靈)이라 한다. 야(祂)로 남긴 발자국은 아홉 점의 흔적을 남겼는데 이러한 흔적은 곧 천상의 성수(星宿)와 대응하므로 이를 성강(星綱), 또는 성강(星罡)이라 일컫는다. … 우보란 발로써 성두의 종적을 따라 밟는 것인데, 우보라 약칭하기도 한다. 대우가 득도하여 진인이 되었으므로 우보는 곧 진인의 이두지보(履斗之步)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진행하는 순서를 가리켜 진인보두법이라 일컫는 것이다.”, 詹石窗, <우보치령(禹步致靈)과 양생건신(養生健身)>, 《第二回 韓中 宗敎文化 學術會議 발표 자료집》 (2013). pp.14-15; 교무부, 「『전경』용어」 진인보두법, 《대순회보》 109 (2010), p.57.; 교무부, 「『전경』용어」 우보상최등양명, 《대순회보》 169 (2010), p.58.
11 전라북도도청, 『무극대도교개황』, 일본학습원대학동양문화연구소소장(M2-87), 1925, p.38 참고.
12 연락은 지방 조직의 최고책임자로, 240~15,000명 정도의 무극도 도인을 이끌어가던 직책이다.
13 《대순회보》 219호, 「무극도의 조직체계」 참고.
14 「적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15 필자는 도주님께서 황새마을 본소를 포덕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1918년 10월 이후부터 1925년 무극도 창도까지를 편의상 ‘황새마을 시기’로 보았다.
16 이정만, 「전경지명답사기: 적천사 도솔암을 다녀와서」, 《대순회보》 214호 (2018), pp.60-63 참고.
17 전라북도도청, 『무극대도교개황』, 일본학습원대학동양문화연구소소장(M2-87), 192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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