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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상제님 유년 시절의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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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6.20 조회5,8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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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유년시절에 모친이 짜놓은 모시베를 분실했다가 찾아서 파시는 내용과 박부자에게 찾아가서 부친의 채무 수백 냥의 빚을 탕감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분실하셨던 모시베의 가치가 당시 어느 정도였으며, 수백 냥이 얼마 정도였기에 상제님의 부친께서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셨을까? 현재 사용하는 화폐의 가치와 상제님의 유년 시절인 1880년대 초반의 화폐가치가 달라 정확한 가격을 알기 쉽지 않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상제님께서 유년시절에 사용하신 엽전을 지금의 화폐단위로 환산하여 어느 정도의 금액이었는지를 추정해 봄으로써 『전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조선 시대 화폐가치 

 

  조선 시대에는 금속화폐와 비금속 화폐가 있었다. 금속화폐의 가치는 소재(구리 함유량)에 있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금속화폐가 많이 유통되지 않아서 물물교환하거나 비금속 화폐를 사용하였다. 비금속 화폐로는 쌀과 모시, 추포(麤布: 거칠게 짠 삼베) 등이 있었다. 태종이 금속화폐를 시중에 유통하려고 하자 백성들이 쌀은 식량이 되고 추포는 추울 때 덮을 수 있지만, 저 검은 덩어리는 아무 쓸모도 없다며 사용을 거부했다는 데서도 당시 화폐의 가치를 소재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01 이후 숙종 때 상평통보를 발행하고 백성들에게 알맞은 국가 정책을 시행했는데, 장시(場市: 오늘날의 시장)가 발달함에 따라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채소를 파는 노파까지도 화폐를 요구할 만큼 널리 유통되었다.02 이처럼 조선 후기에 금속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졌지만, 비금속 화폐는 화폐로서 역할을 꾸준히 하면서 물가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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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널리 쓰인 상평통보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들어간 구리의 무게를 기준으로 화폐 단위로 삼았다. 즉, 상평통보 엽전 1개가 한 닢이며 여기에는 구리 0.375g이 들어있었다. 이것이 10개 모이면 1전(3.75g)이 되고, 10전이면 1냥이 되는 것이다.04 그래서 1냥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엽전 100개를 한 다발로 묶어서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현재는 신용을 기반으로 법에서 정한 화폐를 통용시키는 관계로 고액을 지불할 때 종이 화폐를 사용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기에 무거운 엽전을 모두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구리의 함량을 기준으로 만든 화폐의 유통은 위조 화폐를 낳기도 하였다.

  상제님께서 13세이셨던 1883년부터 1894년에 발행된 당오전(當五錢)은 2전의 구리 함량(7.5g)으로 주조되었지만 5전의 가치를 가진다고 공표된 화폐이다.05 실제 소재 가치가 2전인 당오전이 5전의 가치로 유통됨에 따라 3전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당오전의 불법 주조가 성행하였다. 그래서 시장에 너무 많은 당오전이 쏟아져 나와 서울 인근 지역의 경우 물가는 폭등하였다. 전라도 지역은 서울 인근 지역처럼 물가가 폭등하는 혼란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대략 이 시기부터 쌀값이 오르기 시작했다.06

 

 

모시베와 수백 냥의 가치 

 

상제께서 열세 살 되시던 어느 날 모친께서 짜 놓은 모시베를 파시려고 이웃사람 유 덕안(兪德安)과 함께 정읍(井邑) 장에 가셨도다. 그는 볼일이 있어 가고 상제께서 잠시 다른 곳을 살피시는 사이에 옆에 놓았던 모시베가 없어진지라. … 다음날이 고창(高敞) 장날임을 아시고 고창에 행하셨도다. 포목전을 두루 살피시는데 마침 잃으신 모시베를 팔러 나온 자가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그것을 찾아 파시고 집에 돌아오셨도다. (행록 1장 14절)

 

 

 

  상제님께서 13세이시던 해는 1883년이었다. 이때 모시베의 가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모시베의 가격을 추정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물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모시베의 물가가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아 모시베의 가격은 기록이 남아 있는 면포와의 가격 비율을 통해서 추정해야 할 듯하다. 이에 대한 근거자료는 울산에서 발견된 『심원권 일기(沈遠權 日記)』와 전북에서 발견된 『이재난고( 頤齋亂藁)』를 기준으로 삼았다. 『심원권 일기』는 심원권(沈遠權, 1850~1933)이 1870년부터 1933년까지 부모님 상을 치른 3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울산 지역의 물가를 기록한 책이다. 상제님께서 강세하셨던 전라도 지역은 아니지만, 화폐의 가치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던 시절에 매일의 물가를 기록했다는 점과 현재 지방문화재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07 그리고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 학자 이재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저술한 것으로 문학·산학·농·공·상 등 여러 방면에서 인류 생활에 이용되는 것을 총망라해서 기록한 책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에 지정된 책이다.

  『이재난고』에는 모시베와 면포의 비율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와 있는데 군포 값이 한 필당 2냥 5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필은 대개 서민 옷 1벌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당시 군역에 대한 세금인 군포를 화폐나 면포로 냈는데 면포 1필의 가격이 2냥 5전이었다는 것이다.08 그리고 황윤석이 모시 4필을 16냥에 샀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당시 모시베 1필의 가격이 4냥인 것을 알 수 있다.09 1필을 기준으로 면과 모시베의 가격이 2냥 5전과 4냥이므로 비율이 1:1.6이다. 세금을 징수하는 화폐와 베의 교환 비율이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교환 비율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서 이를 기준으로 모시베의 가격을 추정해 보도록 하겠다.

  188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일반 면포 가격을 계산해보면 추울 때는 1필당 7냥까지 갔었고 따뜻할 때는 대략 5냥 정도였다. 면포값의 평균을 내면 1필에 6냥으로 산정할 수 있다. 면포보다 약간 비쌌던 모시베 값을 추정하기 위해 1:1.6의 비율을 적용하면 모시베 값은 대략 10냥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 모시베의 가격은 현재 가격으로 얼마였을까? 조선 영조 때부터 쌀값이 물가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1880년대 초반 쌀 1섬(두 가마니)은 7냥이었는데,10 이 가치를 현재의 돈으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이 산출할 수 있다. 당시의 쌀은 현미였으므로 2019년 12월 보통 품질의 현미 쌀 20kg이 55,000원 정도고, 현미 한 섬은 155kg(조선 시대의 한 섬은 지금 한 섬의 60퍼센트 내외)이다. 이것을 현재의 시세로 계산하면 한 섬은 255,750원이 된다. 이를 토대로 산출하면 한 냥은 37,000원이다.11 그러므로 모시베 값을 10냥으로 추정하여 현재 가치로 최종적으로 계산하면 37만원이 되는 셈이다.

  이번에는 상제님 부친께서 지신 빚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상제께서 부친이 정읍의 박 부자로부터 수백 냥의 빚 독촉에 걱정으로 세월을 지내는 것을 아시고 부친에게 五十냥을 청하여 박 부자의 집으로 찾아가서 갚으시고 그의 사숙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도다. … (행록 1장 17절)

 

 

  위의 구절에서 수백 냥의 빚 중에서 부친으로부터 받아서 갚으신 50냥과 수백 냥의 가격은 어느 정도 되는지 모시베의 가격과 동일하게 산정해보고자 한다. 『전경』 구절에서 보면 상제님께서 학동들과 사귀셨다고 하는데, 대개 학동의 나이는 성인이 되는 15세 이전이었으므로 1880년대 중반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당오전의 남발(1883년 발행 시작)로 물가가 1884년부터 오르기 시작한다. 1880년에 쌀 1섬에 6냥 하던 쌀가격이 1881년에 6.5냥, 1882년 7.85냥, 83년 9.35냥, 1884년도가 되면 14냥까지 오른다. 그래서 물가가 치솟기 전인 1881년과 1882년의 평균값과 1883년에서 1884년까지의 평균값 2가지로 상제님 부친의 빚을 지금의 화폐로 계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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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1년과 1882년의 쌀값을 평균 내면 대략 7냥이 나오고, 1883년과 1884년의 쌀값을 평균 내면 12냥이 나온다. 7냥과 12냥을 각각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쌀 1섬 7냥일 때 1냥은 37,000원, 12냥일 때는 1냥에 22,000원의 교환가치를 지닌다. 부친의 빚이 수백 냥이었으므로 200냥에서 900냥 사이로 가정하여 계산해보았다. 쌀 1섬이 7냥일 때는 740만 원에서 3,330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고, 쌀 1섬이 12냥일 때는 440만 원에서 1,980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산출된 부채의 금액을 보면 상제님 부친의 근심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많게는 3,000여만 원이나 되는 빚을 50냥(1냥 37,000원일 때 185만 원, 1냥 22,000원일 때 110만 원)만 받고 탕감해 준 것을 보면 박 부자가 상제님을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당시 쌀 가격을 기준으로 모시베와 상제님 부친께서 지신 빚의 가치를 지금의 화폐로 계산해보았다. 상제님 유년 시절의 물가를 막연한 짐작이 아닌 당시의 자료를 근거로 추정한 것이므로 『전경』의 내용을 좀 더 잘 공감하며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01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경기: 청년사, 2005), p.127. 

02 같은 책, p.128.

03 국사편찬위원회, 『화폐와 경제활동의 이중주』 (서울: 두산동아, 2006), p.9.

04 같은 책, p.11. 1880년대 화폐 단위는 1량=10전(돈)=100문(닢, 푼)이었다. 1890년대 이후에는 화폐가 새로이 주조되면서 이 단위가 시대에 따라 달랐다.

05 한국박물관연구회, 『한국의 박물관』 (서울: 문예마당, 2001), p.47-48 참고.

06 전남 장흥 지역의 경우 1874년에 한섬에 7.5냥이었는데 1888년부터는 한섬의 가격이 10냥으로 올랐고, 1889년에는 13.33냥으로 올랐다. 전성호, 『장서각 수집 물가사 자료 해제 및 통계』 (서울: 민속원, 2008), p.179.

07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42호 2018년 12월 23일에 지정.

08 황윤석, 『역주 이재난고 12』, 김승룡외 9인 옮김 (부산: 신언, 2015), p.4395.

09 황윤석, 『역주 이재난고 18』, 김승룡외 9인 옮김 (부산: 신언, 2015), p.7018.

10 1880년도 쌀의 평균값 6냥, 1881년 6.5냥, 1882년 7.85냥, 83년 9.35냥 정도이다. 이를 평균 내면 7냥 정도 나온다. 전성호, 앞의 책, p.223-232 참고.

11 한국역사연구회, 앞의 책,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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