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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무극도 창도 시기의 도세 - 신도 규모와 지역 분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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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7.20 조회5,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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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도(无極道)는 도주님께서 1917년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하시고 계시로 종통 계승을 받으신 지 8년 만인 1925년에 우리 종단 역사에서 최초로 창설된 종단이다. 이때 비로소 도주님에 의해 상제님께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되시고 도(道)의 종지·신조·목적이 정해졌으며 조직체계가 완비되는 등 종단의 모든 면모가 갖추어졌다. 

  무극도 창도 전후 시기에 있었던 도주님의 주요 행적은 도수(度數)에 의한 공부와 포덕 활동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도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교운 2장에 이때 행해진 공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포덕 활동에 대해서는 잘 나타나 있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 글을 통해 무극도의 포덕 활동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연구에서는 교운 2장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작성된 문건인 『무극대도교개황(無極大道敎槪況)』01과 『조선의 유사종교』02 · 『국역고등경찰요사』03와 1920년대 신문에 보도된 무극도 관련 기사 등을 검토하였다.

 

 

신도 규모 

  무극도 창도 시기의 신도 규모는 『무극대도교개황』의 ‘간부일람표’에 기록된 간부들의 명단과 인적사항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무극도 조직은 크게 중앙조직인 본소조직(本所組織)과 지방을 중심으로 포덕 업무를 담당했던 지방조직(地方組織)으로 나뉘는데, ‘간부일람표’에는 본소직원 25명, 지방직원 127명의 명단과 직위, 연령, 본적(本籍), 비고(備考)04 등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다.05 지방직원의 명단은 다시 ‘연락(聯絡)’ 78명과 ‘부분(府分)’ 49명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부분’ 인원수가 명단에는 49명이 나오지만, ‘비고’의 내용을 토대로 78명의 ‘연락’이 담당한 ‘부분’ 인원수를 모두 합산하면 559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간부일람표’ 명단에 ‘부분’ 인원이 적어도 510명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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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료를 통해 신도 수를 추정할 경우, 무극도의 조직체계에 대한 2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모든 신도가 연운제(緣運制)에 의한 기본수도조직인 지방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이다.06 둘째는 지방조직 가운데 ‘연락’이 모든 신도를 담당했다는 점이다. ‘연락’은 지방조직의 최고위직으로 ‘부분’ 2~125명(신도 240~15,000명)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07 이때 ‘부분’은 도인 120명 이상을 담당했던 직책이다.08 

  이렇게 볼 때, 전체 신도 수는 ‘간부일람표’에 기록된 지방직원 가운데 78명의 ‘연락’이 담당했던 신도 수를 모두 합산하면 된다. 따라서 78명의 ‘연락’이 담당했던 ‘부분’ 인원 559명에 ‘부분’이 담당한 신도 수 120명을 곱하면 67,080명이라는 수치가 나온다.09 즉, 일람표를 기준으로 추정한 무극도 창도 시기 전체 신도 수는 약 67,000명이다. ‘간부일람표’에 기록된 ‘연락’ 인원 78명이 무극도 창도 시기의 실제 ‘연락’ 인원수보다 적을 것이라고 본다면,10 여기서 산출된 전체 신도 규모는 최소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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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산출된 신도 수 약 67,000명은 《조선일보》 1925년 6월 22일 기사 ‘정읍태인(井邑泰仁)에 제이(第二) 『훔치』 출현(出現)’에 언급된 무극도 신도 8만 명과 《동아일보》 1929년 7월 26일 기사 ‘복마전을 차저서(무극교 정체)’에 언급된 무극도 신도 6~7만 명을 비교해 봐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의미 있는 수치로 볼 수 있다. 

  한편 『조선의 유사종교』에는 1925년 신도 수가 2,937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11 이 수치는 당시 여러 자료와 비교하였을 때 큰 차이가 난다. 1925년 부산 대신동 지역의 신도 수가 1만 3백여 명,12 1926년경의 경북·전북 등 일부 지역의 신도 수가 32,492명,13 1926년 5월부터 9월까지 강원도 삼척 지역의 신도 수가 약 3만 명14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 그럴까?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제로부터 유사종교단체로 분류되어 심한 탄압을 받고 있던 무극도가 교세를 감추는 것이 감시를 덜 받고 활동하는 데에도 유리했을 것이라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제의 식민통치자료로 작성된 『조선의 유사종교』의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극도 측 관련자들이 교단 내부의 정보를 고의로 숨기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도 규모 또한 상당히 축소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 분포 

  무극도가 창도되던 1925년 우리나라 행정구역은 13개 도(道)15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무극도 신도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어디였을까?

  교운 2장을 통해 무극도 창도 이전 시기에 언급된 도주님의 종도를 중심으로 지역 분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종도들을 출신지별로 분류해 보면, 충남 2명16·경북 12명17·경남 8명18으로, 경북과 경남 출신이 절대적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주요 역할이 도주님을 시종하거나 도주님께서 설법하실 때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교단의 핵심적인 인물로 추정된다. 무극도의 포덕 활동은 대인 접촉을 통한 연운제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경북·경남 지역에 이들과 관련된 신도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이다. 경상도 출신의 종도 20명 가운데 12명은 『무극대도교개황』의 일람표 간부 명단에도 기록되어 있다.19

  『무극대도교개황』에 있는 ‘무극대도교연혁’의 전반적인 신도 분포와 ‘간부일람표’의 간부 본적지를 통해 지역 분포를 확인할 수 있다. ‘무극대도교연혁’에는 신도가 경남의 밀양·울산·부산과 경북의 예천·봉화·안동·의성·청송·김천·상주·선산 등의 각 군을 중심으로 전북의 정읍·김제에 소수가 있고 기타 전국에 걸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20 ‘간부일람표’에 기록된 152명의 간부를 출신지별로 분류해 보면 경북(98명)·경남(29명)·강원(16명)·전북(5명)·미확인(1명) 등으로 나타나는데,21 경북과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간부들이 분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출신의 간부들을 다시 군(郡) 단위별로 보면, 경남 밀양군 지역이 26명으로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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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유사종교』에는 무극도 신도 수가 연도별로 기록된 표가 있는데, 1925년에는 경북(2,463명)·경남(152명)·강원(322명) 3개 지역에 대한 기록만 보인다. 물론 이들 수치 또한 앞서 신도 수를 추정할 때 언급하였듯이 상당히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들 지역에서만 신도 수가 파악되었다는 사실은 경북·경남·강원 세 지역이 다른 곳에 비해 신도 규모가 크고 활동이 많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북22·충북23·평남24 지역 등 다른 지역의 신도 수는 1927년 이후부터 기록이 보인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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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는 신도들의 지역별 활동에 관한 기사가 등장한다. 1925년 2월 25일 기사에 경북 안동군 일직면 송리동에 있는 중앙교부에 3백여 명의 신도가 모여 기도를 했으며,26 7월 6일 기사에는 부산 대신동에 사무소를 두고 근래 2년 동안 신도 1만 3백여 명이 모집되었다고 한다.27 또한, 7월 10일 기사에는 간부를 각 처로 보내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그곳이 경성(경기), 부산(경남), 밀양(경남), 김제(전북), 평양(평남), 대구(경북), 대전(충남)의 7개 지역이라고 되어있다.28 이외에도 1926년도 신문에 경북 예천·의성·영덕 등의 지역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29  

  경상도 이외의 지역으로는 1928년 3월 3일 기사에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대정 15(1926)년 5월부터 9월까지 교도 약 3만 명이 2만 3천여 원을 정읍으로 보내여”라는 기록이 보인다.30 

  『국역고등경찰요사』에서는 경북에서 특히 신도들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 자료에는 1927~1928년 시기 경북 지역 8개 유사종교단체를 소개한 내용이 있는데, 이 가운데 경북 경찰이 가장 주의와 단속을 해야 할 단체로 보천교·무극도·천도교 등 3개 단체를 지목하고 있다. 『고등경찰요사』는 경북 지역 내의 고등계 형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자료를 정리하고 편찬하여 관내 경찰서에 비치시킨 대외 극비문서였다. 특히 경북 지역에만 유일하게 발간되었는데, 이는 전국에서 경북이 조선총독부가 감시대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무극도 측에서 보면, 경북 지역에서 신도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31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신도들이 분포되어 있던 지역은 경북·경남·강원·전북·충북·충남·경기·평남 등으로, 이 가운데 특히 경북과 경남 지역에 신도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경북은 안동·봉화·김천 등 도내 여러 지역에 걸쳐서, 경남은 밀양·부산 등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강원 지역은 『무극대도교개황』에 의하면 지방직원이 경상도 지역 다음으로 많고, 《조선일보》 1928년 기사에 그 지역 신도 수가 3만 명 정도 언급된 것으로 보아 경상도 지역 다음으로 신도가 많았던 것 같다. 무극도장이 있던 전북은 『무극대도교개황』에 간부들만 소수 보이고 다른 자료에서는 관련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경상도·강원 지역보다는 신도 규모가 작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 충북·충남·경기·평남 등의 지역은 지부가 있었다는 기록 혹은 소수의 신도 수만 파악되는 것으로 보아 신도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무리하며 

  이번 연구를 통해 무극도 창도 시기 신도가 최소한 67,000명의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1915년 이후 우리나라 민족종교가 유사종교단체로 구분되어 일제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 신도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도들이 분포되어 있던 곳은 당시 우리나라 13개 도 가운데 경북·경남·강원·전북·충북·충남·경기·평남 등 8개 지역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경북과 경남 지역에 특히 많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경상도 지역에 신도들이 특히 많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자료가 충분치 않은 관계로 살펴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무극도의 포덕 활동이 연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볼 때, 경상도에 도주님의 친가와 외가가 있었던 점이 그 요인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가 더 진행되길 바란다. 그런데도 이번 연구 결과는 우리 종단 역사의 시작점인 무극도 창도 시기의 신도 규모와 지역 분포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신도 규모는 당시 무극도의 간부 명단을 토대로 산출한 결과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01 『무극대도교개황』은 1925년 전라북도 도청에서 작성된 문건이다. 이 문서는 전반부에 일본어로 기록된 무극도의 연혁ㆍ조직ㆍ주문ㆍ치성ㆍ간부씨명 등이 있고, 후반부에 한국어 및 한자로 기록된 강령과 도규, 무극도 취지서, 무극도 간부 일람표 등이 있다. 이 중 전반부는 어투나 기록된 사실의 부정확성으로 볼 때 탐문 및 정보원에 의한 정보 수집을 통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반부 항목은 탐문만으로는 입수하기 어려운 내부 정보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무극도가 도청에 의무적으로 제출한 자료를 근거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반부 자료는 일부 사실이 부정확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보이지만, 후반부 자료는 1925년 전후 시기의 무극도 관련 사실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대순종교문화연구소에서 작성한 “《무극대도교개황》 번역에 붙이는 말” 내용 참고. 

02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유사종교』, 최길성ㆍ장상언 공역, 계명대학교출판부, 1991, 원래 『조선의 유사종교』는 조선총독부의 촉탁인 무라야마 지준이 1935년에 쓴 자료이다.

03 일제강점기 지방경찰인 경상북도경찰부(현재의 경북지방경찰청 격)에서 고등계 형사가 꼭 읽어야 할 자료를 정리하고 편찬하여 관내의 각 경찰서에 비치하기 위해 1934년 발행한 『고등경찰요사』를 역주하여 2010년에 발행된 것이다.

04 본소직원의 ‘비고’란은 비어 있으나 지방직원의 ‘비고’란에는 직원 각자가 관리하는 신도 수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부분’ 인원수, 간부 임명 사항 등이 기재되어 있다.

05 ‘간부일람표’는 원래 본소직원 27명과 지방직원 127명의 명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직원 수를 모두 합치면 154명이지만, 이 중에 김용국ㆍ박병규 2명은 본소ㆍ지방 두 조직의 직책을 겸하고 있어서 실제로 명단에 기록된 간부 인원은 152명이다. 이것은 본소직원이 지방조직의 연운제 직책을 겸직할 수 있는 보직(補職)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신도 수 추정 방법이 지방직원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겸직한 두 명의 직원을 지방조직에 포함한다.

06 「대순진리회의 조직의 특성」에서는 무극도, 태극도, 대순진리회가 역사적 변천 속에서 조직의 세부사항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연속된 이 3개 교단 사이에는 조직 원리의 연속성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심은 ‘연운’이라고 밝히고 있다. 박상규, 「대순진리회의 조직의 특성」, 『한국 종교교단의 조직』, 경기: 한국학술정보(주), 2013, p.136 참고.

07 전라북도도청, 『무극대도교개황』, 일본학습원대학동양문화연구소소장(M2-87), 1925, p.22 참고.

08 전라북도도청, 같은 책, p.23 참고.

09 ‘간부일람표’에 기록된 간부 명단에는 당시에 실제로 활동했던 ‘부분’ 인원 명단이 적어도 510명이 빠져있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간부일람표’에 기록된 78명의 ‘연락’과 49명의 ‘부분’이 같은 연운 관계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신도 수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49명의 ‘부분’이 담당했던 신도 수는 고려하지 않았다.

10 교운 2장에서 무극도 창도 준비 시기에 언급된 도주님의 종도는 22명 정도 나온다. 여기서 12명은 ‘간부일람표’에도 나오는데 나머지 10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2명 대부분이 본소직원의 고위 간부이거나 지방조직의 ‘연락’의 직책을 맡고 있었던 것을 보았을 때, 나머지 10명 중 일부가 혹시 무극도 시기에도 도에 남아 있었다면 ‘연락’의 직책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11 무라야마 지준, 앞의 책, p.448 참고.

12 《동아일보》 1925년 7월 6일 3면.

13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CJA0001575, 1927년 6월 21일 참고.

14 《조선일보》 1928년 3월 3일 5면.

15 경기도ㆍ충청북도ㆍ충청남도ㆍ전라북도ㆍ전라남도ㆍ경상북도ㆍ경상남도ㆍ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남도ㆍ평안북도ㆍ함경남도ㆍ함경북도 등이다.

16 안면도의 이정률ㆍ이상우.

17 안동의 권태로, 봉화의 박붕래, 의성의 조원규ㆍ김장회, 예천의 이종창ㆍ신용흠, 김천의 김규옥ㆍ김규석, 풍기의 조진명, 청도의 장득원ㆍ박동락, 청송의 조호규 등 12명이다.

18 밀양의 이우형ㆍ김용국ㆍ최창근ㆍ김병문ㆍ안병문ㆍ박민곤, 부산의 박민곤, 함안의 배문걸 등 8명이다.

19 교운 2장과 일람표에 동시에 나오는 12명의 종도는 밀양의 이우형ㆍ김용국ㆍ최창근ㆍ김병문, 안동의 권태로, 청도의 장득원ㆍ박동락, 봉화의 박붕래, 의성의 김장회, 예천의 김규옥ㆍ신용흠, 풍기의 조진명 등이다.

20 전라북도도청, 앞의 책, p.8 참고.

21 전라북도도청, 앞의 책, p.37~52 참고.

22 1927년도에 남자 230명, 여자 30명 총 260명이다.

23 1930년도에 남자 2명, 여자 0명 총 2명이다.

24 1931년도에 남자 159명, 여자 4명 총 163명이다.

25 무라야마 지준, 앞의 책, pp.531~585 참고.

26 「무극으로 통일천하」, 《동아일보》 1925년 2월 25일.

27 《동아일보》 1925년 7월 6일 2면.

28 《동아일보》 1925년 7월 10일 6면.

29 박상규, 앞의 글, 2013. pp.144-148; 박인규, 『일제강점기 증산계 종교운동 연구』(서울대 박사논문, 2019), pp.179~183 참고.

30 《조선일보》 1926년 3월 14일 2면, 《조선일보》 1926년 3월 31일 2면, 《조선일보》 1926년 7월 1일 2면, 《조선일보》 1928년 3월 3일 5면.

31 류시중ㆍ박병원ㆍ김희곤, 『국역고등경찰요사』, 한성인쇄, 2010, pp.154~15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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