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도주님의 봉천명(奉天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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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24 조회5,526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 (교운 2장 4절)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교운 2장 5절)
『전경』의 교운 2장 4절과 5절은 도주님께서 이국땅인 만주로 가셨으며, 또 그곳에서 입산 공부를 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주님께서 가셨던 곳은 만주의 어디인가? 그리고 구세제민을 위해 입산 공부를 하신 곳은 또 어디인가? 이번 호에서는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01 글을 시작하기 전에, 설명을 위해 사용된 이 글의 모든 지도들은 위쪽 방향이 정북(正北)으로 되어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1> 만주의 봉천지방
『대순진리회요람』은 도주님께서 만주로 가셨던 사실, 그리고 입산 공부를 하셨던 사실을 이렇게 기술해두고 있다.
一九○九년(기유년(己酉年) 十五세시(歲時)) 四월에 부조전래(父祖傳來)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으신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께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결정단계(決定段階)에 있음을 개탄(慨嘆)하시고 부친(父親) 숙부(叔父) 등(等)과 같이 만주(滿洲) 봉천지방(奉天地方)으로 망명(亡命)하시어 동지(同志)들과 구국운동(救國運動)에 활약(活躍)하시다가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救國濟世)할 뜻을 정(定)하시고 입산(入山) 공부(工夫)를 하시다.02
이에 따르면 도주님께서 가셨던 곳은 만주의 봉천지방이다. 만주는 중국의 동북 3성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금은 동북 3성이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이지만, 도주님께서 가셨던 당시에는 봉천성·길림성·흑룡강성이었다. 이들의 전체 면적은 한반도 면적의 약 3.5배 이상에 육박할 정도로 넓다.03 도주님께서 머무셨던 곳은 이 너른 만주 가운데서도 봉천지방, 즉 봉천성(奉天省)이다.(<그림 1> 참조) 봉천성의 성도(省都)인 봉천(奉天)은 지금의 심양(瀋陽)으로서 청나라의 뿌리이자 심장에 해당하는 곳이다. 봉천지방 역시 한반도에 필적할 정도로 광범위한 지역인데, 그렇다면 도주님께서 계셨던 곳은 이 봉천지방 중에서도 어디인가?
2> 봉천성 유하현의 수둔구, 수툰거우
도주님(부친 趙鏞模: 1877年生)께서 만주로 망명하실 때는 도주님의 숙부들인 조용의(趙鏞懿: 1880年生)와 조용서(趙鏞瑞, 1891年生)도 같이 가셨다. 도주님의 자제분들과 숙부들 집안에서 전해지는 전언에 따르면, 도주님께서 1909년부터 1917년까지 9년을 머무셨던 곳은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의 ‘수둔구’ 또는 ‘수툰거우’이며,05 입산 공부하셨던 산은 ‘노고산’이라고 한다. 수둔구와 노고산을 한문으로 각각 ‘水屯溝’와 ‘老姑山’으로 표기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명확한 사실과 기억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다. 도주님 친족들 역시 한문 지명을 기억하고 있진 않으며 단순히 발음으로만 이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극도 해산 이후 만주로 이주한 친족들이 1910년대 정착하셨던 곳에 다시 정착했는지 확인할 수 없고 1960년대 이후에는 다른 곳에 사셨던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이 분들의 전언 역시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정확하게 확인되는 것은 봉천성 유하현이 도주님 일가가 망명기간에 머물렀던 곳이라는 사실뿐이다.
현재 유하현은 중국의 길림성 지역이다. 백두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산줄기들이 뻗쳐 있어서 산과 구릉이 많은 유하현은 해발 400∼1,000m 사이를 오가는 고지대이다. 이곳은 1902년에 통화현에서 분리되어 성경성(盛京省) 해룡부(海龍府) 내의 현(縣)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성경성이 봉천성으로 바뀌면서 봉천성 해룡부(海龍府)에 속하게 되었고, 1909년에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에, 다시 1913년에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에 소속되었다가 1920년부터는 봉천성 직속으로 바뀌게 된다. 1937년∼1945년까지는 새로 설치된 통화성(通化省) 소속이었고, 1945년∼1948년까지는 안동성(安東省), 1949년∼1954년까지는 요동성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길림성에 소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06 정리하자면, 유하현이 지금은 길림성이지만 도주님께서 계셨던 때를 전후하여 1936년까지는 봉천성이었다는 말이다.
봉천성의 유하현은 지명 확인이 되는데, 도주님 친족들이 증언하는 ‘수둔구’, ‘수툰거우’와 ‘노고산’은 유하현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다. 특히 친족들의 전언을 기초로 하여 근거가 불명확한 채 주장되어지고 있는 水屯溝(수둔구), 老姑山(노고산) 등의 한문 지명은 각종 지도나 기록물들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의 현지인들, 그러니까 19세기 말부터 유하현에 정착했던 한민족(韓民族)의 후예들인 유하현 조선족 노인협회 사람들07과 현지 공무원들08, 중국인 향토사학자 및 그곳 거주민들은 모두 그 지역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들어본 적조차 없다고 말한다. 몇 해 전 도주님의 친족들도 水屯溝(수둔구)와 老姑山(노고산)을 찾으러 유하현 현지에 갔지만, 그러한 장소들이 실제로는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09
현지 사정에 정통한 이들은 水屯溝(수둔구, 수툰거우)라는 곳이 유하현에 없을 뿐더러, 그러한 지명은 존재하기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왜냐하면 ‘둔(屯)’은 사람이 거주하는 행정구역을 표시하는 단위이고, ‘구(溝)’는 강줄기나 골짜기 같은 자연지역에 붙이는 단위이기에, ‘둔(屯)’과 ‘구(溝)’를 붙여서 ‘둔구(屯溝)’라는 지명을 만드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 실제로 유하현 전체를 뒤져보면, 계곡 부근의 마을을 ‘○○구둔(溝屯)’이라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지만 ‘○○둔구(屯溝)’라고 하는 사례는 없다.
대개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나 지역을 ‘○○골[谷]’로 부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식 지명 표기법인 ‘둔’과 ‘구’가 포함된 ‘수둔구’라는 명칭은 당시 그곳에 살았던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는 상관이 없이 자신들의 마을을 독자적으로 부를 때 사용했던 이름으로도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수둔구, 수툰거우, 노고산이라는 지명은 정확한 이름이 분명하게 기억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 발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변이된 것으로 판단된다. 水屯溝, 老姑山이라는 한문 표기 역시 수둔구, 수툰거우, 노고산이라는 전승에 따라 후에 그 한문이 추정되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20세기 초엽, 그러니까 도주님께서 봉천지방에 계실 때, ‘수퉁거우[水通溝]’ 혹은 ‘수둥거우[水洞溝]’라고 하여 도주님의 친족들이 기억하는 지명인 ‘수둔구’, ‘수툰거우’와 비슷하게 불렸던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라통산(羅通山)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수동촌(水洞村)이다.(<그림 3> 참조)
3> 유하현의 수동촌(水洞村)
유하현 조선족 노인협회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곳에서 거주하는 지역민들은 한결같이, 수둔구(水屯溝) 그러니까 ‘수툰거우’라는 마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유하현 내에서 ‘수퉁거우’ 또는 ‘수둥거우’라고 하여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마을은 있다고 말한다. 라통산(羅通山) 아랫마을인 수동촌(水洞村)이 바로 그곳인데, 도주님 친족들의 전언 즉 유하현 경내에서 ‘수툰거우’와 유사한 발음으로 불렸던 유일한 마을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인 고점일(高占一, 76세)로부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에 따르면 원래 이 마을과 주변 골짜기는 수통하(水通河)라는 하천이 관통하여 흐른다고 해서 ‘수퉁거우[水通溝]’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20세 초엽 마을 뒤의 라통산에 큰 동굴[水帘洞]이 발견되었고 바로 그 동굴[洞]에서 물이 흘러나온다고 해서 ‘수퉁거우’를 ‘수둥거우[水洞溝]’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30년과 1940년대의 이 지역 지도에는 그 지명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그림 4>와 <그림 5> 참조) 그 후 중국정부가 마을 이름을 ‘촌’으로 정하도록 하면서부터 ‘수둥거우’는 수동촌(水洞村)으로 표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수퉁거우[水通溝]/수둥거우[水洞溝]’는 ‘수둔구/수툰거우’와 발음이 유사함은 물론이다.
수둥거우, 즉 수동촌 마을 앞에는 수동 저수지[水洞水庫]가 있다. 이 저수지는 1958년에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든 것인데, 고점일에 따르면 원래 그 자리에는 구한말에 이주해왔던 한국인들의 작은 움막들이 있었고, 그 인근에 한국인 부락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 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사를 다 나가서 현재는 한국인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20세기 전반기에 이 주변에 한국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현지 중국인들은 지금도 수동 저수지를 ‘고려댐’, 수동촌 마을 앞길을 ‘고려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봉천성 유하현 경내에서는 유일하게 수동촌이 ‘수퉁거우’, ‘수둥거우’라고 하여 도주님 친족들이 증언하는 ‘수둔구’, ‘수툰거우’와 발음이 유사하며, 또 20세기를 전후로 한국인들이 이주하였다는 점에서, 이 마을을 도주님께서 9년을 머무르셨던 우력한 후보지로 비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림 6> 수동촌의 현재 모습. 수동촌 앞에 수동 저수지가 있다. 뒤에 보이는 산이 라통산이다.
1980년대 도주님 친족들로부터 수풍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었다고 전해졌기에 정착한 곳의 후보지로 수몰된 곳을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풍댐은 유하현에서 직선거리로 200㎞가 넘게 멀리 떨어진 곳인 압록강 하류에 있고, 유하현에는 압록강이나 그 지류가 흐르지 않으므로 마을이 수풍댐으로 수몰되었을 리는 없다. 따라서 마을이 수몰되었다는 전언에 대해서는 그 사실관계에 대한 보다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수동촌의 움막과 농토 일부가 수둥수구의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고, 도주님의 친족들은 도주님 망명지가 수풍댐 건설로 수몰되었다고 전했는데 그 수풍댐의 중국식 명칭이 ‘수펑수구’로 수둥수구와 그 발음이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은, 수동촌이 도주님의 망명지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할 것이다.
▲ <그림 7> 수동 저수지 앞으로는 옥수수가 재배되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수동촌은 유하현 행정 소재지 중심에서 동북동(東北東) 방향으로 직선거리 약 2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도주님께서 가셨던 1909년 무렵의 행정지명은 봉천성(奉天省)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수통구(水通溝: 수퉁거우, 水洞溝: 수둥거우)였고, 지금의 행정지명은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유하현(柳河县) 라통산진(罗通山镇) 수동촌(水洞村)이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에 있다. 마을 뒤(북쪽)로는 해발 1,090m의 라통산[羅通山, 로퉁샨], 만주어로는 ‘러컬’이라는 이름의 산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마을 앞(남쪽)으로는 유하현에서 가장 큰 강인 삼통하(三統河, 또는 三通河라고 함)가 동북으로 흘러 송화강(松花江)으로 나아간다.11 유하현을 관통하는 ‘삼통하’의 삼통은 ‘삼을 통할(統轄)한다’, ‘삼을 통(通)한다’는 뜻인데, 삼(三)이 상징하는 것이 천지인 곧 우주이니, 그 명칭은 사뭇 의미가 심장하다. 라통산은 백두산의 한 갈래인 북룡강(北龍崗)산맥에서 가장 신령스럽고 풍광이 뛰어난 산으로 알려져 있어서 1991년에 국가보존지역으로 선포되었고, 2007년부터 관광지로 개발되어 오고 있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낙타산(駱駝山)인데,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여서 3세기 무렵에 고구려의 절노부(絶奴部)12가 이 산 정상에 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성은 산의 동쪽 정상과 서쪽 정상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당나라 장군인 라통(羅通)13이 이곳을 점령하여 군사를 주둔시키고 진을 세우면서 라통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4 그 명칭의 유래가 사람 이름이긴 하지만, 그 의미가 펼 라(羅), 통할 통(通)으로 ‘통함을 편다’는 것임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특이한 것은 라통산의 서쪽 성 즉 서성(西城) 지역에 용담(龍潭)이라는 이름의 상당히 큰 연못이 있다는 점이다. 이 연못은 고구려가 성을 축조하던 1,800여 년 전부터 이미 있던 것이라고 하는데, 산의 정상에 이렇게 거대한 연못이 있다는 것은 자못 신비로운 일이다. 이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고점일은 용담에 깃든 전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이 지역에는 홍수가 범람해서 사람들이 살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옥황상제께서 용신(龍神)을 파견해서 물길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려 용이 여기에 내려왔어요. 용은 물길을 내다보니 힘이 너무 들었고 그래서 도망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옥황상제께서 달아나는 용을 붙들어다가 여기에 가두었죠. 그 후로 여기에 물이 고여 연못이 생기고 홍수도 범람하지 않아 사람들도 살기 편하게 되었습니다. 또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연못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이 연못을 용담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여기에 용이 있기 때문에 라통산이 그리 높지 않고 물도 깊지 않지만 영성(靈性)이 있어요. 그러다가 광서년간(1875∼1908)에 그 용을 쇠사슬로 묶었다고 해요. 그 쇠사슬은 철로 만들어졌는데 아주 컸고 녹도 슬지 않았습니다. 내(고점일)가 어렸을 때 학교 선생님과 종종 라통산에 올라가서 용담에서 그 쇠사슬을 잡아당기곤 했지요. 1981년 즈음인가 그 쇠사슬이 땅에 파묻혀 지금은 볼 수가 없어요.”
▲ <그림 10> 라통산 정상의 서쪽 성에 있는 용담(龍潭)의 모습
이 용담의 물은 아래로 흘러 수렴동으로 이어진다. 수렴동은 길이가 3㎞가 넘는 거대한 동굴인데 청나라 말 민국 초기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 안에는 상당한 양의 물이 흐르고 높이가 20m가 넘는 폭포도 있다. 또한 동굴 입구의 암벽 위에서는 물이 폭포처럼 떨어져 ‘수렴(水簾: 물이 발처럼 떨어져 내림)’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동굴 이름을 수렴동(水帘洞)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수렴동의 물은 아래로 흘러 수동촌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용담의 물이 흘러 수렴동을 거쳐 수동촌을 가로지르며 수통하(水通河)를 이루고, 그것이 삼통하와 합류하여 북쪽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눈에 띄는 점은 이 동굴 안에 또 다른 작은 자연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의 이름이 현무동(玄武洞)이라는 것이다. 현무동 안에는 거북과 꼭 닮은 바위가 허공에 떠 있는 듯 걸려있고, 현무동 위에도 거북 모양의 큰 바위가 있다. 지난번에 밝혔듯이,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경상도 회문리 마을은 그 지세가 대구의 연귀산(連龜山)에서 출발하여 구미산(龜尾山)에서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것은 현무경[龜]으로 함축되는 상제님의 도를 이어서[連] 구미(龜尾), 즉 그 도[龜]의 대미(大尾)인 진법을 도주님께서는 세우신다는 의미인데,15 종통을 상징하는 바로 그 현무가 수동촌 뒤에도 숨겨져 있는 것이다.
도주님과 가족들이 1909년부터 1917년까지 9년을 보내셨을 가능성이 높은 마을의 뒷산이 용의 전설과 용담, 그리고 현무가 숨겨져 있는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닌 듯하다.
▲ <그림 13> 수렴동 입구. 좌측에 동굴의 입구가 있으며, 암벽 위에서 물이 폭포처럼 떨어져 수렴처럼 보였다고 한다.
4> 시가점 저수지와 화평 저수지
유하현 북쪽에 자리를 잡은 수동촌이 도주님께서 계셨던 마을일 가능성이 높지만, 수둔구나 수툰거우라는 지명이 여러 가지 이유로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 지명이 사라졌다면, 아마도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저수지 건설 사업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 만주로 이주하였던 친족들로부터 마을이 수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명칭이 저수지 건설 이전까지는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기에, 만약 사라졌다면 수몰 이외의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유하현 내에서 저수지 건설로 그 지명이 완전히 없어지게 할 정도의 규모를 가진 곳은 <그림 3>에 표시되어 있는 시가점 저수지[时家店水库]와 화평 저수지[和平水库] 정도이다.
먼저 시가점 저수지부터 살펴보자. 이 저수지는 1958년∼1963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1930년에 만들어진 유하현 지도를 살펴보면(<그림 14> 참조), 장경촌(長慶村)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16과 녹미파림(鹿尾巴林) 북쪽을 지나는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오늘날의 시가점 저수지 자리에 해당한다. 또 유하현이 통화성에 소속되어 있었던 1937년∼1945년 사이의 통화성 지도를 보면(<그림 15> 참조), 소통구(小通溝) 남쪽의 녹미파림(鹿尾巴林) 부근이 현재의 시가점 저수지 자리이고, 1956년에 미 육군 공병대가 제작한 유하현 지도에서는(<그림 16> 참조) 소통구(小通沟) 남쪽에서 발원된 하천과 란시강(乱柴岗) 북쪽의 하천이 합류되는 지점, 즉 녹미파림[鹿尾巴林, Lu-wei-pa-lin] 부근 지역이 시가점 저수지 자리이다. 종합하자면, 시가점 저수지는 소통구(小通溝) 남쪽의 장경촌(長慶村)과 녹미파림(鹿尾巴林) 부근의 하천 합류지점의 저지대를 수몰하여 만든 저수지이다.
1930년, 1937년∼1945년, 1956년의 지도들에서 이 지역은 공통적으로 녹미파림[鹿尾巴林, Lu-wei-pa-lin]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현 시가점 저수지 지역은 과거 ‘수둔구’ 또는 ‘수툰거우’라고 불렸던 장소가 아닌 것이다. 시가점 저수지 주변에 소통구(小通溝)가 있기는 하지만 그 지명은 ‘샤오퉁거우’로 발음되고, 사람이 거주하는 마을도 아니며, 수몰된 지역과도 5㎞나 멀리 떨어져 있다. 현재의 시가점 저수지 주변 지도를 봐도 매요보촌(媒窑堡村), 농안촌(农安村), 등가점(邓家店), 시가점(时家店), 호가촌(胡家村), 영승촌(永胜村) 등의 이름만 보일 뿐(<그림 17> 참조) ‘수툰거우’와 비슷하게 불렸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음으로 화평 저수지를 살펴보자. 이 저수지는 1958년∼1973년 사이에 농업용수 확보 및 홍수 예방을 위해 습지를 수몰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37년∼1945년 동안 존속했던 통화성의 지도(<그림 18>)와 1956년에 미 육군 공병대가 제작한 유하현 지도를 보면(<그림 19>), 화평 저수지 자리 주변에 있었던 마을은 유가가(由家街), 즉 유가촌(由家村)이다. 또 최근의 지도를 보면(<그림 20>), 화평 저수지 주변의 마을들은 홍석촌(紅石村), 구가가(邱家街), 주가구(朱家沟), 유가촌(由家村), 화평촌(和平村), 대화사(大花斜)로 나타난다. 현재 구가가에 사는 지역 주민들은 화평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구가가 마을이 화평 저수지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증언한다. 그러니까 화평 저수지는 구가가 일부를 수몰하여 만든 저수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평 저수지 지역 역시 과거에 ‘수둔구’, ‘수툰거우’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려졌던 적이 없는 곳이다.
규모가 작아서 그 지역의 지명으로 그 명칭이 정해져 있는, 유하현의 다른 60여 개의 소규모 저수지를 살펴보아도, ‘수둔’이나 ‘수툰’과 유사한 명칭을 지닌 것은 수동촌의 수동저수지[水洞水庫: 수둥수구]가 유일하다.17 따라서 수둔구나 수투거우라는 지명이 현재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그 지역이 수몰되어서 지명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마을이 수몰되었다는 전언만으로 화평 저수지와 시가점 저수지 지역을 단순히 도주님께서 정착하셨던 곳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본다면, 도주님 친족들이 화평 저수지나 시가점 저수지처럼 유하현의 남부나 중부에 자리를 잡으셨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유하현 남부와 중부는 북부와 달리 이미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도주님 친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주님 가족들은 만주에 정착할 때 상당한 양의 토지를 확보하여 논밭으로 일구어 경작하였고, 그것이 뒤이어 따라 들어온 다른 이주 한국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즉, 도주님 가족들은 한국인들이 망명해 와서 자리를 잡고 이미 건설해놓았던 마을에 들어가신 게 아니라, 새로이 한국인 마을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화평 저수지와 그 인근,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유하현 남부 지역은 도주님께서 망명하시기 이전에 상당한 수의 한국인들이 이미 이주해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18 특히 유하현 남쪽의 화평 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삼원포 지역(<그림 3> 참조)에는 1907년에 큰 규모의 한국인 마을이 조성되었을 정도였다.19 또 유하현 중부 지역은, 뒤에 기술하겠지만 유하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번화가여서 삶의 터전을 새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결국 1909년과 그 이후에 유하현으로 이주해오는 한국인들은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하현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1909년 봄에 유하현으로 오신 도주님과 가족들은 유하현 남부나 중부가 아니라 북부에 자리를 잡으셨을 가능성이 높다.
도주님께서 머무셨던 곳이 유하현 남부나 중부가 아닐 것으로 생각되는 또 다른 이유는 도적떼 습격 사건 때문이다. 1913년에 유하현에는 유대개자(劉大個子)라는 도적 두목이 300여 명을 이끌고 유하현을 습격하여 경찰[警甲兵] 25명과 상인 40여 명 등 사람들을 무차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20 이들은 고산자(孤山子), 삼원포(三源浦) 등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던 유하현 중부와 남부지방 거의 전체를 휩쓸고 약탈하였는데, 이때 삼원포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李恩淑)도 이들의 총에 맞아 큰 부상을 당하였다고 한다.21 이은숙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이회영의 집안은 유하현 최고 책임자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을 정도로 그 지방에서 명망이 높았는데,22 그런 집까지 피해를 입을 정도로 1913년의 도적떼 사건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주님 친족들의 증언에는 도주님 가족들이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1913년 당시 도주님 가족들은 상당한 양의 토지를 성공적으로 경작하고 있었고, 또 도주님 가족들의 성공에 힘입어 그 주변에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모여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주님 가족들과 그 주변 한국인들은 이웃 중국인과 만족들의 시샘을 받을 정도로 풍족한 식량을 가지고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당연히 도적떼들의 주 약탈 대상이 되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들의 침입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 거주지가 유하현 중부와 남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방증해준다고 할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해서 도주님 가족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은 유하현 북쪽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특히 유하현 북쪽에서도 수동촌[수퉁거우, 수둥거우]이 도주님 친족들의 전언, 즉 ‘수둔구’, ‘수툰거우’라는 지명과 한국인 정착지라는 두 개의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5> 고산자진의 대고산과 삼원포의 대고산
다음으로 도주님께서 입산 공부하셨던 곳에 대해 살펴보자. 도주님 친족들에 따르면, 그 공부처는 노고산 안에 있었다고 한다. 집안의 장남인 까닭으로 1911년경에 배필을 맞이하여 혼인을 하셨고, 또한 집안의 대소사와 입산 공부 시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 때문이라도 도주님께서는 공부를 하시다가도 틈틈이 하산하여 집에 내왕하시거나, 가족들이 도주님께 간혹 가셨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이로 미루어보면 도주님께서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조용한 산 속에서 공부를 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 <그림 21> 고산자진에 있는 대고산(노고산)의 모습
일설에는 노고산에 관성제군을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당시의 만주지역 종교 문화로 볼 때 독립적으로 관왕묘만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기에 관왕묘와 관련된 주장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당시에는 신령스러운 산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도교 사원인 도관(道觀)이 존재했고 이 도관 내에는 대부분 관성제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으므로, 노고산의 관왕묘와 관련된 이야기는 도주님이 입산 공부하신 산에도 도관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참고 자료로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노고산(老姑山) 역시 글자 그대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 지명이다. 따라서 ‘수둔구’, ‘수툰거우’와 마찬가지로 노고산 역시 그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산을 찾아야 한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유하현에는 노고산(老姑山: 라오구샨)은 없지만 동일한 발음인 ‘라오구샨’[老孤山]으로 불리기도 하는 산이 있으니, 그것은 고산자진(孤山子镇)의 대고산이다.
▲ <그림 23> 고산자진의 대고산(노고산)에 있는 관왕묘 터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대고산(大孤山) 또는 고산(孤山)이다. 너른 평야 한 가운데 외로이 서있는 산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부근의 작은 산이 소고산(小孤山), 조금 큰 산이 대고산(大孤山)이다. 중국에서 대(大)와 노(老)는 서로 뜻이 통하는 말이기에 현지 중국인들은 이 산을 노고산(老孤山)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고(孤)와 고(姑)는 발음이 같아서 이름만 놓고 보면 노고산(老姑山)은 이 산일 가능성이 있다. 또 과거 이 산에는 도관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옥수수 밭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래도 이 산에 도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공부처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러나 이 산을 도주님의 입산 공부처로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고산자진에는 수둔구나 수툰거우와 유사한 지명이 전혀 없고, 그 산이 인구가 밀집한 고산자진의 한 중심에 있다는 것 때문이다. 유하현의 중부에 위치한 고산자진은, 그 당시에 9개 현과 5개 성이 교역하는 길목이라고 할 정도의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내왕이 잦고 복잡한 곳이었다. 그래서 도주님께서 계시던 때인 1910년대에는 심양(당시에는 봉천이었다)에 버금갈 정도로 번화한 곳이라고 하여 소봉천(小奉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23 최근에도 장날마다 1만여 명이 모일 정도로 인구가 밀집되는 곳인데,24 <그림 22>에서 보듯이 바로 이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산이 대고산 즉 노고산이다. 지금은 인구가 많이 줄어들어 가옥들이 드문드문 있으나, 당시에는 이 노고산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었다. 따라서 도주님께서 인구 밀집 지역인 이 곳까지 오셔서 사방이 사람으로 들끓는 작은 야산에서 공부를 하셨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하현 남쪽의 삼원포(三源浦) 서쪽의 대고산(大孤山) 또한 고산자의 대고산과 명칭이 동일하기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원포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고산자진과 더불어 사람들의 내왕이 잦은 곳이다. 여기에도 평야 가운데 두 개의 산이 외롭게 서 있으니, 큰 산이 대고산이고 작은 산이 소고산으로서 고산자진의 소고산, 대고산과 동일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상고산자(上孤山子)라고도 했다. 고산자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대고산(大孤山)을 노고산(老孤山)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주장도 간혹 있지만, 대다수의 현지 지역민들은 이곳을 노고산으로 부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또 이 대고산에는 도관이 존재했던 적이 없으며, 1960년대 이후에 산 서남쪽에 채석장이 개발되자 그곳에 안전을 기원하는 작은 제단이 하나 마련되었고 채석장의 기능이 다한 지금은 소멸되었다고 한다.
이곳 역시 도주님의 공부처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신흥강습소 때문이다. 당시 만주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단체들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이 신흥강습소와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 서전서숙, 명동서숙과 명동학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등이었다.25 이 중 신흥강습소가 세워졌던 곳이 바로 삼원포의 대고산 밑이었다. 삼원포는 망명해 온 한국인들의 수가 제법 많은 곳이었는데, 이상룡과 이회영 등이 1911년 4월에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해 와서 토지 개간과 민생문제,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학사를 결성하고 대고산 아래에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강습소(講習所) 즉 학문을 익히는 곳이라는 뜻의 간판을 내다걸었지만, 실제로는 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26 경제적 어려움으로 1911년 가을에 경학사는 해체되었지만 신흥강습소는 꾸준히 존속하였고, 1913년 5월에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전되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된다. 이 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8월에 폐교되었으나, 그때까지 배출된 약 3500여 명의 졸업생들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다.27
이상룡, 이회영 등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창설할 때 눈에 띄는 사실은, 이들이 1911년 4월에 삼원포의 대고산에서 노천대회를 열었고, 한 달 후에 그 대고산 아랫마을인 추지가(鄒之街: 지금의 鄒家村)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를 세웠으며,28 그때부터 1913년 봄까지 만 2년간에 걸쳐 신흥강습소에서 항일을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흥강습소 바로 옆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대고산도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신흥강습소가 1911년 봄에서 1913년 봄까지 만 2년간 실시한 군사훈련 기간은 도주님께서 이미 입산 공부에 들어가셨던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도주님께서 언제부터 입산 공부를 시작하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경술(1910)년 이듬해인 1911년에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의 혐의로29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후에 구세제민의 큰 뜻을 품고 입산 공부를 시작하셨다는 교운 2장 5절의 기록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1911년 또는 1912년부터가 입산 공부를 시작하신 때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도주님께서 유하현에 정착하신 그 다음 해인 1910년 겨울에 유하현에 흑사병이 돌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1911년에도 역시 흑사병이 돌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으며, 1911년 한여름에는 눈비가 내리고 기온이 급강하하는 기상이변까지 일어났던30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동양의 평화가 크게 위협받는 정치적 불안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과 자연재해까지 겹쳐 사람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다주고 있었던 상황은, 도주님께서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하실 뜻을 더욱 굳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원포의 대고산을 도주님의 입산 공부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주변에도 수둔구, 수툰거우와 유사한 지명이 전혀 없어 공부처였을 가능성이 희박하기도 하지만, 이 아담한 산 자체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아니라 노천대회를 열고 사람들이 종종 모이고 들락날락하는 열린 공간이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군사훈련을 하는 강습소 바로 옆이었기에, 여기에서 공부를 하셨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림 26> 삼원포의 대고산(노고산)과 신흥강습소 터. 현재 신흥강습소 자리에는 벽돌과 기와 공장이 서 있다.
요약하자면, 도주님의 친족들은 도주님께서 입산 공부를 하신 곳이 노고산(老姑山)이라고 전하고 있다. 유하현에는 노고산(老姑山)이 없지만 노고산(老孤山)이라고도 불리거나 불리웠을 수 있는 곳은 고산자진의 대고산과 삼원포의 대고산 두 군데가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둔구, 수툰거우로 불리거나 이와 유사한 지명이 없어서 정황상 공부처로 보기에는 어렵다. 더구나 고산자진의 대고산은 복잡한 번화가 한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야산이고, 삼원포의 대고산 역시 작은 야산이면서 사람들이 종종 모이고 쉽게 들락날락하는 열린 공간이었던 데다가 1911년부터 1913년 봄까지 항일무장 투쟁을 위한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기까지 한 곳이었기 때문에, 둘 모두 공부처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그렇다면 도주님께서 입산 공부를 하신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도주님께서 거주하셨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을인 수둥거우의 뒷산 라통산[로퉁샨, 러컬샨]이 공부처가 아닐까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라통산은 유하현 일대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고, 도주님의 거주지에서 가까우며, 번화하거나 번잡스럽지도 않은 곳이다. 이 산 정상에 용담이 있다는 점이나 동굴 입구의 절벽에 폭포처럼 수렴이 흐르는 수렴동이 있다는 점, 수렴동 안에 현무가 감춰져 있다는 점은 이곳이 공부처일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전경』에는 ‘慶州龍潭報恩神’,31 ‘醫統 慶州龍潭’32이라는 구절이 나오고, 또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연원도통(淵源道通)을 떠올려본다면, 용담은 도주님을 연상시켜 보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대순성전에 모셔져 있는 대순성적도(大巡聖蹟圖)에서 도주님의 입산 공부를 묘사한 장면을 보면, 거기에는 깊은 산중에 바위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그림 27> 참조) 물론 이 모습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그 이미지가 물이 폭포로 흘러내리는 라통산 수렴동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고산자진의 대고산과 삼원포의 대고산에는 흐르는 물과 폭포가 없기에, 그곳들은 도주님께서 입산 공부하시는 모습을 나타낸 대순성적도의 그 장면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지적해 둘 만한 사실이다.
도주님의 공부처 근처에 도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라통산이 공부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라통산의 도관은 고산자진에 있었던 도관을 포함하여 유하현 전체 도관들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라통산에는 원시천존·영보천존·도덕천존을 모신 삼청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관성제군을 모신 재신전(財神殿)이 있었는데, 통상 이 셋을 합쳐 삼청궁(三淸宮)이라고 부른다. 향토사학자 고점일에 따르면, 홍수나 가뭄 때문에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이 도관이 만들어졌는데 기우제를 올릴 때는 먼저 용담에 가서 빌은 연후에 도관에서 행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고산자진 등 유하현 각 지역에 분묘들이 퍼져 나갔고, 그 구조는 총본산인 라통산과 마찬가지로 삼청전·관음전·재신전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유하현의 도관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총본산이었던 라통산의 삼청전·관음전·재신전만 1993년에 복원되어 있다.
▲ <그림 28> 라통산 삼청궁 안의 재신전에 모셔져 있는 관성제군의 모습
만약 라통산이 도주님의 공부처라면, 입산 공부하신 곳이 노고산이었다는 전승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라통산을 이 지역의 원주민들인 만주족들은 ‘러컬샨’으로 불렀고 이 발음이 변이되어 ‘라구[老姑]’나 ‘노고’로 전해졌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백 년 전 그 지역에는 만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지명을 부를 때 지금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아니라 만주어나 당시의 지방 사투리로 발음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 특히 그곳이 만주 지역인 만큼 지명이 만주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고 지금도 동북 3성인 만주에는 만주식 지명이 중국어로 표기되어 많이 남아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라통산의 원래 이름인 만주어 ‘러컬샨’이 중국어로 오인되어 한국인의 귀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라구산, 즉 노고산으로 변이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둘째는 대고산이 당시 유하현에서 널리 알려진 산이었다는 점 때문에 와전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고산자진의 대고산과 삼원포의 대고산은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교통의 길목에 위치한 산이었다. 이 산이 유하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다는 점, 더구나 한 지점도 아니고 두 지점에서 동일한 산 이름[대고산]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는 점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에 그러니까 도주님께서 계시던 무렵에 유하현에서 ‘노고산’이라고 하면, 그 노고산은 고산자진의 대고산일 수도 삼원포의 대고산일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노고산은 특정한 어느 장소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유하현의 산’을 의미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하현에서 가장 영험한 산은 유하현 북부의 라통산이지만, 유하현의 인구가 북부가 아닌 남부와 중부에 밀집되어 있었고 교통의 요지 역시 남부와 중부였기에, 그곳을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이정표이자 유하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라통산이 아니라 대고산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유하현을 대표하는 산이 당시에는 대고산이었다는 점에서, 그 별칭인 노고산이 도주님의 공부처로 잘못 전해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향토사학자인 고점일의 추측인데, 노고산이 삼청궁이 있는 라통산을 별칭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노고(老姑)’는 산신(山神), 신선(神仙)을 의미하기 때문에 노고산은 산신이나 신선이 있는 곳, 즉 유하현에서 가장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산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그 산은 바로 라통산일 것이라는 게 그의 견해이다.33
▲ <그림 29> 라통산 서쪽 정상에 재건된 삼청궁 모습
▲ <그림 30> 삼청궁은 삼청전과 관음전, 재신전(관왕묘)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도주님께서 1909년부터 1917년까지 머무셨던 만주 봉천지방의 집과 마을, 그리고 입산 공부하셨던 장소를 추적하여 보았다. 이것만으로 그 장소들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자료를 발판으로 좀 더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어 도주님께서 9년간 머무셨던 만주 봉천지방의 마을과 입산 공부하셨던 곳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순회보>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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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종교문화연구소는 2006년부터 현지 답사 등을 통해 중국 유하현과 관련된 조사를 실시하여 지역민들과 향토 사학자의 증언, 그리고 현지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입수하였다. 최근 그 자료들을 종합 검토하고 2015년 9월과 11월 현지를 다시 답사한 끝에, 신빙성이 높은 장소들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02 『대순진리회요람』 (1969), pp.11-12.
03 한반도 면적은 약 22만㎢이고, 만주의 면적은 요녕성 14.6만㎢, 길림성 19.1만㎢, 흑룡강성 45.5㎢을 합쳐 약 79.2만㎢에 이른다.
04 고병철, 『일제하 재만 한인의 종교운동』 (서울: 국학자료원, 2009), p.35.
05 도주님의 부친과 함께 반일운동에 활약하셨던 도주님의 막내 숙부인 조용서(趙鏞瑞: 1891~?)는 무극대도에서 주선원(周旋元)의 직책을 맡아서 전교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무극대도 해산 후에는 만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손들을 통해 전해진 바에 따르면, 도주님 친족이 망명하여 정착하신 곳의 지명은 ‘수툰거우’라고 한다.
06 『柳河县志』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91), pp.35-36, p.76
07 2006년 12월에 인터뷰에 응해준 유하현 조선족 노인협회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단, 나이는 2006년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趙貞敏(81세), 吳時貞(81歲), 朴万卨(77세), 高英乾(77세), 朴瀅山(66세), 公賢春(60세).
08 2006년 12월에 인터뷰에 응해준 유하현 공무원들은 평생 그 지역에서 살았던 조선족으로서 유하현 수리국(水利局) 부국장인 車眞德(78세), 유하현 민족종교국 과장 崔永浩(53세)였다.
09 「도주님의 봉천명과 봉천 지명 이야기」, 《대순회보》 172호 (2015), pp.46-47.
10 최봉룡, 「만주의 역사적 지명 고증과 현지조사-조철제(趙哲濟)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민족연구』 3 (2007), pp.215-216 참조.
11 유하현은 동남과 서남이 높고 동북이 낮은 지세여서 대체로 강들이 이 방향으로 흐른다. 유하현의 주요 강들에는 일통하(一統河), 삼통하(三統河), 와집하(窩集河) 및 합니하(哈泥河)가 있고, 이 중 합니하만 남쪽의 압록강으로 흐르며 나머지 세 강은 동북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합류한다. 유하현에서 가장 큰 강은 일통하와 삼통하인데, 특히 삼통하는 유하현 서남부 청령(靑嶺: 650m)에서 발원하여 화평저수지를 거쳐 동북으로 길게 관통하여 수동촌을 지나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 (『柳河县志』, p.76, p.86)
12 고구려의 중요 정치집단체. 오부(五部) 가운데 하나이다. 계루부(桂婁部)·소노부(消奴部)와 함께 연맹체시대 고구려의 대세력을 이루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3 라통(羅通)은 라성(羅成)의 아들이다. 라성은 당나라 건국 공신이자 활과 창에 능한 이름난 무장인 라예(羅藝)의 아들이다. 라예의 부친인 라영(羅榮) 또한 수(隋)나라의 장군이었으니, 그의 집안은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14 바이두 백과사전, ‘羅通山’ 항목.
15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함안 회문리」, ≪대순회보≫ 171호 (2015), pp.22-35 참조.
16 지도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17 『柳河县志』, pp.203-204.
18 1909년 이전에 유하현을 포함하는 서간도 전체의 한국인 망명객 수는 4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911년이 되면 그 수가 폭등하여 175,000여 명에 이른다. (최봉룡, 『만주국의 종교정책과 재만조선인의 신종교』 (파주: 태학사, 2009), pp.38-39, pp.46-50 참조)
19 『柳河县志』, p.48.
20 『柳河县志』, p.9.
21 이은숙, 『독립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울: 정음사, 1975), pp.28-31 참조.
22 같은 책 참조.
23 최봉룡, 앞의 논문, p.216 참조.
24 『柳河县志』, pp.49-50.
25 고병철, 앞의 책, pp.95-96.
26 박환, 『만주지역 한인유적 답사기』 (서울: 국학자료원, 2009), pp.147-151; 위키백과 ‘신흥무관학교’ 항목 참조.
27 고병철, 앞의 책, pp.96-97; 김병기, 「신흥무관학교와 만주독립군」, 『사학지』 43 (2011) 참조.
28 위키백과, ‘신흥무관학교’ 항목 참조.
29 보황당(保皇堂)은 강유위(康有爲, 1858∼1927)와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중국 청나라 말기인 1899년 7월에 만든 정치 단체이다. 강유위는 광서제를 도와 망국의 위기를 맞던 청을 개혁하기 위해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으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에 밀려 실패하고 해외로 도피하였다. 그는 화교를 중심으로 보황당을 조직하여 중국 내의 반대파들에게 지속적으로 항거하였고, 서태후는 강유위 및 보황당과 관련된 인사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30 『柳河县志』, p.9.
31 교운 1장 19절.
32 예시 88절.
33 최봉룡, 앞의 논문, p.2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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