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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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11 조회6,915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9년 4월, 상제님께서는 계속 김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보셨다. 하루는 백지에 ‘二十七年’이라고 쓰시기에 종도들이 그 뜻이 무엇인지 여쭈었더니, 상제님께서는 “홍성문(洪成文)이 회문산에서 27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27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백지 한 장을 열두 개로 오려내시며 각 쪽지마다 어떤 글을 내려쓰셨다. 상제님께서는 열두 쪽 중 한 쪽만을 불사르시고 나머지 열한 쪽은 시좌하고 있던 이치복에게 주시며 불사르도록 시키셨다. 그러자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가뭄에 말라가던 보리가 생기를 되찾았다.
홍성문은 전라도에 살았던 술객(術客)으로서, 그의 생몰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때인 약 450년 전 혹은 250여 년 전에 임실군 운암면 턱골에서 홍진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모친이 주막집 주모인 관계로 평생 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는데, 어머니가 일찍 죽자 홍진사는 열 살 밖에 안 된 그를 거두어 키웠다. 하지만 3, 4년 뒤 그를 아껴주던 홍진사가 죽자 맏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셋째 형은 홍성문을 창피하게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 아직 소년이었던 홍성문은 도피하여 머리를 깎고 회문산 만일사(萬日寺)로 들어가야 했다. 홍성문은 그곳 인근의 사자암에서 27년을 수도한 끝에 풍수의 이치를 깨닫는 데 성공하고 『회문산가(回文山歌)』를 지었다. 그 가사를 통해 비로소 회문산에는 오선위기혈과 24혈의 큰 명당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홍성문은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명당을 잡아주어 복록의 길을 열어 주리라 다짐하였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 보니, 반상을 구별하고 적서를 차별하는 당시 양반들의 횡포와 잘못된 관습에 물든 사회의 병폐 앞에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결국 그는 27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수도가 다 부질없는 일이었노라고 한탄하며, 광인 행세를 한 채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다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풍수의 묘법을 일러주고 세상을 하직했다.01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홍성문의 원을 풀어주고자 하셨으며, 그와 관련하여 27년 헛도수를 보셨다. 이 헛도수가 어떠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동학신명 해원과 관련되는 것으로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천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차경석이 27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이슬 사라지듯이 몰락했다는 것이다.02
이후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이치복과 여러 종도들에게 “불가지(佛可止)는 불이 가히 그칠 곳이라는 말이오, 그곳에서 가활만인(可活萬人)이라고 일러왔으니 그 기운을 걷어 창생을 건지리라.”고 말씀하시고 교자(轎子)를 타고 불가지로 행하셨다. 상제님께서는 가시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시를 하나 써주셨다.
金屋瓊房視逆旅 금으로 지어진 집과 옥으로 만든 방들이라고 해도 여인숙처럼 여기고(귀하게 여기지 않고)
石門苔壁儉爲師 돌문과 이끼가 낀 벽처럼 검소함을 스승으로 삼았도다.
絲桐蕉尾誰能解 거문고와 초미금을 어느 누가 능히 연주해 낼 수 있으리오만
竹管絃心自不離 퉁소와 거문고의 마음이 어우러져서 그 소리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구나.
匏落曉星霜可履 포과성(바가지별)이 지고 새벽별이 뜨면 능히 서리를 밟을 수 있으니
土墻春柳日相隨 흙담에 늘어진 수양버들은 태양을 서로 따르는도다.
革援瓮畢有何益 마원(馬援)03과 필탁(畢卓)04의 일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木耜耕牛宜養頤 나무 보습과 밭가는 소를 가지고 마땅히 길러야 할 것을 길러야 하리라.
회문시(回文詩)의 일종인 이 시는 그 해석이 다양하여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다만 위에 풀어놓은 것은 정확한 해석은 아니며 편의상 적어놓은 해석일 뿐이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 특징은 팔음과 28수, 그리고 64괘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먼저 각 행의 첫 글자인 ‘金, 石, 絲, 竹, 匏, 土, 革, 木’은 팔음(八音)을 말한다. 팔음이란 각각 金, 石, 絲, 竹, 匏, 土, 革, 木으로 만들어진 8개의 국악기에서 나는 소리를 말한다. 즉 편종·징 등이 금(金), 편경·특경 등이 석(石), 거문고·가야금·아쟁 등이 사(絲), 피리·대금 등이 죽(竹), 생황 등이 포(匏), 훈(塤: 질나발)·부(缶:질그릇 닮은 악기) 등이 토(土), 장구·소고 등이 혁(革), 박(拍)·축(祝) 등이 목(木)으로 된 국악기인 것이다. 다음으로 이 시에서 각 행의 네 번째 글자인 ‘房, 壁, 尾, 心, 星, 柳, 畢, 牛’는 28수에 속한 것들이며, 각 행의 마지막 글자인 ‘旅, 師, 解, 離, 履, 隨, 益, 頤’는 64괘의 괘명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 불가지의 현재 모습. 現 전북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불가절. 지금은 마을이 거의 사라지고 1∼2세대 정도만 남아있다.
불가지 마을 김성국(金成國)의 집에 도착하신 상제님께서는 용둔(龍遁)05을 하리라 하시고 양지 20장을 각각 세로로 여덟 번 접으셨다. 다시 가로로 네 번 접으시더니 칼로 자르신 다음 책으로 묶어내시고, 작은 사발(보시기)에 실을 쌀 미(米) 모양으로 둘러매신 뒤 오색으로 그 실오리에 물을 들이시고 보시기 변두리에는 푸른 물감을 발라 각 책장마다 찍어 돌리셨다. 그러시고는 각 책장들을 다 떼어내셔서 풀로 이어붙이시고 네 번 꺾어 접어 시렁에 걸어 놓으시니 그 오색찬란한 모양새가 마치 용의 모습과 같았다. 잠시 후 상제님께서는 그 종이를 걷어서 불사르셨다.
다시 상제님께서는 빗물을 받아 그 물로 벽에 사람 모양을 그리시더니 그 앞에 청수를 떠 놓고 꿇어앉아 상여를 메고 운상하는 소리를 내셨다. 그리고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 1552∼1610)06를 초혼하여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상제봉조(上帝奉詔)에 장사하고 최수운07을 초혼하여 순창(淳昌) 회문산 오선위기(五仙圍碁)에 장사하노라.” 말씀하시고, 종도들에게 24절기를 읽게 하셨다. 이윽고 상제님께서는 “그때도 이때와 같아서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匡正)하려고 당 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24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08 너희들도 그들에게 밑가지 않는 대접을 받으리라.”고 깨우쳐 주셨다.
상제님께서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신 후 전주 용머리고개에 살고 있는 김덕찬을 불러오도록 시키셨다. 상제님께서는 김덕찬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는 그 말씀을 귓가로 흘려들었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이제 용소리(龍巢里) 김의관(金議官)의 집에 가서 자고 오너라.”고 이르셨다. 김덕찬은 상제님의 말씀에 따라 용소리에 사는 김의관의 집으로 갔는데, 그의 집 근처에서 술에 취한 사람을 만나 심한 곤욕을 당했다. 그는 분에 이기지 못해 김의관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을 그곳으로 보내신 상제님을 원망하며 불가지로 되돌아왔다. 상제님께서는 불가지 김성국의 집 밖에 서 계시다가 웃으시며 김덕찬을 보시고는 “왜 자지 않고 되돌아오느냐?”고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방에 들어오신 후 그에게 마음을 달래라고 술을 한 잔 부어주시며 “사람과 사귈 때 마음을 통할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속이느냐?”고 넌지시 말씀하시니, 깜짝 놀란 김덕찬은 상제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김덕찬은 작은 일이라도 지극히 언행을 조심하였다.
▲ 현재의 용소리 모습. 용이 깃들어있는 형국이어서 용소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09 사진 중앙에 나무들이 많이 보이는 곳이 옛날 시목정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용소마을에 소재하며 전주 용소초등학교 동쪽 편에 있다.
상제님께서는 김덕찬을 데리시고 불가지를 떠나 용소리 시목정(柿木亭)으로 가셔서 그곳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다니셨다. 그 무렵 상제님께서는 김덕찬과 함께 싸리재10를 넘어가시다가 고사리를 캐던 한 노구를 만났다. 상제님께서 그 노구에게 중이 양식을 비노라고 양식을 청하시니, 그 노구는 처음에 없다고 거절하다가 상제님의 청을 재차 받고 가지고 있던 쌀 두 되 중에서 한 홉을 상제님께 내어드렸다. 상제님께서 이 양식을 받아드시고는 김덕찬에게 “중은 걸식하나니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 하는 것이 옳도다.”하고 말씀하셨다.
4월 28일이 되자 상제님께서는 김보경 등을 데리시고 대전의 신탄진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들판에 놓인 철로 주변을 한참 서성이시다가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하시니, 종도들이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시는지 여쭈었다. 상제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다가, 이윽고 남쪽에서 한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이제 나의 일을 다 이루었도다.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기차에는 일가와 함께 망명길에 오른 도주님께서 타고 계셨다. 그 사연을 살펴보면, 도주님의 조부께서는 홍문관 정자(正字)11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정원 주서(注書) 등을 지낸 조영규(趙瑩奎)셨다. 그 분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은 것을 알고 나라의 위태함을 거듭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향하셨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토혈 서거하셨다. 조부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이어받은 도주님의 부친과 숙부들은 구국운동을 하기 위해 화약 공장을 차리고 무기 수집을 하였는데 그만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형세가 다급해지자 도주님을 비롯한 전 가족은 고향을 떠나 만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09년 4월 28일 당시 15세이셨던 도주님께서는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전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게 되신 것인데, 바로 그날 그 기차가 대전의 신탄진을 지날 때에 상제님께서 미리 마중 나와 계시다가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이다. 도주님께서 천명(天命)을 받드는 50년 공부를 시작하시게 됨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 일화는 종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상제님의 뒤를 이어 종통을 세우실 분이 도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훗날 이상호와 이정립이 상제님의 행적을 모아 『증산천사공사기』와 『대순전경』을 간행할 때 이 이야기를 싣지 않았는데, 그것은 종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이 일화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도들에게 불편한 이 진실은 워낙 광범히 하게 퍼져 있었으니, 그 사실은 우리 종단과는 다른 종통을 주장하는 한 증산교단의 경전에 이 일화가 실려 있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2
<대순회보> 1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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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순창의 구전설화(下)』 (순창문화원, 2003), pp.72-110; 최삼룡, 「전북지역의 道家에 대한 고찰」, 『한국도교사상의 이해』 (한국도교사상연구회, 1996), p.316.
02 「27년 동안의 헛도수」, 『대순회보』 68호 (2007), pp.17-29 참조.
03 마원(馬援, 기원전14~기원후49). 산시성[陝西省] 싱핑현[興平縣] 유푸펑[右扶風] 마오링[茂陵] 출생. 전한(前漢) 이래 명문가 출신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직분을 다하고자 평생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빈객(賓客) 수백 가(數百家)를 포섭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다. 왕망은 그런 그를 불러 한중랑태수(漢中郞太守)로 삼았다. 후에 마원은 광무제의 신하가 되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어 농서태수(陇西太守)로서 간쑤성[甘肅省] 방면의 강(羌)ㆍ저(免) 등의 외민족을 토벌하였다. 41년 이후에는 복파장군에 임명되어, 교지(交趾: 북베트남) 지방에서 봉기한 징칙(徵側)과 징이(徵貳) 자매의 반란을 토벌하고, 하노이 부근의 낭박(浪泊)까지 진출하여 그곳을 평정하였다. 그 공로로 43년 신식후(新息侯)가 되었다. 45년 이후는 북방의 흉노와 오환(烏丸)의 토벌에 활약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남방의 무릉만(武陵蠻)을 토벌하러 출정하였으나, 열병환자가 속출하여 고전(苦戰)하다가 진중에서 병들어 죽었다.(두산백과사전, doopedia 참조)
04 필탁(畢卓, ?~?): 동진(東晉) 신채(新蔡) 동양(鮦陽) 출생. 유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주어진 직분에 소홀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원제(元帝) 태흥(太興) 말에는 이부랑(吏部郞)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술을 즐겨 직분을 돌보지 않았는데, 사랑(舍郞)에 술이 익으면 훔쳐 마시다가 관원에게 붙잡히곤 했다. 후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온교(溫嶠)의 평남장사(平南長史)도 되었지만, 여전히 벗들과 어울려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웃통을 벗은 채 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 동안 내리 술을 마시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한 손에는 게 다리를 들고, 한 손에는 술잔을 쥔 채 술 연못 속에 빠져 생애를 바치면 좋겠다.”고 스스럼없이 말하곤 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928&docId=1710154&mobile&categoryId=1981 참조)
05 용(龍)으로 변신하거나 용의 기운을 사용하여 조화를 부리는 술법. 용둔은 비를 내리게 하거나 멈추게 하고 수전(水戰)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여러 전투 환경을 조성할 때도 사용된다. 이것은 용이 물을 다스리는 동물로 알려져 왔던 사실과 관계가 있다.
06 이마두에 대해서는 「신성ㆍ불ㆍ보살의 하소연으로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시다」, 『대순회보』 68호 (2007), pp.10-12 참조.
07 최수운에 대해서는 「상제님께서 최제우에게 천지대도를 내리시다」, 『대순회보』 70 (2007), pp.10-15 참조.
08 자세한 내용은 「천하를 평정한 당태종」, 『대순회보』 90호 (2008), pp.22-29 참조; 특히 당 태종이 24장과 함께 혼란한 시국을 바로 잡기 위해 활동했던 20년간은 중국 전체 인구의 2/3 이상이 목숨을 잃은 시기였다. 이재원, 「중국 섬서성, 하남성을 다녀와서(4)」, 『대순회보』 82호 (2008), pp.102-103 참조.
09 『한국지명총람 12-전북편 하』 (한글학회, 2003), p.361.
10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 싸리재.
11 홍문관은 조선시대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유학 경서와 역사 서적을 관리하고, 문장의 작성 및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홍문관 정자는 위계는 낮으나 청직(淸職) 중에서도 으뜸가는 관직이었으므로 선발 과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12 『증산도 도전』 2쇄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1996), pp. 505-506. 증산도는 『증산도 도전』 3쇄를 간행하면서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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