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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화천을 암시하시고 태을주와 운장주를 가르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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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9 조회4,3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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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9년[己酉年] 2월 9일, 상제님께서는 김자현을 데리고 김제 내주평(內主坪)에 사는 처남 정남기의 집으로 향하셨다. 저녁 무렵 그곳에 당도하신 상제님께서는 “이 길은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妻族)을 찾아보리라.” 하시고 등불을 밝히시며 여러 집을 두루 다니셨다. 그리고 날이 밝자 북북서쪽으로 약 9㎞ 떨어져 있는 수각리의 임상옥(林相玉)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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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는 임상옥의 집에서 종이에 어떤 글을 쓰신 뒤, 그 종이를 세로로 가늘게 잘라 이어 붙이셨다. 그리고 그 긴 종이 줄을 임상옥 집의 뒷담에서 시작하여 그 집 앞대문까지 펼치시니 길이가 꼭 맞는 것이었다. 대개 상제님의 공사가 그렇듯, 이 공사 역시 무슨 공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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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를 마치신 상제님께서는 임상옥의 옆집에 사는 김문거(金文巨)의 집에 잠시 들르셨다가 다시 만경 삼거리에 있는 주막으로 가셨다. 주막에 앉아서 쉬시는데, 잠시 후 어떤 중 한 사람이 주막 앞을 지나가므로 상제님께서는 그 중을 불러 세워 돈 세 푼01을 손에 쥐어주셨다. 그리고 옆에서 시좌하고 있던 김자현에게 “오늘 오후에 백홍(白虹: 흰 무지개)이 관일(貫日: 태양을 관통함)하리니 내가 잊을지라도 네가 꼭 살펴보도록 하라.”고 이르셨다. 김자현은 상제님의 명을 받아 하늘을 유심히 관찰하였더니, 과연 오후에 흰 무지개가 태양을 뚫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 백홍관일(白虹貫日)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은 임금의 신상에 불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 혹은 병란(兵亂)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한다. 또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이 감동했을 경우에도 백홍관일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백홍관일은 무슨 일을 표상하기 위하여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제님께서는 김자현을 계속 데리고 다니시면서 당신께서 화천하실 것임을 암시하셨는데, 아마도 백홍관일이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그날 오후 늦게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에게 “오늘 너희가 다투면 내가 죽으리라.”고 일러주시자, 놀란 김형렬이 무슨 그런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시느냐고 아뢰었다. 그런데 구전(口傳)에 따르면 그날 저녁 종도들 간에 사소한 다툼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다음 날 상제님께서는 김형렬로 하여금 시종케 하시고 전주로 떠나셨다.
  3월이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다시 동곡으로 돌아와 계셨다. 상제님께서는 시좌하고 있던 김자현에게 그의 지혜를 떠보시고자 “학질로도 사람이 상하느냐?”고 물으셨다. 김자현이 “학질은 세 축 째에 거적을 갖고 달려든다 하나니 이 말이 상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나이다.”하고 아뢰었다. 상제님께서는 “진실로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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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학질(瘧疾)은 말라리아로 알려져 있으며, 일단 발병하면 일정한 시간을 두고 오한과 발열이 주기적으로 일어나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모질고 포악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학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학질은 대개 3일째마다 열 발작이 일어나는 ‘3일열 말라리아’였다. 첫 번째 열 발작이 일어나면 한 축 째(또는 한 직 째), 두 번째 열 발작이 일어나면 두 축 째(또는 두 직 째)라고 하였으며, 세 번째 열 발작, 즉 세 축 째 열 발작이 일어나면 십중팔구 목숨을 잃게 되며 당시로서는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팔순이 넘은 김자현의 조모(祖母)가 학질에 걸려 세 축 째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상제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학질로 사람이 상한다는 말이 옳도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김자현의 집으로 오셔서 김자현의 조모를 누일 관에 누워보셨다. 상제님께서는 김자현에게 이웃 마을에서 관을 짜서 파는 박춘경의 집에 가서 상제님께 맞는 관 하나를 잘 골라오라고 시키셨다. 또 “내가 장차 죽으리라.” 하시니, 김자현이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하고 아뢰었다.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자현이 나의 죽음을 믿지 않는도다.”고 탓하실 뿐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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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렵 부안의 청일(晴日)04에 사는 이치화(李致化, 1860~1944)가 동곡에 계신 상제님을 찾아뵙고 종도가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그의 이름 글자 가운데 하나인 ‘화(化)’가 ‘화(禍)’를 연상시킨다고 하시며 그의 이름을 이치복(李致福)으로 바꾸어주셨다. 상제님께서는 이치복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시키셨으나, 그는 상제님을 모시고자 하는 마음이 커서 종일 돌아가지 않고 상제님 곁에 머물렀다. 다시 상제님께서 특정한 날짜를 지목하시며 “빨리 돌아가서 돈 칠십 냥을 가지고 기일 내에 오라.” 하시니, 그제야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기일 내에 칠십 냥을 허리에 차고 와 상제님께 올렸다. 상제님께서는 그 돈을 방 안에 두게 하시고, 다시 문 밖에, 또 다시 싸리문 밖에 차례로 두어 칠일 밤낮을 보내게 하시고 거두어들이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공삼(李公三)을 시켜 그 돈을 대흥리 차경석의 집으로 보내셨다.
  3월의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동곡에서 “지금은 신명 해원시대니라. 동일한 50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오. 최제우는 경신(庚申, 1860년)에 득도하여 시천주(侍天呪)를 얻었는 바, 기유(己酉, 1909년)까지 50년이 되니라. 충남 비인(庇仁)05 사람 김경흔(金京訢)은 50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를 해원하리오?” 하고 물으셨다. 김광찬이 “상제님의 처분을 기다리나이다.”고 아뢰니 상제님께서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고 태을주를 쓰리라.” 하시고는 태을주를 종도들에게 가르치셨다.
  김경흔은 조선 선조 때의 사람으로 50년간 입산수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개안(開眼)을 하기 위해 온갖 주문을 다 사용하여 보았으나 실패하였다. 낙담하고 있던 그에게 한 신명이 나타나 태을주를 가르쳐주면서 그 주문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라고 전하였다. 하지만 김경흔은 태을주를 외우며 다시 정진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06 결국 그는 태을주로도 도통을 이루지 못한 원과 많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 원을 품게 되었다. 이제 상제님께서 그런 그를 해원시켜주시며 태을주가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셨으니, 이제 도인들은 김경흔이 성취하지 못했던 것을 다 이룰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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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뒤 상제님께서는 무려 일주일 동안 계속 코피를 흘리시며 김갑칠에게 관을 하나 만들게 하셨다. 이어 감주 한 그릇을 잡수시더니 곧 원기를 회복하셨다. 이때 김갑칠은 김광찬과 다투어 감정의 골이 깊었는데 상제님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셨다. 다음 날 상제님께서는 “너희들은 항상 평화를 주장하라. 너희들끼리 서로 싸움이 일어나면 밖에서는 난리가 일어나리라.”는 가르침을 내리셨다.
  이 무렵, 정읍 교동에 살고 있던 황응종이 동곡에 계신 상제님을 뵈려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서고자 했다. 문득 그는 상제님께 빈손으로 찾아뵙는 것이 송구스러워 무언가 드릴 것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집에서 키우던 노란 암탉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덮치는 것이었다. 황응종은 이 놈을 상제님께 드리면 좋겠다고 여기고 즉시 그 닭을 잡아서 상제님께 달려가 올렸다. 밤이 되자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을 부르시어 그 닭을 삶게 하시고 종도들과 나누어 드셨다. 그 자리에는 김형렬·황응종·한공숙·류찬명·김자현·김갑칠·김송환·김광찬 등이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곧바로 종도들에게 운장주(雲長呪)를 써 주시며 단번에 외우게 하셨다.
  날이 밝자 상제님께서는 류찬명과 김자현 두 사람을 앞에 서게 하시고 각각 10만 명을 포덕하라고 말씀하셨다. 류찬명은 상제님의 명에 따르겠노라고 아뢰었지만, 김자현은 자신이 없어 우물쭈물하다가 상제님께서 계속 재촉하시니 그제야 비로소 대답을 올렸다. 다시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내가 평천하(平天下)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治天下)하라. 치천하는 50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 내가 태을주와 운장주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고 장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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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후 숫구지에 사는 사람들이 태을주를 외운다는 소문이 동곡으로 들려왔다. 상제님께서는 “이것은 문공신의 소치이니라. 아직 때가 이르므로 그 기운을 거두리라.” 하시고 동곡약방 벽에 ‘氣東北而固守 理西南而交通’07이라 쓰셨다. 그리고 문 밖에 있는 크고 평평한 반석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시고 점을 찍으시더니, 다시 종이에 태을주를 내려쓰시고 그 끝에 ‘金京訢’이라 덧붙이신 후 벽에 붙이고 절하시며 “내가 김경흔으로부터 받았노라.”고 하셨다. 다시 칼과 붓, 먹, 부채 한 개씩을 반석 위에 늘어놓으신 후 종도들에게 “뜻이 가는 대로 집으라.” 하시니, 류찬명은 칼을, 김형렬은 부채를, 김자현은 먹을, 한공숙은 붓을 각각 집어 들었다. 상제님께서는 이 네 종도들을 약방 방 안의 네 구석에 각각 앉게 하시고 당신은 가운데 서시더니, 낙서(洛書)의 수리인 ‘二七六 九五一 四三八’을 한 번 외우셨다. 그리고 구석에 있던 종도들 가운데 세 사람에게 종이를 돈 모양으로 자르게 하시고 그 종이조각을 벼룻집 속에 채워 넣으셨다. 구석에 있는 나머지 한 종도에게는 벼룻집 속에 든 종이조각 한 개를 끄집어 내고 이십팔수 신명의 첫 번째인 ‘등우(鄧禹)’를 부른 뒤 그 끄집어 낸 종이조각을 옆의 다른 종도에게 전하게 하셨다. 그 종이조각을 건네받은 종도는 상제님의 명에 따라 ‘청국지면(淸國知面)’이라고 읽었다. 다시 종도가 벼룻집에서 종이 한 조각을 꺼내면서 이십팔수 신명의 두 번째인 ‘마성(馬成)’을 부르고 옆 종도에게 넘기면 종이조각을 받은 종도는 ‘일본지면(日本知面)’이라 읽고, 또 벼룻집에서 종이 한 조각을 꺼내면서 이십팔수 신명의 세 번째인 ‘오한(吳漢)’을 부르고 옆 종도에게 넘기면 종이조각을 받은 종도는 ‘조선지면(朝鮮知面)’이라 읽었다. 다음 차례는 이십팔수 신명의 네 번째인 ‘왕량(王梁)’인데, 이때는 다시 ‘청국지면’을 읽었다. 이런 식으로 이십팔수 신명과 이십사절 신명을 차례로 부르고 또 이에 상응하여 ‘청국지면’, ‘일본지면’, ‘조선지면’을 차례로 불러나갔더니, 마지막 차례인 ‘진숙보(秦叔寶)’에 이르자 종이조각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이 공사를 마치시니 얼마 후 숫구지에서 더 이상 태을주를 읽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공사 직후에 상제님께서는 ‘陰陽’ 두 글자를 써서 약방 벽면에 붙이시고 그 위에 백지를 덧붙이시더니 “누가 걸리는가 보라.” 하셨다. 한참 후에 “나약한 자가 걸렸다.” 하시니, 그 뜻을 아는 종도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쓰이기 일렀던 태을주를 퍼뜨린 장본인이 문공신이었고, 문공신은 몇 해 전에 후천 음양도수를 조정하는 공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연계해서08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09
  상제님께서는 1909년 3월 경에 태을주를 가르치셨지만, 그 당시는 태을주가 쓰일 시기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얼마간 더 시간이 흐른 후 화천하실 무렵에야 태을주가 행세할 시기가 되었다고 하시며 “오는 잠을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그것이 하늘에서 으뜸가는 임금이니라. 5만 년 동안 동리동리 각 학교마다 외우리라.”는 말씀을 전하셨다고 한다.

<대순회보>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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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현재 화폐로 약 1,000원 남짓이지만, 당시에는 실제 가치가 그것보다 더 컸다.
02 『한국지명총람 11 - 전북편上』 (한글학회, 2003), p.165.
03 앞의 책, p.163.
04 現 전북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청일마을. 예전에 이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농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부모를 봉양할 반찬을 사러 장으로 가는 도중 폭풍우가 쏟아지기에 기도를 드렸더니 즉시 날이 갰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마을을 날씨가 갰다는 뜻의 ‘청일(晴日)’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앞의 책, p.397.
05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06 노길명, 「태을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p.69.
07 기(氣)는 동북에서 굳건히 지키고, 리(理)는 서남에서 서로 교류하고 통한다. 이 글귀는 김일부가 지은 『정역』의 「금화이송(金火二頌)」에 나오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정역 연구가인 이정호는 一六과 三八은 동북에서 그 자리를 변하지 않고, 四九와 二七은 서남에서 그 자리를 서로 맞바꾼다는 의미라고 해석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하도에서 낙서로 변할 때 동쪽과 북쪽의 一六三八은 자리를 지키지만 서쪽과 남쪽의 四九二七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는 뜻이다. 정역에서는 이것을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고 부른다. 이정호, 『원문대조 국역주해 정역』 (서울: 아세아출판사, 1988), pp.18-21 참조.
08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60: 정읍 교동에서의 공사」, 『대순회보』 124호 (2011), pp.15-16 참조.
09 또는 종도들 사이에 전해지는 다른 설도 있다. 그때 당시 상제님을 시종하고 있던 종도들 가운데 김광찬, 김병욱, 최창조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군인이나 이방 등 국가 공무원 출신들로서 모두 첩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상제님께서는 최창조가 첩과 관련된 집안일을 잘못 처리한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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