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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사명당(四溟堂)에 얽힌 일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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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01 조회6,2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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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국에서 신묘한 도술로 왜왕을 굴복시킨 사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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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비(경남 밀양 표충사 소재) - 일명 '땀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져 있는 이 비석은 나라 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사전에 비 오듯 땀을 흘린다고 하니, 사명대사의 영험함과 호국정신을 잘 엿볼 수 있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조선군의 승리로 끝난 다음의 일이다. 침략전쟁에서 큰 타격을 받고 쫓겨난 왜적들은 조선과 화친조약을 맺고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들이 겉으로는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해 이를 수차례 거절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적의 동정을 살피고 승자의 위세도 드높이기 위해 왜왕(덕천가강)의 항복을 받아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외교, 군사 두 방면에서 모두 유능한 사람을 보내야만 했다. 1604년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의승군도대장(義僧軍都大將)을 지냈던 사명당을 보내기로 하였다.

  당시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입적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조정의 부름을 받고 즉시 상경하였다. 그는 먼저 왜의 사신을 만나본 다음 왜의 의도가 재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화의(和議)에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보다 정확한 왜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그해 7월에 사명당을 왜국으로 보냈다.

  사명당은 왜에 도착하자마자 수행원으로 하여금 조선 임금의 국서를 왜왕에게 전하게 했다. 왜왕이 편지를 뜯어보니 거기에는 “피차에 적국이 되었음에 조선에서 ‘생불(生佛) 사명당’을 사신으로 보내니 재주를 견주어 국교를 바로잡고자 하노라.”고 쓰여 있었다. 왜왕은 한편으로 놀라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생불이란 말은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시험해 보도록 명했다.

  신하들은 좋은 묘책이 있으니 시험해 보겠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명당이 사신으로 온다는 소식에 내심 꺼림칙했으나 여러 술수를 꾸며 그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들은 우선 조선 사신이 오는 길목에 360칸짜리 긴 병풍을 세워두고 거기에 1만 1천 귀의 한시(漢詩)를 가득 써놓았다. 그리고 왕궁의 대문 안에는 약 7m 깊이의 함정을 파고 그 위에 유리를 깔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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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당은 말을 타고 유유히 오다가 병풍의 글을 한 번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대문 앞에 이르러 더 들어가지 않고 품안에서 염주를 꺼내 문간을 향해 던졌더니 “쟁강.”하는 유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는 접견하는 관리를 불러 “내 필경 네놈들이 이런 장난을 하리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노라. 빨리 함정을 메울지어다.”라며 큰 소리로 호령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왜왕은 사명당의 혜안에 놀라 그를 별궁으로 인도케 하였다. 이날 밤 왜왕은 사명당을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360칸 병풍에 쓴 글을 다 보았겠으니 한 번 외워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명당은 “그만한 것쯤 외우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더니 1만 9백여 귀에 달하는 시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줄줄 다 외웠다. 다만 마지막 병풍 한 칸의 글귀는 외우지 않았다. 왜왕이 그 사유를 물은즉, “접혀 있던 것까지야 어떻게 볼 수 있었겠소.”라고 대답했다. 왜왕이 사람을 시켜 이를 확인해 보니 과연 마지막 한 칸은 펴져 있지 않은 채로 있었다. 왜왕은 그의 비상한 재능에 그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왜왕은 여러 신하들과 다시 의논하면서 “조선 사신이 능히 만 리를 내다보니 생불이 분명하도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하들이 조선 사신을 철판으로 만든 배에 태워 깊은 못에 띄워 놓으면 필경 물에 빠져 죽을 거라며 다시 시험해 보기를 청했다. 그래서 왜왕은 좋은 경치를 구경시켜 준다는 구실로 사명당을 철판 배에 태운 후 깊은 못을 향해 그것을 띄웠다. 이때 사명당이 철판 배 위에 앉아 염불을 외니, 그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동서남북으로 평지를 다니듯 왔다 갔다 하였다.

  두 번의 실패로 잔뜩 부아가 오른 왜왕은 이번에는 구리 집을 짓고 사방에서 숯을 피워 태워 죽일 계책을 꾸몄다. 사명당은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서슴없이 구리방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네 벽에 ‘서리 상(霜)’ 자를 써 붙이고 바닥에는 ‘얼음 빙(氷)’ 자를 써 놓았다. 왜인들은 구리 집 주위에 백탄을 가득 쌓아놓고 풀무질을 하면서 불을 세차게 일구었다. 밤새 구리 집을 달군 왜인들은 제아무리 생불이라 해도 이번에는 틀림없이 죽어 재가 되었으려니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명당은 태연히 방안에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눈썹에는 하얀 성에가 끼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크게 놀란 왜왕은 마지막으로 사명당을 화약을 넣은 철마에 태운 다음 뇌관에 불을 붙여 고열로 철마와 함께 녹여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사명당은 철마 옆에 서서 조선이 있는 서북쪽 하늘을 향해 두 번 머리 숙여 절하였다. 그러자 조선쪽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더니 뇌성벽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고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명당이 서 있는 곳에는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으나 왜왕이 있던 성의 안과 밖에는 순식간에 큰 물난리가 나서 집과 논밭이 유실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좀처럼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왕은 너무도 황겁하여 급히 항복문서를 써 보냈으나 사명당이 이를 거절하면서 “왜왕의 목을 베어 와야 그치게 하겠노라.”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왜국의 모든 관리들이 와서 “제발 그것만은 면하게 해주십시오.”라며 엎드려 비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다면 항복문서를 바치고 조공으로 구리 3만 6천근과 놋쇠 3만 6천근, 후추 300석, 황금 30근을 해마다 어김없이 바치라.”고 하였다. 왜왕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항복문서를 만들어 바치니 그제야 뇌성벽력과 폭풍우가 멎었다.

  사명당은 항복문서를 받은 후 왜왕을 다시 꾸짖으며, “너희들이 한갓 무력만 믿고 우리 조선국에 침입하여 7년 병화(兵禍)를 겪게 하였으니 그 죄를 생각하면 왜놈이란 종자를 다 없애버리고 싶으나 인명이 중하여 이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차후 다시는 외람된 마음을 두지 말고 조선을 잘 섬기도록 하라. 우리나라에는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많아 나 같은 생불이 수천 명이라, 비록 동방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으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천하제일이라 다른 나라가 감히 범접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이후 다시 범접할 생각을 하면 우리 일천 생불이 일시에 들어와 왜국을 바다로 만들 터이니 다시는 반역을 꾀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튿날 사명당이 극진한 대접을 받은 후 떠나려고 할 때 왜왕은 백 리 밖까지 나와 전송하며 무수한 보물을 사명당에게 바쳤다. 그러나 사명당은 “나에게는 이런 것들이 소용이 없다. 그 대신 임진왜란 때 너희들이 포로로 데려간 조선 사람들을 나와 함께 가게 하라.”고 일렀다. 이렇게 해서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게 붙잡혀갔던 조선 사람 3천 5백여 명이 여러 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대순회보>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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