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금강산의 딸 박씨부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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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10 조회6,589회 댓글0건본문
이시백이 병조판서로 있을 무렵 나라의 국방정세는 명(明)과 후금(後金) 사이의 싸움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후금의 왕[太宗]은 명과의 전면전에 앞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조선에 대해서도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조선에 이시백, 임경업 같은 훌륭한 인재가 있는 것이 몹시 꺼려져 비상한 재주를 지녔던 공주를 보내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공주는 그런 부왕의 기대에 응해 반드시 일을 성사시키겠다고 장담하고 남장(男裝)을 한 채 조선으로 잠입하였다. 조선으로 들어온 공주는 조선말을 배우고 은밀히 조선의 내정을 정탐하면서 서울에 들어와 이시백의 집을 찾고 있었다.
이때 박씨부인(이하 박씨)이 시부모께 저녁 문안을 드린 후 침실에 있으니 저녁 늦게 시백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박씨는 정색을 하고 남편에게 “내일 날이 어두워지면 강원도 원주에 사는 기생 설중매라는 여자가 찾아올 것입니다. 만약 상공께서 그 계집의 아름다움을 탐내어 가까이 하시면 큰 화(禍)를 당할 것이니, 그녀를 곧바로 소첩의 방으로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시백은 부인의 말이 언뜻 믿기지 않았으나 그렇게 하겠다고 응낙했다. 그리고 다음날 밤 시백이 한가로이 공부방에 앉아있으니 과연 한 여자가 찾아왔는데 천하에 보기 드문 미인(美人)이었다. 놀란 시백이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 여자가 이르기를, “소녀는 원주에 사는 설중매이온데, 상공의 위풍이 시골에까지 유명하기로 한번 뵙고자 하여 험한 길을 찾아왔사오니 어여삐 보아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시백은 박씨의 말이 생각나서 그녀를 박씨가 있는 후원으로 보냈다.
설중매가 후원으로 들어가니 박씨가 먼 길에 찾아오느라 수고했다며 미리 약을 타둔 술상을 내놓았다. 그녀는 조금도 의심치 않고 그 술을 서너 잔 마시더니 갑자기 두 눈이 어지러워 그만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박씨가 그녀의 행장을 뒤져보니, 술법을 가해 사람을 보기만 해도 달려드는 비도(飛刀)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급히 주문을 외워 그것을 제어한 후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 설중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자 박씨는 그녀의 정체가 후금의 공주임과 암살 의도를 지니고 잠입한 것을 밝히니, 공주는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박씨가, “너의 국왕이 분에 넘치는 뜻을 두어 우리 조선을 침범코자 하니 이는 우리나라의 국운이 불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너희 병력이 강성할지라도 마음대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돌아가서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이르라.”고 하면서 호되게 꾸짖었다. 공주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백방으로 사죄하고 물러나왔다. 질겁한 공주는 급히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박씨의 처소를 나왔는데, 갑자기 층암절벽이 사방에 가로막혀 몇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박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그녀를 후금의 궁궐로 날려 보냈으니, 이는 박씨가 공주가 다시는 못된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도술을 써서 혼내준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도 후금의 왕은 침략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용골대, 용홀대 두 형제 장수를 시켜 십만 대군을 이끌고 가서 조선을 치게 하였다. 그들은 명장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의주를 피해 다른 길로 질풍같이 침입하였다. 이때 박씨는 적들의 동향을 손금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 하루는 박씨가 시백에게 “후금의 공주가 쫓겨 돌아간 후에도 그들의 군사력이 점점 강해져 조선 침략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금년 12월 28일에 도성(都城)의 동대문 쪽으로 밀려들 것이니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시백이 조정에 들어가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상감은 간신 김자점과 박운학 등의 말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피난가고 말았다.
뒤미처 후금의 군대가 동대문에 들이닥치니 방비가 허술해진 도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용골대가 성내에 들어와 보니 국왕은 이미 피난가고 대궐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아우 용홀대에게 그곳을 점령케 하고 직접 기병 오천을 거느리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후금의 군대가 남한산성에 이르러 화살을 비 오듯 퍼부으니 인조는 정신이 혼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공중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상감께서는 항복문서를 써서 용골대에게 주소서. 용골대는 두 분의 왕자만 볼모로 잡아가고 일단 난리는 끝날 것입니다. 신첩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병판 이시백의 처입니다. 신첩이 한번 나아가 칼을 들면 용골대의 머리와 호병(胡兵) 삼 만을 풀 베듯 할 것이나 천의(天意)를 어기지 못함이니, 신첩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했다. 그리하여 상감이 후금과 화의를 맺으니 용골대는 항복문서를 받은 후 왕자 두 명을 볼모로 데려갔다.
한편 박씨에게서 도술을 배운 하녀 계화는, 박씨의 명에 따라 도성을 지키고 있던 용홀대의 머리를 베어 높은 나무에 걸어두었다. 그의 형 용골대가 의기양양하게 도성으로 들어오다가 용홀대가 박씨의 하녀 계화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기충천하여 박씨와 계화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박씨는 계화에게 그를 죽이지는 말고 간담을 서늘케 하여 우리의 도술실력만 보여주라고 하였다.
계화가 그를 맞아 싸운 지 십여 합 만에 용골대는 계화의 무술실력에 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나 계화가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자 큰 소리를 치며 쫓아갔다. 그때 계화가 칼을 공중으로 휘저으며 주문(呪文)을 외우니 모래와 돌이 날리고 눈과 비가 크게 퍼부어 순식간에 한 길(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이 넘는 물이 흘렀다. 그리하여 용골대는 수족을 놀리지 못하고 혼이 나서 그만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박씨는 나라의 운수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계화에게 명해 용골대와 호병들을 살려 보내게 하였다.
그 후 시백은 박씨의 계책을 받아들여 삼 년 만에 두 왕자를 데려오고 반역자 김자점을 처형한 다음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이 된 그는 나라의 정사(政事)를 바로 잡기 위해 애쓰며 여든 살이 넘도록 살다가 박씨와 함께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대순회보>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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