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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종을 타고 온 53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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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3.16 조회6,9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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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소(少年沼)를 뒤로 하고 약 1km쯤 올라가면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였던 유점사(楡岾寺) 터가 나온다. 용천(龍川)을 앞에 끼고 천룡산의 낮은 능선을 등지고 있는 유점사 터는, 아름다운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룬 골짜기 안의 넓고 평평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수백 년간 자란 아름드리 느릅나무[楡]가 주위에 많아 절 이름도 ‘유점사’라 불렸으나, 지금은 숲 속에 몇 그루만이 남아 있어 옛날의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유점사는 신라 초기 남해왕(南解王, ?~24)때 53불의 도래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능인보전(能仁寶殿), 약사전(藥師殿), 산영루(山映樓)를 비롯한 40여 채의 건물들이 아름다운 자연경치 속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조선 세조(世祖) 2년에는 국왕의 원당(願堂)으로 지정되어 조정으로부터 많은 쌀과 소금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사명당(四溟堂, 1544~1610)이 승병을 일으킨 곳이어서 그에 관한 일화들도 많이 남아 있다.

  6ㆍ25전까지만 해도 유점사에는 능인보전에 신라 예술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53불(佛)을 비롯해 용천(龍川) 위에 멋지게 지은 누각(樓閣)인 산영루와 2천 2백 근의 종이 걸린 범종각(梵鐘閣), 9층 석탑 등 우수한 조각과 공예술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폐허로 변해버린 터 위에는 다만 축대와 주춧돌, 그리고 범종각에 걸렸던 종만 남아 있다가 현재 일부 건물들이 복원된 상태이다. 시간을 거슬러 인도에서 온 53불을 모시고자 유점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옛날 석가모니가 살았을 당시, 사위성(舍衛城)에는 구억 호(戶)나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삼억 호의 사람들은 부처를 만나지도 듣지도 못했다. 석가모니 열반(涅槃) 후 문수보살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자, 석가모니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 번만이라도 그 모습을 보았으면 하고 한탄해 마지않았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너희들이 정말 부처님을 믿고 받든다면 그 형상을 만들어 공양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삼억 호에서 불상을 하나씩 만드니 어떤 것은 크기가 한 자(한 치의 열배, 약 30.3cm)만 하고 어떤 것은 몇 치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커다란 종도 한 개 만들었는데, 문수보살은 여러 불상들 가운데 얼굴과 몸 모양이 온전하게 갖추어진 53개의 불상을 모아서 그 속에 넣었다. 그리고 이 불상들이 만들어진 경위를 기록해 함께 넣고 뚜껑을 덮은 후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러면서 축원하기를 “나의 스승인 석가모니의 53불상이 인연 있는 나라에 가게 되면 나도 뒤따라가서 교리를 설파하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신령스러운 용이 나타나서 종을 등에 업고 떠나갔다.

  그 종이 월지국(月支國: 인도의 한 나라)에 이르자 국왕 혁치가 절간을 짓고 안치했는데 얼마 후 갑자기 불이 나서 절이 다 타버렸다. 왕이 다시 절을 지으려 했으나 그날 밤 꿈에 부처가 나타나 “나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겠으니 왕은 만류하지 말라.”고 하였다. 국왕이 놀라 깨어나서 53불을 다시 종에 넣고 맹세하기를 “좋은 인연이 있는 나라에 갈 것이니 그때 나는 권속 수천 명을 데리고 가서 불법을 지키는 선신(善神)이 되어 부처를 옹호하리라.”고 하였다. 그는 은으로 속 뚜껑 하나를 더 만들어 거기에 자신의 소원을 써서 넣고 종을 다시 바다에 띄워 보냈다.

  종은 바다에서 여러 나라를 거쳐 떠다니다가 신라국 고성강(高城江)에 이르렀다. 고을의 원이던 노춘이 그 소식을 듣고 관속들을 데리고 뛰어가 보니 부처들이 머물렀던 자리는 뚜렷한데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뭇가지들과 풀들이 모두 금강산을 향하고 있었다. 노춘이 그 방향으로 삼십 리쯤 가니 풀밭에 종을 내리고 쉬었던 자리가 있었다. 지금 계방(쉴방)이라고 부르는 곳이 이곳인데 길가에 있는 돌에 종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거기서 노춘이 다시 1천여 보를 가니 문수보살이 비구니로 변신해 돌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지금 이대(尼臺)라 부르는 곳인데 일행들이 그녀에게 부처가 간 곳을 물으니 서쪽을 가리켜 주었다. 노춘이 부처들을 쫓아 그쪽으로 가다가 높은 산봉우리의 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문득 흰 개 한 마리가 나타나 그들을 인도하였다. 지금의 개잔령인 그 고개를 넘어 험한 산길을 가느라 피곤하여 잠깐 둘러앉아 쉬고 있자니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몹시 기뻐했다는 환희령에서 다시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개울을 따라 들어갔다. 거기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한가운데 큰 못(소년소)이 있고 그 북쪽에 느릅나무가 하나 있었다. 부처들은 그 나무에 종을 걸어두고 못가에 줄지어 서 있었고 이상한 향기가 자욱한 가운데 상서로운 구름들이 떠돌고 있었다. 노춘과 관속들은 너무도 기뻐서 부처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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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춘이 그 길로 돌아가서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왕도 놀라워하며 직접 그곳으로 찾아가 불교에 귀의하고 그 땅에 절을 지어 부처들을 안치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우물도 샘도 없어서 중들이 날마다 쓰는 물을 개울에서 길어오느라고 매우 힘들어했다. 어느 날 수많은 까마귀들이 절간의 동북쪽 모서리에서 까욱까욱 떠들며 땅을 쪼니 샘물이 터져 나왔다. 지금 ‘오탁정(烏琢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뒷날 중 한 사람이 53불이 오랫동안 향불에 그을려서 검게 된 것을 딱하게 여겨 금빛 바탕을 드러내도록 잿물을 끓여서 부처들을 씻었더니 갑자기 우레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오색구름이 충만한 가운데 53불이 모두 들보 위에 날아올라가 줄지어 섰다. 그중 세 분의 부처는 하늘 높이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연충이라는 중이 모자라는 부처를 보충하려고 세 개의 불상을 새로 조성했는데 그 전부터 있던 부처들이 배척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처들은 밤중에 꿈에 나타나 다른 불상을 우리들 사이에 두지 말라고 일렀다. 후에 사라진 세 부처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두 부처는 구연동(유점사 뒷골안)의 만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들 중 사람의 힘으로 올라갈 만한 곳에 있던 부처는 제자리에 가져다 두었으나 올라가지 못할 곳에 있던 부처는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부처는 수정사 뒤 절벽 위에 있었는데 중들이 사다리 몇 개를 이어서 올라가 내려다가 그 절간에 두었다. 그 후 24년이 지난 다음 다시 옛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유점사 종의 영험함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큰 가뭄이 들 때마다 이 종을 씻으면 비가 온다는 것과, 종에서 진액이 나오면 나라에 재앙이 생기거나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고 한다. 한때 산불이 나서 그 불길이 유점사에 거의 미쳐왔으나 어느 중이 종에다 물을 끼얹었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불을 꺼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순회보>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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