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방랑시인 김삿갓의 시(詩)와 일화[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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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4.25 조회7,256회 댓글0건본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성심(性深)이며, 호는 난고(蘭皐)라 한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생 동안 삿갓을 쓰고 방랑하였다 하여 이름보다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자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대대로 벼슬을 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병연이 6살 되던 해에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큰 화(禍)를 입었다. 이때 어린 병연은 노복의 도움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한동안 숨어 살았다. 후에 멸족에서 폐족(廢族)01으로 감형되어 형제는 다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살았다. 모친은 남편이 화병으로 죽고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강원도 영월로 옮겨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지냈다. 이런 내막을 모르고 성장한 김병연은 스무 살이 되던 무렵 강원도 영월 향시(鄕試)에 응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그는 홍경래의 난 때 투항했던 김익순을 비판하는 시제(詩題)로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후에 그는 모친으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재능은 있었으나 꽃피울 수 없는 불우한 처지에 놓였던 김병연은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놓아 둔 채 집을 뛰쳐나와 방랑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자책하며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쓰고 죽장을 벗 삼아 다녔으므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주로 각지의 서당을 순방하며 떠돌다가, 4년 뒤인 24세 때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머물며 둘째 아들 익균(翼均)을 얻었다. 그리고 또다시 고향을 떠나 한양, 충청도 및 경상도 등지로 방랑의 길에 오른 뒤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차남 익균이 몇 번 그를 찾아갔으나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때때로 훈장 노릇도 하며 떠돌던 그는 57세를 일기로 전라도 동복(同福: 전남 화순)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로부터 2년 후 익균이 유해를 옮겨 와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삿갓은 한 조각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일생을 방랑하며 시를 읊은 불우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지붕 삼고 술을 벗 삼아 조선팔도를 떠돌며 파격적인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래서 그가 남긴 즉흥시에는 권위적인 양반과 부패한 당대의 권력자들을 풍자하고 조롱한 것들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민중시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런 그도 생전에 천하명산 금강산을 이웃집 다니듯 하면서 그 절승경개를 기발하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시를 많이 지었다.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다니다 거들먹거리는 양반과 굶주리고 헐벗은 농민들의 참상을 보면서 울분과 연민의 정으로 괴로워하다가도 금강산에 들어가면 만 가지 시름을 잊고 그 아름다움을 자유분방하게 노래한 김삿갓이었다.
정처없이 떠도는 이 몸 또다시 가을을 맞아
벗들과 짝을 지어 약속한 절간 누각에 모였노라.
작은 골짜기에 많은 사람들 오니 그 그림자로 시냇물 가리고
옛 절엔 중이 없고 흰 구름만 떠돌고 있네.
잠간 동안 금강산에 올라 삼생의 소원 풀었으니
마음껏 마시는 술 만가지 시름 모두 잊네.
내 이제 그윽한 회포를 읊어 감잎에 적어 놓고
누운 채 서원의 빗소리 들으니 회포 더욱더 그윽하네.
이것은 그가 팔도(八道)를 유람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금강산을 다시 찾은 기쁨을 노래한 ‘강호랑적(江湖浪跡)’이란 시이다. 그리고 어느 날 외금강의 구룡연 계곡으로 들어서던 김삿갓은 그 절묘한 경치에 그만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바로 시 한 수를 읊었다.
검푸른 산길 따라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정자가 시인의 지팡이를 머물게 하네.
용의 조화는 눈 내리는 듯한 폭포를 만들었고
칼의 정신은 하늘 높이 솟은 봉우리를 깎았도다.
고고한 학의 흰털은 수천 년을 묵은 것이며
냇가의 나무는 300장(丈)이 넘는 큰 소나무일세.
절간의 스님은 봄에 취한 내 마음 알 길 없어
무심히 한낮에 종을 쳐 놀라게 하네.
금강산의 명승지를 다 돌아보고 난 후에, 김삿갓은 어느 한 누각에 올라 이 세상의 절승경개를 다 모아놓은 듯 장엄하게 솟아 빛나는 금강산의 모습을 ‘만이천봉(萬二千峰)’이라는 시에 담았다.
금강산 만이천봉 두루두루 유람하고
봄바람 불어올 제 나 홀로 중루에 올랐노라.
거울과 같이 둥근 일월이 내리 비치니
이곳서 보는 아득한 천지 작은 조각배 같구나.
동쪽으로 굽어보니 넓은 바다 삼도(三島)가 가깝고
북으로 바라보니 높은 고원에 육봉(六峰: 6개의 높은 산)이 떠 있구나.
알지 못하였도다! 천지 우주가 어느 해 열려
태고적 산세가 저렇게 늙어 흰머리 된 것을.
김삿갓은 이 외에도 금강산의 장쾌한 모습과 수려한 풍치를 노래한 많은 시를 지었다. 하지만 일정한 거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신세인지라 제대로 기록된 것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떠오르는 시흥에 못 이겨 즉석에서 읊고 바람결에 날려 보내거나, 나뭇잎과 나무껍질 같은 데 적어 흐르는 물 위에 떠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들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의 재치 있고 기발한 금강산 시들을 통해서 이 강토의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소리 높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그는 금강산에서 주옥 같은 시와 함께 일화들도 적지 않게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01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 또는 그런 족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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