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금강산(金剛山)을 사랑한 봉래 양사언[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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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7.20 조회6,991회 댓글0건본문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자(字)는 응빙(應聘)이고 호는 봉래(蓬萊)ㆍ완구(完邱)ㆍ창해(滄海) 등이다. 중종(中宗) 12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新北面) 기지리(機池里)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 전기의 이름난 문인이자 서예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음관(蔭官)01으로 영암군수를 지냈으나 양사언은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였다. 그러나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명(文名: 글을 잘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름)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02에 견주어졌고 아들 만고(萬古) 또한 문장과 서예로 이름을 날렸다.
양사언의 어머니는 본시 한미한 역리(驛吏)의 딸이었다. 그녀가 12살 때 부모들이 일을 나가고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지나가던 영암군수가 들러 점심을 먹었다. 군수는 자기의 점심 시중을 잘 들어준 아리따운 소녀가 마음에 들어서 떠날 때 농담 삼아 결혼 예장이라 하며 청색과 홍색의 부채를 한 개씩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몇 해 후 영암군수는 소녀를 첩으로 데려갔다. 얼마 후 상처(喪妻)한 그는 그녀를 본처가 있던 방에 들게 하고 집안 살림을 주관토록 하였다.
어느덧 그들 사이에 세 아들이 생겼는데 이들 중 둘째가 바로 양사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용모와 풍채도 좋아 세상 사람들이 “신선의 풍채, 도인의 기골”이라 칭하며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하였다. 그의 모친은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이에 힘입어 양사언은 공부와 글씨 쓰기에 전념하며 자신의 기량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첩의 자식으로서 적서의 차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일생을 헛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와 그의 자손이 문장과 서예로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양사언의 어머니가 남편이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본처의 자식들 앞에서 자결하면서 자기 아들들이 첩의 자식인 사실을 숨겨달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양사언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때의 충격 탓인지 스스로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산수경관을 즐기며 시를 짓고 글씨 쓰는 것을 한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한 양사언은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ㆍ평창군수(平昌郡守)ㆍ강릉부사(江陵府使)ㆍ안변군수(安邊郡守)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교화에 힘을 기울여 풍속을 바로잡고 널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자 함경도 감사가 도내(道內)의 군수 중 그가 제일이라 상주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이때 그는 북방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馬草)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서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어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석봉(石峰)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더불어 조선시대 글씨가 특출했던 삼대명필(三大名筆)로 일컬어지는 양사언은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그의 한시(漢詩)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03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가사(歌辭)로는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南征歌)」가 있으며, 이밖에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격암 남사고, 토정 이지함, 북창 정염과도 교분이 있었고 점복(占卜)에 능통하여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한 이인(異人)이기도 하였다.
금강산 하면 양봉래(楊蓬萊)를 생각할 정도로 그는 금강산을 노래한 많은 시를 썼고 명소들에 적지 않은 글을 새겨 놓았다. 양사언이 자신의 호(號)를 봉래산(蓬萊山: 여름에 부르는 금강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도 그가 남달리 금강산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구경하고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당시 만폭동 바위에 새겨 놓은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04의 여덟 글자와 “만폭동(萬瀑洞)” 세 글자는 지금도 남아 있다. 만폭동 골짜기 안의 너럭바위에 올라서서 양봉래가 써 놓은 글씨를 바라보면 세계의 명산을 가진 긍지와 자부심에 금강산의 절경을 노래했던 그의 시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산위에 산 솟으니 하늘위에 땅 생기고
물가에 물 흐르니 물 가운데 하늘일세.
아득해라 이내 몸 텅빈 하늘 속에 있으니
노을도 아니거니 신선도 아니여라.
세상사람 이르는 말 내 들었노라
고려국에 태어나기 소원이라고.
금강산 좋은 경치 바라다보니
만이천 봉이마다 백옥이로세.
어느 날 금강산 절승의 하나인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십이폭포(十二瀑布)의 장쾌한 전경(全景)을 바라보던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뫼부리로 안주삼고 동해물로 술빚어라.
삐죽한 봉우리들 하늘 높이 솟았으니
취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날리는 폭포수는 바람 앞의 물이고
높이 솟은 불정대는 하늘 밖의 산이라네.
만폭동 명승지의 하나로 법기봉 허리의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매달린 보덕암(普德庵)을 보고서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보덕암 구리기둥과 구슬 햇빛가에 있고
눈처럼 수많은 봉우리 하늘에 기대었네.
신선은 천길 되는 굴 속에 머물면서
나를 수레에 태워 구름 속으로 달리겠지.
이처럼 금강산에 온 넋을 빼앗겼던 양봉래는 끝없는 희열 속에서 명승들을 빠짐없이 찾아다녔고 이르는 곳마다 주옥 같은 시들을 남겼다. 그가 스스로 외직을 자청했던 것도 관동지방의 산수경관을 즐기며 소요하기 위해서였다. 48세 때는 아예 관동(關東)으로 이주하였는데 그가 거주한 곳은 구선봉(九仙峰) 아래의 아담한 호수인 감호(鑑湖) 옆이었다. 양사언은 이 집 뒤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 삼아 금강산을 노래하는 시를 읊고 글씨도 쓰면서 지냈다. 금강산을 사랑했던 양봉래는 시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일화들도 남겨놓았다.
01 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02 송(宋)나라 때 미산(眉山) 지역에 살았던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까지 삼부자(三父子)의 대 문장가를 일컫던 말.
03 선녀의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
04 ‘봉래ㆍ풍악’은 다 금강산을 의미하며 만폭동의 다른 이름인 ‘원화동천’은 금강산의 기묘하고 아름다움을 다 구현한 으뜸가는 곳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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