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이상수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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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3.27 조회6,319회 댓글0건본문
조선시대의 문학사를 더듬어 보면 옛날부터 금강산을 찾아간 수많은 시인과 탐승객들이 금강산의 절경을 시가(詩歌)나 기행문 형식의 산문으로 칭송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작품들 중의 하나가 『동행산수기』인데, 이 작품의 저자인 이상수(李象秀, 1820~1882)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학자이자 문인으로서 시와 산문에 모두 능하였다.
상수의 자는 여인(汝人)이고 호는 오당(堂), 시호(詩號)는 문간(文簡)이다. 파주 오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하고 병약하였으나 15세 때 상경하여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40세 되던 철종 10년(185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60세 이후에는 국왕의 부름을 받아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다시 진선(進善)01·집의(執義)02 등을 제수 받았으나 곧 사직하였다.
조국 강산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녔던 그는 곡절도 많고 시비도 많은 벼슬길에 나서기보다는 명산대천을 돌아보며 시를 읊고 탐승기를 써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것을 더 큰 낙으로 삼았다. 이런 그였기에 제 나라 제 땅에 살면서도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을 보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곤 하였다.
한번은 어느 정승댁 사랑에 청(淸)의 사신일행으로 다녀온 양반의 이야기를 듣고자 문객들이 모인 적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상수도 끼어 있었는데, 그 양반은 세상에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구경을 자기 혼자 한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게 이야기판을 벌였다. 그는 청나라에서 사신일행을 맞이하는 의식이 굉장하더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 나라의 문물과 풍습은 물론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할 뿐만 아니라, 품격과 솜씨 또한 뛰어나다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상수는 그 양반의 첫마디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좌중의 한 사람이 “그곳에서 그 나라의 명사들을 더러 만나보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만나다 뿐이었겠소.” 하며 손을 번쩍 쳐들고 손가락을 하나 둘 꼽으면서 청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한 문장가, 서예가, 화가들의 이름을 내리 들먹였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과 5언절구, 7언절구로 된 한시를 지었던 이야기며,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던 일들을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또 가관이었다.
“이번에 새삼 느꼈소만 그분들의 시는 뜻이 웅건하고 깊은데다가 글씨와 그림은 필법과 필체가 다채로워 보고 듣던 우리들은 그저 탄복할 뿐이었지요.”
상수는 그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싶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였다. 마침 그때 다른 사람이 “그 나라의 경치는 어떠했습니까?” 하고 묻는 바람에 다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 눌러앉았다.
이번에도 그 양반은 자기가 돌아봤다는 그 나라의 명산들을 꼽고 나서 천하에 둘도 없는 절승경개라느니, 말로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어렵다고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좀 전의 그 사람이 “그럼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비교하면 어떠합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금강산 말인가요? 허허! 금강산이야 산이 되다 만 산인데 비교하고 말 것도 없지요.”라고 하였다. 그의 말에 좌중은 일시에 소란스러워졌고 이상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보시오. 당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오? 말씀을 들어보니 전혀 이 나라 사람 같지 않구려. 또다시 금강산을 모독하는 그런 말을 한다면 내 그 요망한 혀를 뽑아버리고 말겠소.” 라며 추상같은 호령을 남기고 휑하니 자리를 떠났다.
이 일이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 이상수는 얼마 후 금강산을 찾았다. 장안사를 필두로 명경대, 영원암, 표훈사, 정양사, 구룡연, 만물초 등 금강산의 명소들을 유람하면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낀 아름다운 풍경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엮어 『동행산수기』란 상당한 분량의 기행문을 펴냈다. 여기서 그는 고성읍에서 바라본 외금강의 경치와 해금강, 삼일포의 절경들은 물론, 통천으로 가는 길의 바다와 총석정, 국도(國島)의 풍치들까지 생동감 넘치는 필체로 자세히 묘사하였다.
이 탐승기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큼 빼어난 절경을 지닌 금강산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상수는 이 책에서 금강산이 산이 되다 만 산이라고 악평한 자에 대해 “응당 혀를 뽑는 지옥에 넣어야 한다.”고 준열히 비판하였다.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그는 금강산의 절경을 소리 높여 구가한 시(詩)들도 썼다. 전망 좋기로 유명한 정양사(正陽寺)에서는 옛 문인들이 금강산의 절경을 다 그려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진헐대에 올라서니
염불소리 울리는데
법당앞에 중을 불러
봉우리이름 물었노라
어이하여 예로부터
문장들이 그리많은데
금강산 온전한 경치
그려내지 못하였나
라는 시를 지었고, 만폭동 팔담(八潭)을 지나 마하연(摩訶衍)03에 이르러서는 그 절묘한 경치에 마음이 상쾌하고 황홀해진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구로 표현하였다.
만골짜기 일천바위
절묘한 말 찾으려다
생각이 모자라서
머리만 긁적이네
그대에게 청하노니
마하연 보고나서
어울리는 말 가려서
비슷하게만 그려보소
정신이 상쾌하니
마음도 가벼워지네
속세에 취했던 잠
여기와서 깨노라
이밖에도 이상수는 ‘백운대’, ‘백탑동을 찾아서’ 등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에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격조 높게 자랑하였다. 이처럼 그가 쓴 『동행산수기』와 금강산에 관한 시들은 결국 금강산에 대해 악평을 했던 그 양반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01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설치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정4품 문관직.
02 조선시대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 소속 종3품 직제.
03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에 있는 절. 유점사의 말사(末寺)로, 신라 문무왕 1년(661)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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