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문도스토예프스키와 일심(一心)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04 조회6,857회 댓글0건본문
교무부
1849년 12월 러시아 셰메노프 사형장 사형대 위에 반체제 혐의로 잡혀온 28살의 젊은 사형수가 서 있었다. 매서운 바람을 뚫고 집행관이 사형수에게 소리쳤다.
“이제 사형 전 마지막 5분의 시간을 주겠다.”
사형수는 절망했다.
“내 인생이 5분이면 끝이라니 남은 5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 먼저 떠나는 나를 용서하고 나 때문에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너무 슬퍼도 마십시오.”
집행관은 2분이 지남을 알렸다.
“후회할 시간도 부족하구나. 난 왜 그리 헛된 시간 속에서 살았을까? 찰나의 시간이라도 더 주어졌으면….”
마침내 집행관은 마지막 1분을 알렸다. 사형수는 두려움에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서운 칼바람도 이제는 느낄 수 없겠구나. 나의 맨발을 타고 올라오는 땅의 냉기도 더 이상 느낄 수 없겠구나.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겠구나. 모든 것이 아쉽고 아쉽다.”
사형수는 처음으로 느끼는 세상의 소중함에 눈물을 흘렸다.
“자 이제 집행을 시작하겠소.”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저편에서 사격을 위해 대열(隊列)을 이루는 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이라도….”
“철컥.”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먼저 그의 심장을 뚫었다.
“쿵 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 순간.
“멈추시오! 형 집행을 멈추시오!”
한 병사가 소리치며 형장으로 달려왔다.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라는 황제의 전갈이 도착한 것이다. 가까스로 사형은 멈추었고 사형수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형수가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날 밤 도스토예프스키는 담담한 어조로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신의 선물 …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수도 있었던 것을 조금 젊었을 때 알았다면 …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이후 시베리아에서 보낸 4년의 유배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간이 되었다. 혹한 속에서 무려 5kg의 족쇄를 매단 채 지내면서도 그는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 글쓰기가 허락되지 않았던 유배생활이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종이 대신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모든 것을 외워버리기까지 했다.
유배생활을 마친 후 세상 밖으로 나온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은 5분의 연속’이라는 각오로 글쓰기에 매달렸고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5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마지막 5분! 그것은 그의 전 인생을 총정리하고 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마감하면서 그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고 찰나의 시간이라도 아까워했습니다. 그는 순간은 영원의 행복이고 인생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전까지의 시간은 그에게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공기와 물이 너무 흔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체감하는 시간은 처한 상황이나 마음 상태에 따라 영원(永遠)에서 순간(瞬間)까지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많으면 시간의 밀도는 줄어들고, 시간이 짧으면 밀도가 늘어남을 일상에서 종종 체험합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마지막 짧은 5분 동안 영원에 가까운 밀도의 시간을 체험했습니다. 그 순간에 행복감과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고 그리하여 더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염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순간과 찰나의 시간 그리고 영원함이 크로즈업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을 강하게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찰나의 시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찰나의 시간은 고도의 집중력이 있을 때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고속 카메라는 시간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 주변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이때 주변상황은 느린 영상으로 보입니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가는 듯합니다.
보통 일상에서 우리의 마음은 이 순간 여기에 없습니다. 과거와 미래에 있습니다. 지난날의 기억들, 미래의 걱정거리 등이 온통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때 시간은 금방 지나간 듯합니다. 저속 카메라로 주변을 촬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고속 카메라와 저속 카메라를 만드는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집착에서 벗어나 의식이 얼마나 깨어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깨어 있음이란 온 마음으로 이 순간에 현존하는 것으로 고도의 집중력입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으면 마음이 흩어집니다. 현재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깨어있음이고 일심(一心)입니다. 한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감동적인 장면을 만나면 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뜁니다. 그곳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뜁니다. 그러면 혈액이 빨리 돌고 고속 카메라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주변은 슬로우 비디오로 보입니다. 시간이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장의 압박을 느끼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뜁니다. 삶의 무게를 크게 느끼는 만큼 우리는 정신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저속 카메라가 돌고 체감 시간은 빨라지고 하는 것 없이 금방 가버리게 됩니다. 가슴 뛰는 삶을 사는 것이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보통은 삶의 무게는 일생 동안 지고 다니다가 죽을 때가 되어야 내려놓습니다.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방법은 “오늘 내가 죽더라도 이 일을 하겠는가?” 하고 자문(自問)하는 것입니다. 오늘 죽는다는 설정이지만 이렇게 하면 삶의 무게가 덜어질 것이고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의무감이 아닌 행복감으로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보다 집중력 있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즐기면서 하는 일은 업무의 성과도 많이 나는 법입니다.
수도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상제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가슴 뛰게 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상제님의 일을 의무감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무거운 짐으로 나에게 다가올 뿐입니다. 일심! 그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상제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때 나도 잊고 주변도 잊고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한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마음입니다. 시공간이 창조되기 전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마음으로 일심입니다. 상제님께서는 “내가 비록 서촉에 있을지라도 일심을 가지는 자에게 빠짐없이 찾으리라”(교법 2장 13절) 하시고, “인간의 복록은 내가 맡았으나 맡겨 줄 곳이 없어 한이로다. 이는 일심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지체 없이 베풀어 주리라.”(교법 2장 4절) 하시며,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권지 1장 11절) 하셨습니다. 우리 도인에게 있어서 일심의 소귀(所貴)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행동에 조심하여 상제님 받드는 마음을 자나 깨나 잊지 말고, 항상 상제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마음속에 굳게 새겨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01 언제나 나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나의 의리(義理)를 세우고 나의 심령(心靈)을 구하여 상제님의 임의(任意)에 맡기는 개전(改悛)의 수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순회보> 190호
참고 문헌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박형규 옮김, 범우사, 1992.
--------------------------
01 『대순진리회요람』, p.15 참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