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문4개의 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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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03 조회6,800회 댓글0건본문
옛날 이원성(二元性)이라는 마을에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이 살고 있었다. 같은 색 구슬끼리는 서로 소통하며 우호적으로 지냈지만, 색이 다른 구슬에 대해서는 서로 경계하고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마을에는 작고 크게 끊임없이 흰 구슬과 검은 구슬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사건, 사고의 원인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고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은 저 쓸모없는 색이 다른 구슬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며 저들이 없어야 이 마을에는 평화가 오리라고 여겼다.
이렇게 세월은 흐르고 흰 구슬은 흰 구슬을 낳고 검은 구슬은 검은 구슬을 낳아서 양쪽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작은 싸움의 형태는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원성의 마을은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이 전쟁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들은 그냥 맨손보다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상대방을 쉽게 소멸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상대방을 효율적으로 해칠 수 있는 도구개발에 전쟁의 사활을 걸었다. 많은 무기가 개발되었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할 때마다 그 무기를 손에 넣은 구슬 측이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럴수록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강렬해져 갔다.
이런 맹목적인 전쟁에 회의를 느끼는 구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흰 구슬 측에서도 검은 구슬 측에서도 생겨났는데 이들은 자신을 흰 구슬도 검은 구슬도 아닌 회색 구슬로 자처하였다. 회색 구슬은 흰 구슬 측에 있으면 흰 구슬 같았고 검은 구슬 측에 있으면 검은 구슬 같았다. 회색 구슬의 대거 등장은 전쟁에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전쟁은 이제 회색 구슬이 어느 편에 서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게 되었다. 이들의 존재는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의 세력판도를 좌우하는 주된 세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이원성의 마을은 전쟁이 그칠 날이 없이 이어졌고, ‘빛과 어둠의 전투’라고 불리는 이원성의 게임은 영겁의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와중에는 이례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이 사랑에 빠져 낳은 새로운 구슬족이 탄생하여 그 대열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흰색이나 검은색, 심지어 회색도 띠지 않고 투명하였다. 밝고 투명하였으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들은 희거나 검은 자신의 부모 구슬을 사랑하였고, 평화를 추구하였으며, 명료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실로 기존의 그 어떤 세대의 구슬과도 같지 않았다. 이들은 전혀 새로운 구슬족이었다.
흰 구슬과 검은 구슬들은 이원성의 게임에 지쳐가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는 이원성 마을에서 주된 토론의 내용이 되었다. 흰 구슬과 검은 구슬, 회색 구슬은 특이한 투명 구슬의 존재를 돌연변이로 여기고 구슬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지혜로운 투명 구슬의 빛에 매료되어가고 있었다. 세 구슬들이 자기 안에 투명 구슬의 속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자 변화는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세 구슬이 투명 구슬의 모습을 자기화하는데 열중하자 이원성의 게임을 즐기는 구슬은 현저히 줄어들고 이원성 마을에서 전쟁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투명 구슬의 내적 평화와 명료성을 따라 배우기 위한 ‘허용하기와 수용하기’가 이원성 마을의 새로운 화두로 대두되었다. 일부 구슬들은 이원성 게임의 종식을 선언하였다. 투명 구슬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선구자임을 자처하는 구슬도 있었다.
전쟁은 종식되고 ‘이해와 사랑’의 덕목이 이원성 마을에 만연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흰 구슬도 검은 구슬도, 회색 구슬도 자신이 고유하다고 믿었던 색이 점점 바래지면서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을 전체의 구슬들이 투명해지더니 이윽고 형형색색의 찬연한 빛을 발하며 기쁨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반목과 쟁투’의 눈물을 뒤로 하고 이원성 마을에 영원한 ‘사랑과 평화’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 옛날 마을의 원로 구슬들이 예언했던 맑고 투명한 ‘유리세계’의 도래였다. 해는 서산에 지고 축제는 밤새도록 이어져 동녘에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우화는 현재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변화를 겪고 있는 인류의 마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4개의 구슬로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은 시비를 가리는 마음의 영역을, 회색 구슬은 판단과 비판의 마음의 영역을, 투명 구슬은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의 양심자리를 상징합니다.
마음 안에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는 한 내적 분쟁을 종식시킬 길이 없습니다. 판단하고 비판하는 마음은 시비지심을 도와 마음의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오직 맑고 깨끗한 양심자리에 머물 때만 사사물물을 조용히 관조할 수 있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태풍이 몰아치듯 요동할지라도 태풍의 눈과 같이 고요한 마음자리가 있습니다. 이곳이 안심(安心)·안신(安身)의 자리입니다.
안심은 태풍의 눈과 같은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안정케 하는 것입니다. 허무한 남의 꾀임이나 당치않은 나의 허욕에 마음과 정신을 팔리지 않는 것이 안심입니다. 마음이 고요한 양심자리에 거하면 행동은 자연히 의리와 예법에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행동을 예법에 합당하고 도리(道理)에 알맞게 하는 것이 안신입니다.
이러한 안심·안신이 수행의 이율령(二律令)입니다. 지금 진행 중인 변화들은 본질적으로 정화이므로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데는 혁신(革新)이 중요합니다. 혁신은 바꿀 혁에 새로울 신 자로 새롭게 바꾼다는 뜻입니다. 혁신은 좋은 것은 지키고 낡은 것을 버리며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혁신을 자각적으로 이루는 데서 ‘내려놓기’와 ‘허용하기’는 매우 중요한 수행의 덕목이 됩니다. 요즘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호오포노포노(Ho’oponopono)의 정화(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원리도 안심·안신을 위한 혁신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평소에 시비를 가리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판단을 멈추며 태풍의 눈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양심의 자리에 거해야 합니다. 시비를 가리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큰 허물은 못보고 남의 작은 허물을 탓하는 우를 범하여서는 안 됩니다. 외부로 향한 의식을 내면으로 돌려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에 대한 판단을 멈추어야 하는 것은 판단과 심판은 인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신명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수도도 바쁜데 어느 겨를에 남의 허물을 탓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저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나도 그를 본받아 잘하기를 바라고, 남의 허물을 보면 나에게는 저런 모습이 없는가를 살펴서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전경』의 “선자사지(善者師之) 악자개지(惡者改之)”01의 의미입니다.
태풍의 눈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양심의 자리에 거하기 위해서는 흑백과 시비를 가리는 이원성의 분리의식을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도(道)의 무한대한 진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도전님께서는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02라고 훈시하셨습니다. 실로 인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전체 인류가 배우고 명심해야 할 위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도인은 상제님을 믿고 도를 진실로 닦아나가는 한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도적(道的) 낙관주의로 밉고 고움이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 같은 마음을 지닌 도인다운 풍모로 솔선수범·가정화목·이웃화합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인의 귀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대순회보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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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행록 3장 44절, 《대순회보》, 115호, 「청계탑」 참조.
02 『대순지침』,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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