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문보리달마와 양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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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07 조회6,361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박영수
보리달마(菩提達磨)는 본디 인도 남쪽에 있는 작은 왕국의 왕자였다. 스님이 되어 수행하다가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선(禪)을 전했다. 당시 중국은 양 무제가 불법을 보호하고 널리 전하던 시기였으므로 양무제는 달마에게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게 된다.
무제는 달마에게 자랑스럽게 첫 질문을 던졌다.
“나는 수많은 절을 지어 후원하고 역경 사업에 재화를 아끼지 않았소. 부처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소. 나의 공덕이 어떠하오?”
보리달마가 일갈했다.
“공덕이라니요, 거기에는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공덕이 있기는커녕 지옥불에 떨어질 겁니다!”
무제가 대꾸했다.
“아니,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한 일이 없소. 근데 왜 내가 지옥불에 떨어진단 말이오? 나는 스님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오.”
보리달마가 말했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처님의 길에서는 댓가를 바라지 마십시오. 댓가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무욕(無慾)입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절을 짓고 불교를 후원하면서 공덕을 쌓는 사람은 지옥으로 직행합니다. 반면 기쁨으로 하고, 온 백성과 그 기쁨을 나누면서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의 공덕은 그 자체가 천국입니다. 댓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덕을 쌓으면 빗나가고 맙니다.”
보리달마는 “이것은 ‘내’ 가르침이오.”라고 말하지 않고 그대신 이렇게 말하였다.
“이 가르침은 옛 붓다들의 가르침이오. 나는 그저 옛 붓다들의 가르침을 전할 뿐이오. 나의 가르침은 아무것도 없소. 왜냐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오. 나는 그저 텅 빈 대나무요. 옛 붓다들이 텅 빈 나를 택해 피리로 불고 있소. 그들이 노래를 하고 있소. 나는 그저 그들이 나를 통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내맡길 뿐이오.”
이에 무제는 깨치게 되었다.
“행위 자체에 이미 행위의 보답이 있음을 알았소. 나의 행위에 보답을 주는 자는 존재하지 않소. 누가 나의 행위에 보답해준다는 생각은 유치한 것이오. 나의 행위에 벌을 내리는 자도 존재하지 않소. 벌도 나의 행위 안에 있는 것이고 상도 나의 행위 안에 있는 것이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요.”
인간의 마음상태는 천차만차(千差萬差)로 나누어지지만 크게 보면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순진리회요람』에는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01이라고 하였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분수에 넘게 소유하고자 하는 것도 사심이지만 자신이 지닌 물질을 나누는 데서도 보답을 바라고 한다면 그것도 사심입니다. 보답을 바라는 마음 자체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사사로운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진실은 인성(人性)의 본질입니다. 인사(人事)의 모든 일에 마음을 쓸 때는 정직과 진실을 근본으로 해야 합니다. 나눔에서도 천성 그대로의 본심인 양심을 근본으로 해야 온전한 덕(德)이 됩니다. 그렇게 해야 그 나눔의 행위가 나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고 타인에게도 진실한 도움이 됩니다. 우리 도(道)의 수칙에도 “후의로써 남의 호감을 얻을 것이요, 남이 나의 덕을 모름을 괘의치 말 것.”이라 하여 언동으로써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뜻을 두고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얻도록 노력하되 그 사람이 나의 덕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괘념(掛念: 마음에 두고 걱정하며 잊지 아니함)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요즘은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가 활발한데 나눔의 대명사인 기부(寄附)에는 이미 이러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부의 사전적 의미는 “자선 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댓가 없이 내놓음.”입니다. 댓가 없이 내놓는 것이 기부라는 것입니다. 댓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이미 기부가 아닙니다.
남을 잘 되게 하는 그 마음에는 조그마한 바람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을 잘 되게 하는 상생의 마음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도전님께서 “내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아서 진실하고 정직한 인간의 본질을 회복했을 때 도통에 이른다.” 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자신 안에서 충만한 것이 무자기(無自欺)이고 가정에서는 화목이며, 이웃에는 화합이고 사회에는 화평이며,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 세계평화요, 인존사상의 구현입니다.
<대순회보> 142호
참고문헌
ㆍ오쇼 라즈니쉬 저/ 손민규 역, 『인생에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위대한 만남』, 비전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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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진리회요람』,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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