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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금강산을 노래한 정철의 관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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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15 조회6,8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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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鄭澈, 1536~1593)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서, 자(字)는 계함(季涵)이고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0살 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아버지를 따라 귀양살이를 가야만 했다. 16살 되던 해에야 아버지와 함께 겨우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정철은 조부모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창작수업의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접하며 그들의 소박한 말을 배울 수 있었고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같은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던 학자들로서 국문시가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런 스승들에게서 배운 정철 또한 일찍부터 우리말로 된 시가(詩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 시기에 그는 뒷날 정계와 문단에서 이름을 날린 율곡 이이(李珥), 우계 성혼(成渾) 등과도 교유하였다. 

  26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그때부터 정철은 당쟁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인생행로를 걷게 된다. 당시 서인에 속했던 그는 반대파인 동인들에게 몰려 정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유배생활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처지와 민심을 더욱 깊이 살피게 되었고 이는 그의 국문시가 창작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1580년에 정철은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어 강원도에서 1년 동안 머물렀다. 그가 당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 시기에 그의 시적 재능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때 국문가사인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케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훈민정음이 창제됨에 따라 우수한 우리 문자에 기초를 둔 문학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루한 양반과 문인들은 이른바 정통문학을 내세우면서 우리말과 글로 된 시와 산문들을 ‘속된 글’ 혹은 ‘비루한 문장’이라 하여 천시하였다. 그러나 소년시절부터 국문시가에 관심이 높았던 정철은 이러한 비판을 물리치고 백성들이 알기 쉬운 우리글로 창작된 내용의 시가작품과 시조들을 많이 썼다.

  그의 국문시가작품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대표작이 바로 ‘관동별곡’이다. 기행시 형식인 이 작품은 정철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금강산과 그 부근의 동해안 일대를 구경하고 아름다운 조국의 산천경개에 크게 감동하여 지은 것이다. 시인의 탐승노정에 따라 내금강 만폭동으로부터 비로봉을 거쳐 해금강의 총석정, 동해 바다의 해돋이에 이르기까지 금강산과 그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순차적으로 펼쳐 보이면서 천하명승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먼저 금강산 만폭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생동감 넘치는 시적 표현과 세련된 언어를 사용해 마치 금강산의 절경이 지금 눈앞에 보이듯이 그려내고 있다. 

 

행장을 간편히 하고 돌길에 지팡이를 짚어 
백천동을 지나서 만폭동에 들어서니 
은 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용의 꼬리 같은 폭포 
섞어 돌며 내뿜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퍼졌으니 
들을 때는 우뢰려니 가까이서 보니 눈이구나!
 

 

  또한 내금강 정양사(正陽寺) 뒤의 진헐대에서 바라보이는 망고대와, 혈망봉의 기암괴석과 뭇 봉우리를 두고서, 

 

어화 조물주의 솜씨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저 수많은 봉우리들은 나는 듯하면서도 뛰는 듯하고 
우뚝 서 있으면서 솟은 듯도 하니, 참으로 장관이로다. 
연꽃을 꽂아 놓은 듯, 백옥을 묶어 놓은 듯, 
동해 바다를 박차는 듯, 북극을 괴어놓은 듯하구나 
높기도 하구나 망고대여, 외롭기도 하구나 혈망봉아 
하늘에 치밀어 무슨 말을 아뢰려고 
천만 겁이 지나도록 굽힐 줄을 모르는가? 
어와 너로구나. 너 같은 기상을 지닌 이 또 있겠는가?
 


  이처럼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금강산의 절승 경개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세계적인 명산을 가진 것에 대한 자긍심을 금강산 4대 폭포01의 하나인 십이폭포(十二瀑布)를 노래한 구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불정대에 올라서니 천길 절벽을 공중에 세워두고 
은하수 큰 굽이를 마디마디 잘라내어 
실처럼 풀어서 베처럼 걸어 놓았으니 
산수도경에 열두 굽이라 하였으나, 내 보기에는 그보다 더 되리라. 
만일 이태백이 지금 있어 다시 의논하게 된다면 
여산(廬山)폭포가 여기보다 낫다는 말은 못하리라.
 


  이처럼 우리말의 우수성을 잘 살리고 비교, 비유 등의 재치 있는 시적 표현으로 금강산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그려낸 관동별곡은 우리나라 국문시가 발전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걸작이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자 우리나라의 강산이 다른 나라만 못하다 여기고 그 나라 강산만을 찬미하던 양반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그러나 당대는 물론 후세의 뜻있는 문인들은 정철의 관동별곡을 읽고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였다. 

  『순오지(旬五志)』02의 저자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은 이 작품을 평하면서 “관동별곡은 송강 정철이 지은 것인데, 관동산수의 아름다움을 낱낱이 들어 그윽하고 기괴한 경관을 모두 설파하였으니, 사물을 형상하고 말을 만듦의 기묘함은 진실로 악보의 훌륭한 곡조라 하겠다”라고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 실학의 선구자였던 지봉 이수광(李 光, 1563~1628)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을 논하면서 “정송강의 관동별곡과 사민인곡, 속미인곡은 우리나라 노래들 중에서 가장 좋다”고 평하였다. 

  관동별곡은 비단 문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읽혔고, 곡이 붙여져 음악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기도 하였다. 정철의 가사작품들이 널리 애독된 사실에 대해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송강은 가사를 잘하여 그가 지은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은 많은 사람들이 전하여 외운다”라고 썼다. 

  시호가 문청(文淸)인 정철은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그의 관동별곡ㆍ성산별곡ㆍ사미인곡ㆍ속미인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 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관동별곡’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대표적인 걸작이란 평을 듣고 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정철은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문학의 쌍벽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대순회보>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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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금강산 4대 폭포에는 외금강의 구룡폭포(九龍瀑布)ㆍ십이폭포ㆍ비봉폭포(飛鳳瀑布)와 내금강의 옥영폭포(玉永瀑布)가 있다.
02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시평가(詩評家)인 현묵자(玄默子) 홍만종(洪萬宗)의 문학평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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