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소년소(少年沼)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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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3.01 조회6,907회 댓글0건본문
송림계곡의 입구인 백천교에서 아흔아홉 굽이로 알려진 개잔령(779m)의 구부러진 경사길을 지나면 은선대 계곡의 입구인 용천교에 이르게 된다. 외금강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은선대 계곡에는 금강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컸던 유점사(楡岾寺)터가 자리하고 있다.
유점사터를 중심으로 북서쪽의 효운동을 지나 내무재령을 넘으면 내금강 만폭동과 통하고, 서남방향으로 삼거리를 지나 외무재령을 넘으면 내금강 금장동과도 닿아 있다. 또한 유점사터에서 박달고개를 넘으면 송림계곡으로도 갈 수 있다.
용천교에서 유점사터쪽으로 개울을 따라 1.5km쯤 올라가면 왼쪽 개울가에 길이 30m, 너비 19m, 깊이 2.2m나 되는 큰 소(沼)가 나타난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소는, 일명 ‘소년소(少年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은선대 계곡의 유점사는 천여 년 간을 내려온 큰 사찰로서, 신계사(神溪寺)·표훈사(表訓寺)·장안사(長安寺)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유점사는 금강산의 모든 절을 통솔하는 본사(本寺)이고 다른 절들은 본사의 지시를 받는 말사(末寺)로 지정되어 있었다. 본사는 매일 말사들로부터 그날의 불공현황을 보고 받고 다음날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 일은 연락원을 통해 수행되었는데 유점사 주지는 자기 절에서 매사에 책임감 있고 성실하며 동작이 날랜 한 소년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소년은 주지가 시키는 일이라 할 수 없이 맡았으나 일은 참으로 고단했다. 낮에는 조금 눈을 붙였다가 곧 일어나 절에서 시키는 잔심부름을 해야 했고 날이 어두워지면 본사를 떠나 신계사에 들렀다가 비사문(毘沙門)을 지나 험한 비로봉 준령을 넘어 표훈사와 장안사에 가야만 했다. 그리고 조금 쉴 겨를도 없이 곧바로 금장동으로 해서 외무재령을 넘어 유점사의 아침종이 울리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이 길은 이백 리(약 80km)가 넘었으며 내리막길보다 오르막길이 많았고 가파른 벼랑길은 짐승도 넘나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소년은 두려움도 괴로움도 잊고 오직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줄곧 뛰어다니곤 했다.
이렇게 몇 해가 흐르는 동안, 소년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백 리 길을 뛰어다녔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종소리가 울린 후에 유점사 뜰에 들어선 일도 없었다. 비사문을 지키던 비로봉의 범도 소년의 지성에 감동하여 길을 비켜주었고 은사다리, 금사다리은 은빛·금빛을 발하며 가파른 비로봉 길에 사다리가 되어주었다.
사람들은 소년의 이런 근면성에 대해 칭찬하면서 저 소년은 생전에 생불(生佛)을 보게 될 것이라 했고, 어떤 이들은 소년이 금강산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고도 했다. 남들의 칭찬은 대단했으나 오히려 나이든 노승들은 소년을 동정하면서 주지를 두고 몰인정한 사람이라 욕하기도 했다.
어느 해의 섣달 그믐날이었다. 이해 겨울은 날씨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내일이 설날이지만 아직 이 고산지대에는 얼음이 한 번도 제대로 얼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올해는 겨울 없이 해를 넘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때부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더니 이윽고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금강산은 순식간에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만물상의 기암괴석은 밋밋한 설산(雪山)이 되어버렸고 구룡동의 깊은 골짜기도 펑퍼짐해졌다. 모두가 백 년만의 큰 눈이라고 했는데 저녁때부터는 세찬 바람까지 휘몰아쳐 온 천지가 눈보라의 울부짖는 소리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도 소년은 저녁을 대충 먹고 신을 끈으로 단단하게 묶은 후 길을 나섰다.
신계사를 지나 구룡동에 들어서니 눈이 허리까지 찼다. 그러나 소년은 헤엄치다시피 하여 비사문을 지났고 안간힘을 다 써서 비로봉에 올랐다. 그런데 벌써 삼태성(三台星)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여느 날 같으면 저 별들을 외무재령에서 보곤 했으니, ‘늦겠구나!’라는 생각에 소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내려갔다. 표훈사, 장안사에서 일을 보고 외무재령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왔다. 소년이 죽을힘을 다해 뛰니 그 모습은 마치 날랜 표범과도 같았다. 그러나 유점사를 삼 리 가량 앞에 두고 어느 못에 이르렀을 때, 그만 “땡~, 땡~.” 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뛰던 걸음을 멈춘 소년은 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날 아침 추위는 금강산의 겨울이 비로소 닥쳐온 듯 매서웠으나 소년의 누더기 베옷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눈썹과 이마, 앞가슴에는 성에가 하얗게 서려 있었다. 누구나 소년의 그런 모습을 보면 와락 끌어안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어긴 소년은 이대로 유점사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독기어린 주지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부처님도 자기를 책망하는 듯했다.
“아! 끝내 일을 저질렀구나.” 소년은 이제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면서 절에 돌아가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이 바로 나의 명이 끝나는 날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한 소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살얼음 진 못에 뛰어들었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길지 않은 삶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소년을 동정하던 노승들은 소년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부처님이 소년을 가련하게 여겨 일찍 극락에 부른 것이라 여겼다.
이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소년이 빠져 죽은 소를 ‘소년소’라 부르게 되었고, 유점사의 삼성각(三聖閣) 안에는 범의 등에 걸터앉은 한 소년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유점사의 중들은 그 그림이 가련하게 죽은 그 착한 소년의 모습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대순회보>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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