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금강산의 딸 박씨부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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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05 조회6,061회 댓글0건본문
17세기 초, 천하절승으로 알려진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 근처에 박씨 성을 가진 한 처사(處士)가 살고 있었다. 그는 유점대사란 별호를 지니고 있었는데, 학문에 조예가 깊고 무예에도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묘한 도술도 닦은 사람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양반들이 서로 더 많은 권세와 부를 차지하기 위해 당파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런 세태를 잘 알고 있었던 박처사는 나라의 운명에 대해 근심하면서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벗 삼아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 딸은 인물이 고와서 먼저 시집을 갔으나, 맏딸 박소저는 인물이 박색이라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천성이 어질고 아버지에게서 배운 학문과 도술이 또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있었다. 원래 그녀는 하늘나라 사람이었으나 죄를 지어서 금강산에 내려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흉한 허물을 쓰고 살아야만 하는 액운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내막을 잘 알고 있었던 박처사는 그녀를 매우 귀여워하면서 자신의 모든 재주와 지혜를 전해주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팔청춘이 다 되었으니 어쨌든 빨리 배필을 구해주어야만 했다.
한편, 당시 한양에는 홍문관 부제학까지 지낸 이득춘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 40이 넘도록 슬하에 한 점 혈육이 없어서 늘 걱정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며 자식을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던가! 어느 날 득춘이 책상에 의지하여 잠깐 졸고 있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커다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그대가 전생에 지은 죄가 중하여 자식을 못 보게 하였으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정성이 너무도 지극한지라 하늘이 감동하여 귀한 아들을 보내줄 것이니 잘 길러서 집안을 빛내도록 하라.”고 하더니 소매 안에서 구슬 한 개를 꺼내주었다. 그가 꿈결에 신기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그 구슬이 푸른 옷을 입은 사내아이로 변해 안방으로 들어왔다.
득춘이 놀라 깨보니 꿈이었다. 하도 이상해 안방에 들어가 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저도 방금 그런 꿈을 꾸었나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네요.”라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과연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열 달 만에 옥동자를 낳았다. 아기를 낳을 때는 상서로운 기운이 온 집안을 휘감더니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갓난아기를 깨끗이 씻어주었다. 그리고는 “이 아기는 원래 하늘의 태백성(금성)으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왔으니 귀히 기르소서. 아기의 배필은 금강산에 있으니 하늘의 뜻을 어기지 말고 때가 되면 그 사람을 찾아 혼례를 치르소서.” 하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씨 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아이 이름을 시백이라 짓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웠다. 세월이 흘러 시백의 나이 열여섯 살 되던 해에 득춘이 강원도 감찰사에 임명되어 아들을 데리고 감영이 있는 원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고 틈틈이 아들 시백에게 시서(詩書)를 강론하며 학문을 지도해주고 있었다.
어느 날 금강산에 있던 박처사는 감찰사의 아들이 총명하다는 말을 듣고 청혼을 하려고 행장(行裝: 여행할 때 쓰는 물건과 차림)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원주 감영에 도착한 그는 감찰사에게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이득춘이 만나보니 비록 의복은 남루하나 신선 같은 풍채를 가진 훌륭한 인물이라 그를 선생이라 부르며 정중히 대하였다. 박처사는 수인사를 나눈 다음 곧바로 말을 꺼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본즉, 댁의 아드님과 저의 딸은 하늘이 정한 배필이옵니다. 다만 딸자식의 용모가 박색인 것이 부끄럽기는 하오나 감히 이런 사연을 아뢰는 바입니다.”
득춘은 아들이 태어날 때 선녀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흔쾌히 대답했다. “선생의 깊은 뜻을 알겠소이다. 미거한 자식을 따님의 배필로 삼겠다 하시니 삼가 말씀을 좇을까 하나이다.” 감사는 곧 아들 시백을 불러 인사를 시키고 성례할 날을 이듬해 8월 20일로 정했다.
이듬해 봄 이득춘은 왕명에 의해 이조판서로 승급하여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약속한 혼인날이 다가오자 득춘은 아들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그들은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가다가 유점사 부근에 이르러 박처사의 집을 여러 날 찾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인연이 아니라고 판단한 득춘 일행은 그만 돌아가고자 했는데 때마침 박처사가 나타나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그의 처소인 비취정으로 갔다.
다음날 시백과 박소저의 결혼식이 있은 후 이득춘은 박처사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첫날밤을 치르러 간 신랑이 갑자기 신방에서 뛰쳐나왔다. 득춘이 놀라 그의 경솔한 행동을 책망하니 시백이 “소자가 들어갔을 때는 신부가 없다가 나중에 들어왔는데 키가 칠 척이나 되고 허리는 한 아름이 넘으며 눈망울은 너무 커서 보기 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새까만 얼굴빛을 보니 너무 놀라 급히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득춘이 이 말을 듣고 “네 아무리 용렬하기로서니 신부의 생김새가 남만 못하다고 부모가 정해준 사람을 마다하는 방자한 짓을 하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시백은 할 수 없이 다시 신방에 들어갔으나 구석에 누웠다가 새벽닭이 울자 뛰쳐나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사흘 후 득춘은 아들과 신부를 데리고 서울에 가서 선조의 사당에서 예를 올리고 부인과 함께 신부의 인사를 받았다. 시어머니가 신부의 얼굴을 보니 정말 천하에 없는 박색이었다. 부인은 “저런 며느리를 어떻게 한평생 슬하에 두고 보랴.”며 탄식했으나 시아버지는 “비록 못생기긴 했으나 덕이 있고 도술에도 능하니 장차 우리 가문을 빛나게 할 것이오.”라고 두둔했다. 그러나 신랑은 몇 달이 지나도록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외로이 지내게 된 박씨는 시아버지에게 청하여 후원에 초당을 한 채 짓고 살면서 글도 읽고 도술도 익히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대순회보>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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