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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30 조회5,6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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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온(南孝溫)과 김시습(金時習)의 금강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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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2)01은 15세기의 이름난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활달하고 자유분방하여 가까운 벗들과 함께 아름다운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효온이 태어난 이듬해에 수양대군[世祖]의 왕위 찬탈사건이 있었다. 충의(忠義)에 충실했던 그는 앞날이 촉망되는 청년으로 성장한 다음에도 세조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으로 인하여 벼슬길을 마다하였고 일생 은둔생활을 하면서 왕과 옳지 못한 조정의 무리들을 폭로, 조소하는 수많은 시(詩)를 썼다. 그는 세조의 그릇된 처사를 끝까지 반대하였고 당시 금기시되던 사육신(死六臣)의 절의(節義)를 다룬 전기(傳記)인 『육신전(六臣傳)』도 지었다. 그리하여 효온은 후세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 만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는 나이 차이가 비록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남효온이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찾은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이다. 때마침 금강산에는 김시습도 이미 와 있었다. 시습이 금강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효온은 함께 온 친구들과 그가 묵고 있는 숙소부터 찾았다.

  효온은 마당에 들어서며 “동봉(東峰: 김시습의 다른 호)!”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문을 열어젖힌 시습은 마당에 서 있는 효온을 보자 “추강!”하며 마주 달려 나왔다. 오래간 만에 다시 만난 벗들은 서로 얼싸 안고 그리웠던 정을 나누었다.

  시습은 “우리 몇 해 만에 다시 만났는데 저기 산수정(山水亭)에 올라가서 회포를 나누세나.” 하고는 먼저 정자에 올라갔다. 산수정에서 그들은 그간 지내온 소식들을 주고받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서도 두루두루 애기를 나누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질 즈음이었다. 효온 일행과 내일 금강산으로 오르는 것에 대해 논의하던 시습이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갑자기 정자에서 두어 길(한 길은 사람 키 정도임) 되는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급히 달려 내려가 보니 그가 크게 다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모두들 달라붙어 팔과 다리, 가슴을 주물러주고 응급처치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습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모두가 함께 그를 맞들어 정자 안에 눕혔을 때 효온은 “동봉이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금강산을 오르겠소.”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습은 오늘 밤에 치료를 잘해서 만약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으면 억지로라도 당신들을 따라가겠으니 여러분들은 후원에서 자신을 기다려달라고 가까스로 말했다.

  다음날 아침에 효온 일행은 약속한 대로 후원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뜻밖에도 김시습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일행은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시습은 조금도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려 중상을 입은 사람 같지 않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몸가짐으로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천연덕스러워 효온은 “아니, 동봉은 무슨 요술을 부려서 우리들을 속였소?”하며 핀잔 비슷하게 말했다.  

“내가 속였다니, 그럴 리야 있겠나. 추강은 아직 몰라서 그렇지만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온정동 골짜기 안에는 어혈(瘀血)을 푸는 데 특효가 있는 온천이 있다네. 그래서 어젯밤과 이른 새벽에 거기서 한바탕 목욕도 하고 찜질도 했더니 이렇게 씻은 듯이 나았네그려.”

  김시습이 이렇게 말하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운차게 걸어 나가자 효온은 “금강산은 과연 명산이로다!”라고 감탄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남효온은 그때 김시습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조선 시기에 창작된 대표적인 금강산탐승기의 하나인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썼다고 한다.

<대순회보>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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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원호(元昊)ㆍ이맹전(李孟專)ㆍ김시습ㆍ조려(趙旅)ㆍ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조(世祖)와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을 부정하는 소릉(昭陵: 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능) 복위 상소를 올렸다가 배척되었고, 그의 사후에는 이 일로 인해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때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그 후 남효온은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두루 돌아보며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을 내세우기도 했으나 산수를 좋아해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요저서로는 『육신전』과 『추강집(秋江集)』 등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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