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서산대사와 금강산[下]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7 조회9,584회 댓글0건본문
조선시대 최고의 승려로 꼽히는 서산대사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지방 목사의 양자가 되어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낙제했다. 그 와중에 어느 노승의 설법을 듣고 불문에 귀의한 뒤 승과시험을 치러 수석으로 합격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모든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을 비롯한 명산대천을 편력하며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과도 인연을 맺었는데, 제1수제자인 사명당과의 도술겨루기 시합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시 중에서 금강산에 머무를 당시 지었던 삼몽사(三夢詞)와 향로봉 시가 특히 유명하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일체의 승직을 버리고 한양을 떠나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무렵, 조정(朝廷)은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선조 22년(1589)에 발생한 이 사건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그 일당이 모조리 잡히고 정여립은 자살하였다. 그런데 역모(逆謀)에 가담한 자들 중에는 승려 출신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향로봉’ 시를 들어 서산대사도 역모에 가담했다고 거짓으로 고(告)하고 그 제자인 사명당(四溟堂)까지 연루된 것처럼 진술했다.
이내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산사(山寺)에서 각각 붙잡혀 와 옥에 갇히고 말았다. 서산대사는 비록 역모의 혐의를 받고 잡혀 오긴 했지만 태도는 의연했으며, 언변은 조리가 있고 분명했다. 선조는 그의 시집(詩集)을 열람해 보고 그 뛰어난 문장과 충정(忠情)에 감탄하였다. 대사의 억울함을 간파한 선조는 즉시 그를 석방한 뒤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에 시 한 수를 지어 하사하였다. 서산대사도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감사하는 뜻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리고 다시 절로 돌아갔다.
이 사건이 있은 지 불과 3년 만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왜군은 상륙과 함께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전세(戰勢)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몽진(蒙塵)을 떠났다. 그러나 전란의 불길이 평양까지 이르매 다시 의주를 향해 길을 떠나 마침내 압록강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홀연 서산대사가 생각나 그의 소재를 파악하고 급히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이때 묘향산에 머무르고 있던 서산대사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곧장 의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하였다.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달려온 그에게 선조는 나라와 백성들을 구제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대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라 안의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어 싸움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불ㆍ보살의 도움을 빌도록 하고, 그 밖의 모든 승려들은 신이 통솔하여 싸움터에 나가 충성을 다하겠나이다.”라고 아뢰었다.
서산대사의 충정에 감동한 선조는 그에게 전국 승병(僧兵)의 총사령관격인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란 직책을 내렸다. 어전에서 물러나온 대사는 곧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띄우는 한편,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승병이 일어나니 그 수가 5천여 명에 달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사명당 유정(惟政)은 강원도 관동지역에서 궐기하였고 처영(處英)은 호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權慄)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서산대사는 직접 1,500여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명나라 원병(援兵)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밖에도 그의 지휘를 받은 승병들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조 26년(1593) 10월,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들은 평양성 탈환에 이어 어가(御駕)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궁궐과 도성(都城) 곳곳의 복구작업을 펼쳤다. 그리고 식량조달과 무기제작, 정보수집 등을 하면서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조정 신료들이 서산대사의 전공(戰功)을 시기한 나머지 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병을 보낸 명(明)의 조정과 장수들은 물론 적이었던 왜의 진영에까지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이듬해 서산대사는 왜적들이 일단 남으로 쫓겨 가고 나라가 위급한 고비에서 벗어나자 임금을 찾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저의 나이가 이미 팔십이 가까워 근력이 다 되었습니다. 군사 일은 저의 제자인 사명당과 처영에게 맡기고 묘향산 옛집으로 돌아가려 하나이다.”
선조는 연로한 나이를 이유로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뜻을 아름답게 여겨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리고 나라에 있어서의 공(功)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德)을 치하하였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뒷일을 모두 맡기고 그 길로 묘향산으로 갔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지 꼭 3년 만의 일이었다. 묘향산으로 돌아온 그는 수도자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참선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는 한편 교리에 대한 연구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산대사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선을 위주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 후에도 서산대사는 여러 곳을 편력(編曆)하다가 85세가 되던 1604년 1월 생애의 마지막이 닥쳐왔음을 깨닫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날따라 눈이 하염없이 내렸지만 그는 목욕재계를 하고 가사장삼을 두른 뒤 마지막 설법을 하였다. 설법을 마친 그는 사명당과 처영에게 보내는 글을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였다. 기이한 향내가 방 안에 가득하여 사라지지 않더니 삼칠일이 지난 뒤에 비로소 그쳤다고 한다.
서산대사가 열반한 후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스님들이 유골과 사리를 수습하여 보현사와 안심사에 봉안하였다. 유골 중 일부는 사명당이 금강산으로 모시고 가서 서산대사가 거처했던 백화암 뒤편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서산대사비와 함께 부도(浮屠)를 세워 봉안하였다. 그의 문하(門下)에는 1천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중 당대 이름을 떨친 스님만도 7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번창하여 조선 후기 불교계를 주도해 나갔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오늘날까지도 스님들의 필독서로 쓰일 만큼 이론과 실천을 잘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순회보> 100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