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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11 조회6,2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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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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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黑龍)의 해인 2012년 새해가 밝았다. 음력으로 정월(正月) 초하루는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의 하나인 ‘설날’이다. 전통적으로 농경문화권에 속했던 우리나라는 춘하추동 4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왔고, 역법(曆法)이 도입된 이후에는 농경생활에 알맞은 24절기(節氣)에 준하여 농사를 지어왔다. 1월은 한 해가 시작하는 달이고, 계절적으로도 봄이 시작되는 때여서 농경 준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4대 명절(설, 대보름, 단오, 추석) 가운데 두 가지 의례가 정월에 집중되어 있다. 음력 1월을 정월이라고 하는 것도 첫 달을 올바르게 지내야 일 년을 무사히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월 초하룻날인 설날은 우리의 고유어로, 그 어원(語源)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먼저 새해에 대해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고, ‘삼가다[謹愼]’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또 나이의 고어인 ‘살[歲]’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01 설날은 한자로 원단(元旦), 원일(元日), 정조(正朝), 세수(歲首), 연두(年頭) 등 다양하게 불려진다. 그중에서 원(元)은 시작이라는 뜻이고, 단(旦)은 하늘이 밝아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설날의 이칭인 ‘원단’은 새해를 맞아 첫 번째 해가 떠오른다는 의미이다. 근대에 와서 양력설인 신정(新正)의 상대되는 말로써 구정(舊正)이라 일컬어진 적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설날 본연의 명칭이 자리를 잡고 있다. 02 

  설날이 언제부터 유래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7세기에 나온 중국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신라인들이 설날 아침에 서로 인사하고 왕이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며, 일월신(日月神)에게 배례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삼국시대 때 이미 설날이 국가의 중요한 명절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설날이 한식 ⋅ 단오 ⋅ 추석 ⋅ 동지 등과 함께 9대 속절(俗節)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한식 ⋅ 단오 ⋅ 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에 속했다. 이처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중요한 명절로 여겨져 온 설날에 어떤 의례와 풍속, 민간신앙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설날 가장 중요한 행사는 무엇보다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인 차례(茶禮)03이다. 설 차례는 설날 아침 조상에 대한 세배로서 이를 ‘정조차례(正朝茶禮)’라 하고, 떡국이 주식이기 때문에 ‘떡국차례’라 부르기도 하였다. 설날 아침이면 가까운 친척들이 새로 장만한 옷인 설빔을 입고 종가집이나 큰집에 모여든다. 차례를 지내는 가정에서는 아침 일찍 대청마루나 큰방에 설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려놓고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차례상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차례상 앞 첫째 줄에는 붉은 과일류, 둘째 줄에는 포(脯)류, 셋째 줄에는 탕(湯)류, 그리고 넷째 줄에는 적(炙)과 전(煎)류,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놓았다. 이때 4대 조상까지는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5대조 이상은 신주(神主)를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 시제(時祭) 때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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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가 끝나면 집안의 어른들께 웃어른부터 순서대로 절을 하고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歲拜)라고 한다. 집안에서의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설음식과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렸다. 이때 손아랫사람들이 어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또는 “장수하십시오.”라고 하면 어른들은 “금년에는 소원 성취하게” 또는 “자네도 복 많이 받게.”라고 하는 등 처지와 환경에 알맞은 덕담(德談)을 하였다. 세배하기 위해 찾아 온 사람에게는 어른일 경우 술과 떡으로 대접하고, 아이들에게는 술 대신 과일과 세뱃돈을 주며 정담을 나누었다. 이렇게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축원하는 세배와 덕담에는, 한 해 동안 아무 탈 없이 소망하는 일들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복적인 의미가 있었다.

  세배 후에는 조상의 묘소에 찾아가 절하고 살펴보는 예를 행하는데, 이를 성묘(省墓)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조상의 백(魄)이 머물고 있는 묘소를 중시하는 풍속이 있어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아 땅에 머물고 계신 조상께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때 간단한 주과포(酒果脯)를 장만하여 산소 앞에 돗자리를 깔고 가장 윗대 산소부터 차례로 절을 하였다. 성묘 시 어른들은 자손들에게 집안의 내력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조들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조상과 집안에 대한 교육의 기회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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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설날에는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 하고 이때 먹는 술을 세주(歲酒)라고 한다. 집안 형편에 따라 만드는 음식의 가짓수와 양은 다르지만 어느 집에서나 공통적으로 준비하는 음식은 ‘떡국’이었다. 떡국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흰 쌀을 쪄서 길게 뽑은 가래떡을 납작하게 썰어서 끓인 것이다. 옛날에는 쌀밥 한 그릇이 귀했기 때문에 떡은 환갑잔치나 명절과 같은 큰 행사가 있는 날만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설날 아침 고기가 들어간 떡국은 명절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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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 때 사람인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떡국을 병탕(餠湯)이라 하여 제사와 접대에 필수적인 음식으로 꼽고 있다. 이것을 만드는 방법으로 멥쌀로 만든 가래떡을 돈같이 얇게 썰어 장국에 넣고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끓인다고 적고 있다. 우리 속담의 “꿩 대신 닭”이란 말은 꿩고기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대신 닭을 넣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또 나이를 물을 때 떡국을 몇 그릇이나 먹었냐고 묻기도 하였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설날 흰 떡국을 끓이는 풍습은 흰 색의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부활신생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 밝음의 표시로 흰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을 둥글게 썬 것은 태양의 형상을 본뜬 것으로 우리 민족의 태양숭배사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04

   설날이면 떡국과 함께 만두를 먹는다.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중부지방은 떡국에 만두를 넣어 먹고 남부지방은 만두를 넣지 않는다. 반면 함경도나 평안도 같은 이북에서는 떡국은 먹지 않아도 만두는 먹는다. 어쨌든 떡국과 만두는 설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4세기 초 진(陳)나라 때의 인물인 노심(盧諶)은 만두가 춘사(春祠: 정월 초하루) 때 하늘에 바치는 제물로 쓰인다고 하였다. 즉 만두는 봄이 시작되는 첫날 한 해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면서 하늘에 올리던 제수용품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흔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만두는 떡과 마찬가지로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설과 같은 명절이나 불공을 드릴 때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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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와 성묘를 마치고 맛있는 설음식을 먹고 나면 가까운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즐거운 놀이를 하였다. 윷놀이는 설날 가장 성행하던 놀이로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대개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즐겼던 윷놀이는, 척사(擲柶) 또는 사희(柶戱)라고도 하며 고대 부여족 시대에 돼지[도] ⋅ 개[개] ⋅ 양[걸] ⋅ 소[윷] ⋅ 말[모]을 다섯 부락에 나누어주어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 말의 문신 이색(李穡)은 『목은집』에서 사람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 변화가 무궁하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이변이 많아 턱이 빠지게 웃을 정도로 재밌다고 기록하였다. 윷놀이는 재미로도 했지만 윷판은 농토, 윷말은 윷패에 따라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놀이가 풍년을 가져온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이것을 통해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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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뛰기는 음력 정초에 설빔으로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두툼하고 긴 널빤지 밑을 짚단이나 가마니 같은 것으로 중심을 잡고,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가 번갈아 튀어 오르며 발을 구르는 놀이다. 널뛰기는 설비와 방법이 간단하면서도 유쾌하고 활발하게 놀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즐겼던 놀이다. 그리고 연날리기는 겨울철 바람을 이용하여 섣달 그믐 무렵부터 시작해서 대보름까지 즐겼다. 정월 대보름에는 연에다 액(厄) 자나, 송액(送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 쓰고 자기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적어 연을 날렸다. 그러다가 연줄을 끊어 날려 보내거나 태워버림으로써 한 해의 액을 막고 복이 들어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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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년을 맞이하는 설날에는 다양한 민간신앙에서 비롯된 풍속들이 행해졌다. 먼저 신년을 송축하기 위해 왕과 신하들이 서로 주고받던 그림인 세화(歲畵)가 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세화란 정초에 도화서(圖畵署)에서 수성(壽星) ⋅ 선녀 ⋅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고관끼리 서로 선물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군상을 그린 그림을 궁궐의 대문에 붙였는데, 이를 문배(門排)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이것을 본떠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문에 많이 붙였다. 근래에는 용(龍) ⋅ 호(虎)라는 한자나 그림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세화나 문배는 신년을 축하하고 사악한 것을 물리쳐 재앙을 막고자 문에 붙이던 문신(門神)과 관계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조리는 설날 이른 아침에 장만하여 벽에 걸어놓아 한 해의 복을 빌던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대나무를 쪼개 만든 조리가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해의 복을 조리로 일어 얻는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 복조리 장수가 “복조리 사려.” 하고 외치면 주부들이 다투어 복조리를 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대개 일년 동안 사용할 만큼의 조리를 사서 실이나 엿 등을 담아 문이나 벽 위에 걸어두었으며, 이것 또한 장수(長壽)와 부귀(富貴)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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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밤이면 하늘에서 야광귀(夜光鬼)라는 귀신이 내려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신(俗信)이 있었다. 이때 신발을 야광귀에게 도둑맞은 사람은 그해의 운수가 불길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설날 밤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신을 방이나 다락에 넣어두고 일찍 잤다. 그리고 체를 마루 벽이나 장대에 걸어놓으면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느라 신을 훔쳐갈 생각을 잊고 첫닭이 울 때 도망간다고 생각했다. 이 외에도 ‘청참(聽讖)’이라고 해서 새해 첫날 새벽에 밖에 나가서 제일 처음 어떤 짐승의 소리를 들었느냐에 따라 그해의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또 온 가족이 한 해 동안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두었다가 설날 황혼이 질 무렵에 문밖에서 태우면 나쁜 병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대표적 명절인 설날에 선조들은 세속을 떠나 조상과 함께하는 성스러운 시간을 가졌고, 인사와 덕담을 나누며 정신적 유대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민속놀이와 민간신앙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짐은 물론 액운을 막고 새해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근본을 되돌아보고 조상에게 올 한 해에도 집안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진년(壬辰年) 새해를 맞아 여주본부도장에서도 정월 초하룻날 축시(丑時)에 ‘원단치성’을 모신다. 구천상제님께서 이 땅에 강세하셔서 대순하신 지 142년이 되는 해이다. 도장에서 모시는 치성의 대상은 이 우주를 총할하시는 구천상제님과 옥황상제님, 그리고 영대(靈臺)의 모든 천지신명과 조상 선령신들이다. 새해 첫날 치성에 참례하는 모든 도인들은 60년 동안 공에 공을 쌓아 이 땅에서 상제님의 대순진리(大巡眞理)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신 조상 선령신들의 은혜에 대해 마음속 깊이 감사드려야 한다. 천재지변과 가난, 전쟁으로 인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든 인류와 군생만물에게 상제님의 덕화(德化)가 펼쳐져 만복(萬福)이 깃들 수 있도록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수도인 본연의 임무에 지극한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 1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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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지영, 「韓ㆍ中名節文化比較硏究」, 경기대학교 교육대학원, 2007, p.24.

02 1896년 1월 1일, 우리나라에 태양력이 수용된 후에도 전통 명절인 설날은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문화 말살정책의 영향으로 음력설에서 양력설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에 ‘민속의 날’이라 하여 음력설이 다시 부활하였고, 1989년에는 오늘날의 ‘설날’로 개칭되면서 현재와 같이 3일간의 공휴일로 지정되었다.(『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04, pp.37~38)

03 매달 초하루와 보름, 명절과 조상 생일에 간단히 지내는 낮 제사.
04 동연, 「한국의 설날과 중국의 춘절풍속 비교연구」, 부산외국어대학교대학원, 2009, p.3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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