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원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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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03 조회6,003회 댓글0건본문
신명의 조화는 인간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는 없지만, 수도과정에서 최소한 한두 번쯤은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의 뱃속에 출입케 하여 그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니”01라는 말씀을 접할 때마다 상제님의 덕화에 감사하며 내 자신을 더더욱 가다듬게 된다. 벌써 20년도 훌쩍 넘은 일이지만, 나에겐 정말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중·고등학생 때 나는 체증을 자주 앓아 손가락 끝을 따러 한의원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참 많이도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학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던지 공부에 신경을 좀 많이 썼다 싶으면 어김없이 배가 더부룩해지고 체증이 생겨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하던 1990년 3월 친구를 만나 입도를 했다. 포덕소를 오가며 교화를 듣고 도심(道心)을 조금씩 키워가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대학생 제주연수반의 일원이 되어 난생처음 제주도 땅에 발을 디뎠다.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레며 강사분의 교화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부지런히 움직였다. ‘교화를 잘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너무 빠져들었던 것일까?’ 고질적 체증으로 4일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질 못했다. 과거에도 수차례 겪었던 증상이라 ‘또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방면에 돌아와서 선각들에게 체증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했다. 선각들의 공통된 의견은 내 겁액이 발동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특히 조상들의 겁액과도 연관이 있다 하면서, 열심히 포덕하여 많은 덕을 쌓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과연 포덕을 많이 하면 이 지긋지긋한 체증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도가 좋아 그저 열심히 포덕했다. 이후에도 간간이 체하긴 했지만, 겁액이 풀려나가 그런 건지 크게 힘들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쓰라린 기억이 있다.
1992년 가정형편으로 휴학하고 포천 대진대학교 공사현장에서 1년간 작업할 때의 일이다. 막 교령 임명을 모신 때라 도심은 나름 출중했지만, 작업이 익숙하지 않아 허둥대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4개월쯤 지나 작업이 어느 정도 숙련이 되자 조장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책임감에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증이 시작되었다. 평생 이렇게 심각한 체증은 처음이었다. 속은 더부룩하고 반찬 냄새도 역겨워 하루에 빵 1~2개만 겨우 먹으며 근근이 버텼다. 기력이 있어야 일을 할 텐데,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어 겪어야만 했던 그 고통의 나날들 …. 살은 홀쭉해지고 퀭하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체증에 시달려야 할까?’ 이 물음의 답을 찾고자 골몰했다. ‘혹시 아는 체, 잘난 체를 해서 벌을 받는 것인가?’ ‘체질적으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선각들 말대로 겁액의 발동인가?’ 별생각을 다 했지만, 끝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고심하며 지내다 조금씩 증상이 호전되었고 작업이 끝나 방면으로 복귀하였다. 포덕사업에 매진하다 1993년 겨울에 교감 임명을 모시게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날 불현듯 ‘강박관념·책임감·의무감’ 이런 말들이 떠오르며 ‘나의 성격에 문제가 있구나,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강박관념·책임감·의무감 이런 마음이 나를 옥죄는 욕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온몸이 한 꺼풀 벗겨지듯 하더니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며 안심·안신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후로 그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체증으로부터 난 완전히 해방되었다. 신명의 조화를 통해 체질과 성격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었다.
중·고등학생 때 나는 체증을 자주 앓아 손가락 끝을 따러 한의원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참 많이도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학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던지 공부에 신경을 좀 많이 썼다 싶으면 어김없이 배가 더부룩해지고 체증이 생겨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하던 1990년 3월 친구를 만나 입도를 했다. 포덕소를 오가며 교화를 듣고 도심(道心)을 조금씩 키워가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대학생 제주연수반의 일원이 되어 난생처음 제주도 땅에 발을 디뎠다.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레며 강사분의 교화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부지런히 움직였다. ‘교화를 잘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너무 빠져들었던 것일까?’ 고질적 체증으로 4일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질 못했다. 과거에도 수차례 겪었던 증상이라 ‘또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방면에 돌아와서 선각들에게 체증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했다. 선각들의 공통된 의견은 내 겁액이 발동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특히 조상들의 겁액과도 연관이 있다 하면서, 열심히 포덕하여 많은 덕을 쌓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과연 포덕을 많이 하면 이 지긋지긋한 체증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도가 좋아 그저 열심히 포덕했다. 이후에도 간간이 체하긴 했지만, 겁액이 풀려나가 그런 건지 크게 힘들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쓰라린 기억이 있다.
1992년 가정형편으로 휴학하고 포천 대진대학교 공사현장에서 1년간 작업할 때의 일이다. 막 교령 임명을 모신 때라 도심은 나름 출중했지만, 작업이 익숙하지 않아 허둥대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4개월쯤 지나 작업이 어느 정도 숙련이 되자 조장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책임감에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증이 시작되었다. 평생 이렇게 심각한 체증은 처음이었다. 속은 더부룩하고 반찬 냄새도 역겨워 하루에 빵 1~2개만 겨우 먹으며 근근이 버텼다. 기력이 있어야 일을 할 텐데,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어 겪어야만 했던 그 고통의 나날들 …. 살은 홀쭉해지고 퀭하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체증에 시달려야 할까?’ 이 물음의 답을 찾고자 골몰했다. ‘혹시 아는 체, 잘난 체를 해서 벌을 받는 것인가?’ ‘체질적으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선각들 말대로 겁액의 발동인가?’ 별생각을 다 했지만, 끝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고심하며 지내다 조금씩 증상이 호전되었고 작업이 끝나 방면으로 복귀하였다. 포덕사업에 매진하다 1993년 겨울에 교감 임명을 모시게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날 불현듯 ‘강박관념·책임감·의무감’ 이런 말들이 떠오르며 ‘나의 성격에 문제가 있구나,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강박관념·책임감·의무감 이런 마음이 나를 옥죄는 욕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온몸이 한 꺼풀 벗겨지듯 하더니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며 안심·안신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후로 그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체증으로부터 난 완전히 해방되었다. 신명의 조화를 통해 체질과 성격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었다.
<대순회보 182호>
01 교법 3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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