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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황진이의 금강산 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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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14 조회6,1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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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진이(黃眞伊, ?~?)는 16세기에 활동한 조선시대의 명기(名技)이자 여류시인이다. 그녀는 개성에 살던 양반 황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으며 시(詩)ㆍ서(書)ㆍ음률(音律)에도 뛰어난데다 용모까지 출중해 더욱 유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인근 각지에 널리 퍼졌고 적지 않은 일화들도 생겨났다.

  그녀가 열다섯 살이던 해에 한 동네에 살던 총각이 짝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총각의 상여(喪輿)가 황진이의 집 대문 앞에 이르자 말뚝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전후사정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란 황진이가 소복단장을 하고 달려 나가 자신의 치마로 관을 덮어주니 그제야 상여가 움직였는데, 일설에는 이 일이 그녀가 기생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재색을 겸비한 황진이가 기생이 된 후 그녀의 이름은 곧 팔도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개성에는 수도에만 정진해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만석(지족선사)이란 스님과 성리학자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있었다. 황진이가 10년간 면벽수도를 하며 정진하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때부터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든가, “만석 중 놀리 듯하다.”라는 속담이 새로 생겼다.

  그리고 그녀는 지조가 굳고 인품이 고결하다고 소문난 서경덕을 찾아가 제자가 된 후 그를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오직 스승의 예로써 대할 뿐이었다. 서경덕의 높은 인격에 탄복한 그녀는 평생 그를 사모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그 후 개성사람들은 용모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진이를, 고매한 인품과 절개를 지닌 서경덕과 화려한 절경으로 유명한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꼽으며 자랑하였다.

  본래 양반 중심의 사회제도와 유교 윤리의 속박을 싫어했던 황진이는 주로 남녀 간의 애정을 서정성 짙은 목소리로 섬세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노래한 시조작품을 많이 남겼다. 또한 경치 좋은 곳의 유람도 즐겼던 그녀는 박연폭포(황진이 作)처럼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대해 노래한 작품들도 많이 썼다. 그런 황진이가 세상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금강산을 찾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녀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한양(漢陽)의 한 젊은이가 개성으로 놀러왔다. 그도 유람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진이는 금강산 구경을 같이 가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웃나라 사람들도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원(願)이라 하온데 우린 조선 사람으로서 자기 나라에 있는 금강산을 못 본다면 어찌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우연히 당신을 만나보니 길동무 삼아 함께 유람을 갈 만한 것 같습니다.” 이에 젊은이도 반기며 선뜻 길을 나섰다.

  황진이는 금강산 유람에 짐이 되지 않도록 굵은 삼베 치마저고리를 입고 망태기를 짊어진 채 손에 지팡이를 쥐는 간단한 행장만 꾸렸다. 함께 가는 젊은이 또한 무명옷에 삿갓을 쓰고 양식을 등에 짊어졌다. 얼핏 보면 허물없는 오누이처럼 그들의 차림새에는 까다로운 남녀 간의 예의범절에서 벗어나 금강산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려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유람에 나선 그들은 수백 리 길을 걸어 금강산에 이르렀다. 금강산의 절경에 접한 그들은 과연 소문 그대로인 금강산의 모습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였다. 날마다 희열에 넘쳐 금강산의 명소들을 찾은 황진이와 젊은이는 서로 노래를 부르고 화답시도 읊으면서 산천경개를 마음껏 즐겼다. 꿈결처럼 날은 흘러 어느덧 가지고 갔던 약간의 노자가 다 떨어져 그들은 굶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몰골은 초췌해져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다니니 황진이의 발에는 노독까지 생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진이는 그만 그 젊은이의 종적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애타게 찾아보았으나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다 돌아보지 않고서는 쉽게 떠날 황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노독이 오른 다리를 끌고 민가나 암자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금강산의 명소들을 다 돌아보고서야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내친걸음에 태백산을 거쳐 우리나라 5대 명산의 하나인 지리산까지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라도 나주에 이르렀다. 마침 그곳에서는 나주목사가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주는 물론 부근의 한다하는 명창들까지 모여들어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집이 떠나갈 듯 소란스러웠다.

  황진이는 말도 없이 잔치판에 슬며시 끼어들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를 건드러지게 불렀다. 때 아닌 고운 목소리에 명창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목사 이하 좌중도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행색으로 보아 미친년이 분명한데 어디서 저런 노랫소리가 나오는지 의아해 하며 모두 황진이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목사가 이방을 불러 그녀의 신분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러자 그녀가 바로 팔도에 이름난 개성의 명기 황진이임을 알게 된 목사는 그녀를 가까이 불러놓고 잔치의 귀빈으로 모셨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금강산 유람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이처럼 자기 생애에 숱한 일화를 남겼던 여류시인 황진이는 마흔 살을 전후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금강산 구경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후세에 전해오고 있지만 금강산을 노래한 황진이의 시가 남아있지 않아 애석할 따름이다.

<대순회보>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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