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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정수동의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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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31 조회5,4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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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윤(鄭芝潤, 1808~1858)은 조선 말기에 풍자와 해학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태어날 때 손바닥에 목숨 수(壽)자가 새겨져 있었고, 이름의 지(芝)자가 『한서(漢書)』에 지생동지(芝生銅池)01로 있다 하여 동(銅)자를 따서 ‘수동(壽銅)’을 호로 삼았다. 항간에서는 이름보다 정수동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는, 당대의 문인이자 재상이었던 조두순(趙斗淳)ㆍ김흥근(金興根)ㆍ김정희(金正喜)와도 친분이 있었다.

  정수동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아무리 난해한 문장이라도 한 번 훑어보면 그 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국정(國政)이 부패할 대로 부패해진 시절에 살았던 그는 중인 신분인 역관(驛館) 집안의 출신이었던 탓에 남다른 포부와 재능을 펴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술과 시, 해학과 풍자로 세상을 희롱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때로는 웃음 속에서 정통을 찌르는 시문으로, 때로는 야유와 조소가 뒤섞인 재치 있는 해학과 유머로 재물과 권세욕에 사로잡힌 사대부들과, 아첨과 속임수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벼슬아치들의 부정한 행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조롱하며 시정에 파묻혀 지냈다.

  한때 조두순이 사역원(司譯院)02 제조(提調: 2품 이상관 겸임)로 있을 때 그의 재간을 아껴 그를 참봉(參奉: 종9품)으로 발탁한 적이 있었으나 몇 달 만에 달아나버렸다. 정수동은 그 연줄을 타고 부귀영화를 탐하기보다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마음껏 양반세상을 비웃기도 하고 명산대천을 찾아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묻히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택했다. 그래서인지 일 년 중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태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해산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정수동은 순산을 시키자면 불수산(佛手散: 해산 전후에 쓰는 처방)을 지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부리나케 옷을 주어입고 집을 나섰다. 구리 골에 있는 단골 약방을 찾아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길거리에서 마주 오던 친구 두 사람과 딱 마주쳤다.

  “아니! 두 분이 함께 어디를 그렇게 가시오?” 정수동이 먼저 반갑게 인사 겸 묻자,

  “마침 잘 만났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둘이 함께 오면서 자네 이야길 하던 참일세.” 하고 친구들도 반색을 하며 말했다.

  “내 얘기를! 그런데 대체 어디를 가시는 겐가?”

  정수동이 궁금해서 다시 묻자 한 친구가, “우리 말인가. 금강산유람을 떠나는 길일세.”

  그가 깜짝 놀라며 그들의 행색을 찬찬히 살펴보니 발에는 짚신에 발감개를 튼튼히 하고 등에는 큼직한 봇짐을 진 것으로 보아 두 친구가 금강산으로 가는 걸음이 분명했다.

  “오라. 그래서 두 분이 내 얘길 하셨군그래.” 정수동은 작심한 듯 머리를 끄덕이며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바로 맞혔네. 그래 자네도 우리와 동행하지 않으려나?”

  “그야 물어보나 마나지.”

  친구들의 권유에 평소 금강산유람이 소원이던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응낙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지금 산모의 약을 지으러 간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친구들이 이끄는 대로 한양을 빠져나와 금강산으로 향했다.

  금강산 경내에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정수동 일행은 넋을 빼앗는 절경에 취해 소문난 명소에서 보름씩 혹은 열흘씩 묵으며 도도한 시흥(詩興)과 주흥(酒興)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던 중 그들 일행은 금강산 4대사찰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유점사(楡岾寺)에 들렀다. 그곳의 대웅전에서 불상들을 차례로 돌아보던 그들이 천수관음상에 이르렀을 때, 정수동의 입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아차!” 하는 신음소리가 튀어 나왔다.

  “아니 왜 그러시나?”

  친구들이 의아해서 묻자 그는, “내 이런 건망증을 봤나. 우리가 구리 골에서 만났을 때 사실 나는 출산을 앞둔 집사람을 위해 불수산을 지으러 약방을 찾아가던 길이었다네.” 하며 난색을 지었다.

  “뭐 불수산을? 그럼 그때 부인이 …….”

  “글쎄 그랬는데 길에서 자네들을 만나 금강산유람을 간다는 바람에 그만 앞뒤를 생각지 않고 따라와 버렸으니 …….”

  정수동이 자신의 건망증을 탓하며 더욱더 난색을 짓는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한 친구가 “이런 사람을 봤나. 그런데 우리가 금강산에 온지 1년이 되도록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떻게 다시 그 생각을 해내셨나?” 하고 물은즉,

  “저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을 보니 문득 불수산(佛手散)이 생각나네그려.” 하고는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며칠 후 금강산유람을 마친 정수동이 서울로 돌아와 자기 집 대문으로 들어서니 방 안에서 사람들이 가득 모여 법석이고 있었다. 떠들썩거리는 것으로 보아 불길한 일은 아닌 것 같고 필시 뭔가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듯싶었다.

  다름 아니라 이날은 바로 정수동이 불수산을 지으러 집을 나간 뒤에 다행히도 부인이 순산해 낳은 아들의 첫 돌을 잡는 날이었다.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그가 큰 기침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서자 방 안에 있던 부인 김씨가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띠우고 분주히 마루로 나와 그를 맞았다.

  “서방님이 원체 성미가 급하시어 아이 돌을 잡는 날이 되어서야 불수산을 지어가지고 오십니다그려.” 하고 한마디 하였다.

  부인의 말에 정수동은 빙그레 웃으며 “내 성미는 본래 그렇듯이 급하려니와 미처 불수산이 오기도 전에 아이 돌잔치부터 차리는 부인의 성미도 과히 나 못지않은 것 같소.”라며 응수하였다. 곁에서 이들 부부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던 일가친척들은 모두 배꼽을 붙잡고 웃으며 한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다고 한다. 

<대순회보> 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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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영지(靈芝)는 구리로 만든 홈통(물이 흐르거나 타고 내리도록 만든 물건)에서 자란다.

02 고려ㆍ조선시대의 번역ㆍ통역 및 외국어 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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