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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김시습과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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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3 조회5,1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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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字: 본명 외에 부르는 이름)는 열경(悅卿)이며, 휘(諱: 돌아가신 분의 생전 이름)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서울 성균관 뒷마을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시문(詩文)을 잘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깨쳤고 3세 때 유모가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다섯 살 때 『중용』과 『대학』을 익히면서 신동으로 세상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에 대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재상이었던 허조(許稠)가 김시습의 집을 직접 찾은 적이 있었다. 그가 시습에게, “네가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노(老)자 운을 달아 시 한 수를 지어 보아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습은 그 자리에서 “늙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이지요(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를 지었다. 이를 보고 허조는 “너는 과연 신동이로구나!” 하며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世宗)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승정원으로 불러 재주를 시험해 보았다. 도승지로 있던 박이창(朴以昌)이 김시습(金時習)이란 이름과 벽에 걸린 산수도(山水圖)를 넣은 시구(詩句)를 각각 짓게 했더니, 시습이 이내 시구를 지어 읊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에게 장차 성장하면 크게 기용하리라고 하명하면서 비단 30필을 하사하였다. 이 일로써 그의 명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김오세(金五世)’란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시습이 15세 되던 해에 모친이 돌아가시자 외가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하지만 3년이 채 못 되어 믿고 의지하던 외할머니마저 별세해 다시 본가에 왔을 때는 중병을 앓고 계시던 아버지를 돌보아야만 했다. 이렇게 그는 어린 시절을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학문을 연마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을 떠나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간 후에는 선배들이 이룩한 연구 성과들을 체득하는 한편 장차 국가의 큰 동량이 되고자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김시습이 20살 되던 해인 1455년에 세종의 동생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집권 후 세조(世祖: 수양대군)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70여 명의 문무양반들을 처형하고, 세종 이후 조선의 의례ㆍ제도ㆍ문화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을 철폐했다. 이런 세조의 폭거에 불만을 품었던 200여 명의 학자들은 관직을 버리고 깊은 산이나 외딴 섬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세조의 단종폐위 사건은 장래가 총망되던 김시습의 운명을 예기치 못한 곳으로 이끌었다. 삼각산에서 학문에 몰두하던 그는 이 소식을 접하고 울분을 토로하며,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몸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운 일이다. 만약 그것이 불가하다면 혼자 그 몸을 착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책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불문(佛門)에 귀의한 뒤 법호를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학문과 세상에 대한 뜻을 잃은 그가 전국 각지로 방랑의 길을 떠날 때 머리를 깎은 중의 차림이었지만 수염만은 깎지 않았다. 이런 자신의 행색에 대해 그는 “머리를 깎음은 세상을 피함이요, 수염을 남김은 대장부의 뜻을 나타내려 함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방랑생활은 9년간 북으로 묘향산,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는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김시습이 개성과 관서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처음으로 관동지방에 발길이 닿은 것은 26세 때였다. 그는 조선 제일의 명승지로 알려진 금강산과 ‘관동 8경’을 돌아보고 나서, “사람의 마음과 눈을 씻겨주니 유쾌한 오늘의 회포는 도무지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고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였다. 이때 그가 지은 시들을 엮어 편찬한 문집이 『유관동록(遊關東錄)』인데 그중 ‘관동의 명산’이라는 시에서 그는 금강산과 그 일대의 장엄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격조 높게 노래하였다.

   

오대산 푸르러 일만겹이요

금강산 희디희여 일천층이라

국도섬 파도소리 우뢰마냥 장하고

총석정 돌기둥은 서슬이 엄하여라

삼일포(三日浦) 모래밭은 깨끗도 한데

단서암(丹書岩) 여섯글자01 이끼 끼었네

하늘에 잇닿은 듯 바다 넓은데

삼신산 불로초도 여기서 캐겠구나

   

  이처럼 그는 전국 각지로 방랑생활을 계속하면서 여러 편의 작품을 썼고 이를 엮어 시문집으로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그 뒤를 이은 성종(成宗)이 그를 불렀으나 불의(不義)한 곳에서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그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하여 후세에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끝까지 반대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금강산을 유람할 당시 김시습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에서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을 많이 지었는데, 당시 그의 창작과 관련해 이런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찰 부근의 만폭동(萬瀑洞)계곡에는 수많은 폭포와 소(沼)들이 즐비해서 여름에 한참 소나기가 퍼부으면 순식간에 계곡물이 불어나 세차게 흘러내리곤 하였다. 시습은 이런 때면 으레 100여 장의 종이를 준비해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여울목의 너른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추악한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시들을 썼다. 시 한 편을 쓰면 목이 메인 채 읊다가 여울물에 띄워 보내고, 또 한 편을 써서 읊은 다음 다시 띄워 보내곤 하였다. 이때 그가 하루에 쓴 시는 무려 백여 수에 달했다고 한다.

  뒷날 누군가 이런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세차게 흐르는 물 어디로 가나

굽이치며 흘러서 바다로 가지

푸른 하늘 한 조각 같은 종이쪽에

읊고 쓰고 쓰고 읊고 여념없었네

  

<대순회보>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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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국도섬과 총석정(叢石停), 삼일포는 모두 해금강(海金剛) 유역의 해안 절벽과 호수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단서암은 삼일포 호수 한 가운데에 신라 사선(四仙)이 놀았다는 사선정(四仙停)이 놓여 있는 바위이다. 여기에 사선의 한 사람인 술랑이 세 자씩 두 줄로 써놓은 ‘術郞徒 南石行(술랑도 남석행)’이란 글자가 붉은색으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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