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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화가 정선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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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2.23 조회4,9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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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의 한 사람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형편이 매우 궁색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손수 꾸려나가면서 어머니를 봉양해야만 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정선은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훌륭한 화가가 되려는 꿈을 키워가던 그는 틈만 나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나머지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일 보는 산천의 풍경들은 그에게 볼 때마다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처럼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태어난 것을 무한한 행복으로 여겼으며, 그것을 자신의 그림 속에 재현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곤 하였다. 


  남다른 포부와 뜻을 키워오던 정선이었기에 도화서의 화원이 된 이후 그가 그린 풍경화들은 다른 문인화가들의 그림과 대조되는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당시 문인화가들은 자신의 것을 외면한 채 중국의 화풍을 모방해 시문(詩文)이나 자기의 환상 속에서 고안해 낸 그림을 그리는 데만 몰두하였다. 하지만 정선은 종이와 붓을 들고 현실 속에 뛰어 들어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다.01 그리고 산수화에 모호한 제목을 달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정선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 구체적인 화명(畵名)을 붙였다.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을 생동감 있게 그린 정선의 풍경화들에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조선에 왔던 중국 사신의 한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보았던 정선의 그림의 진가를 압록강을 건넌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정선의 풍경화 중에는 특히 천하명승 금강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금강산전도>, <구룡폭포>, <만폭동>, <옹천> 등을 비롯한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들을 그릴 때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천하 만방에 알리고 싶은 열망에서 한 획 한 획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런 정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정선이 금강산일대의 이름난 명승, 고적들을 둘러보고 나서 ‘관동 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해금강의 총석정(叢石亭)을 보려고 강원도 북부의 통천(通川)을 향해 고성(高城)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예로부터 고성고을에서 통천으로 가려면 험한 산줄기를 타고 몇 십 리를 돌아가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뒤집어 놓은 독처럼 생겼다 하여 옹천(瓮遷)이라 불리는 큰 바위의 등허리를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다. 옹천길을 택한 정선이 떠날 때 고성사람들은 그 길이 매우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하면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 때는 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화통을 등에 진 정선은 부지런히 걸어 어느덧 옹천 밑에 이르렀다. 땀을 닦고 바라보니 듣던 대로 뒤집어 놓은 독처럼 생긴 우람한 바윗덩어리가 솟아 있는데 그 밑동은 바닷물 속에 잠겨 있었다. 통돌로 된 큰 바위는 만고풍상을 다 겪는 사이에 비바람과 파도에 깎이고 씻기고 다듬어져서 그 겉면이 푸르스름한 흰빛으로 반들거렸고, 어느 곳이나 발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매끈매끈하였다. 


  사람들은 옹천의 바위를 쪼아 두어 자 폭의 좁은 길을 내었는데 그것은 마치 큰 독의 허리에 두 줄기 작은 선을 그은 것처럼 보였다. 이 길로는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수 있었고 말은 한 마리만 지나갈 수 있었다. 위쪽은 밋밋하고 아래쪽은 파도에 밀린 검푸른 바닷물이 소용돌이 치는 천길 벼랑이어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선은 화가의 눈길로 옹천을 바라보면서 길이 험하다는 생각보다는 천연의 보루처럼 근엄하고 용맹스러워 보이는 바위의 기상이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정선은 옹천의 벼랑길에 들어섰다. 마침 날씨도 나쁜 편이 아니어서 이따금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해가 절벽 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얼마쯤 가다가 수염발을 드리운 풍채 좋은 노인이, 메고 가던 그물을 내려놓은 채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다가서자 노인은 정선의 행색을 눈여겨보더니 “어디서 오는 길손이시오?” 하고 물었다. 

  정선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지금 통천 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노인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는 옹천 아랫마을에 사는 어부인데 그쪽으로 고기잡이를 가던 길이니 함께 쉬어가자고 하면서 자리를 권하였다. 이에 정선은 화통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비록 선비의 행색이었지만 양반 티를 내지 않는 그의 태도에 호감이 간 노인은 “초행길일 터인데 옹천길이 무섭지 않으시오?” 하고 스스럼없이 물었다.

  “원 노인장도, 무섭기는요, 오히려 범접하기 어려운 그 기상이 마음에 듭니다.” 하고 자신이 느꼈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노인은 그 말에 더욱 반색을 하며 말했다. “하긴 그 말씀이 옳소이다. 옹천에서 왜적들이 호되게 당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래요! 노인장, 그 이야기를 좀 들려줄 수 없겠소?”

  “그야 있다마다요.” 노인은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고려 말엽에 왜구들이 들끓었는데 남쪽 지방을 노략질하다 못해 점점 기승을 부리며 북쪽으로 침입해 왔지요. 그놈들이 여기 통천, 고성지방까지 기어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농가를 불사르며 닥치는 대로 재물을 빼앗았소이다. 어느 해 가을에는 왜구들이 통천군 일대에 침입하여 한바탕 노략질을 한 뒤에 고성으로 밀려오고 있었지요. 


  놈들의 행패에 격분한 강원도의 군사들과 금강산 부근의 백성들은 왜구들을 몰아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적을 물리치기에 적합한 장소인 이곳 옹천에 매복해 있었소이다. 고성을 향해 남하하던 왜구들이 옹천의 고갯길에 들어섰을 때 너무도 험한 지세에 놀란 나머지 이런 곳에서 고려의 군사들을 만나면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이라고 수군덕거리며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옹천의 벼랑길을 넘어오고 있었소이다. 그들의 무리가 모두 벼랑길에 들어서자 난데없이 화살 한 대가 “핑” 하는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날아왔지요. 고려 군사들의 공격신호였습니다. 그러자 옹천의 뒷산 마루와 남북의 개울가에 매복해 있던 우리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앞뒤 좌우에서 왜놈들을 들이쳤지요. 


  벼랑길에서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서로 밀치고 부딪치다가 고려 군사의 화살에 맞고 백성들이 굴린 돌에 맞아 첨벙첨벙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소이다. 성난 파도는 놈들을 단숨에 삼켜 바위로 밀어붙였지요. 왜구들은 모조리 바다에 수장되어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고, 크게 이긴 우리 군민들은 승전고를 올릴 수 있었소이다. 그때부터 이 고을 사람들은 옹천을 왜놈들이 빠져죽은 벼랑이라고 해서 ‘왜륜천(倭淪遷)’이라 불렀지요. 

 


  노인이 이야기를 끝마치자 정선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 노인의 손목을 잡았다. 

  “노인장,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소.”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시오?” 노인은 황급히 마주 일어섰다. 

  “그런데 노인장은 이 고장에서 오래 살았으니, 언제쯤이면 날씨가 사나워질 것 같소?”

노인은 뜻밖의 질문에 놀라며, “그건 알아서 무엇하시게요?”

  “글쎄 꼭 알아야 하니 말씀해 주시구려.”

  노인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바람결을 가늠해 보더니, 석양녘쯤에 큰 바람이 일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정선은 노인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화통을 짊어지고 위험한 벼랑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날 저녁이었다. 검은 구름이 장막처럼 드리운 가운데 옹천은 산악같이 밀려들어 우레처럼 절벽을 들이치는 파도 속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을 지켜선 백성들의 불굴의 기상처럼 범접할 수 없는 기개를 간직한 채 서 있었다. 넘실대는 물결 위로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 옹천 앞에는 사나운 바람에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정선이 서 있었다. 그는 그 장쾌한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새기려는 듯 파도에 맞서고 있는 옹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정선은 기백이 넘치는 필치로 이 땅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친 백성들의 넋이 깃든 옹천의 파도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한 늙은 어부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얻어 이 땅을 지켜낸 백성들의 슬기와 용맹을 상징한 풍경화 ‘옹천’은 이렇게 해서 그려진 것이었다. 

 

 

<대순회보 101호> 

 

 

 

01 정선은 36세에 금강산의 모습을 접하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창안하였다. 이 화법은 현실감 넘치는 화풍으로 우리나라 산천의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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