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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문혼돈(渾沌)의 7개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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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4.10 조회5,5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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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김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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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가까이는 부모, 형제, 친인척에서부터 멀게는 학교 친구, 직장 동료, 연인에 이르기까지 나이와 성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다르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상대방을 이해하면 서로의 관계가 좋아지고 삶은 더욱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수도인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해원상생’을 실천하기 위한 시작으로 상제님의 덕화를 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만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이해할 때 우리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잘못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자』의 일화가 있어 소개해보고자 한다.

 

 

남해의 제왕(帝)은 ‘숙’이고 북해의 제왕은 ‘홀’이고 중앙의 제왕은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함께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이 혼돈의 은덕에 보답하려고 함께 상의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만은 있지 않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하고는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더니 칠일만에 혼돈이 죽어버렸다.01

 

 

등장인물인 ‘숙’과 ‘홀’은 각각 남해와 북해의 왕이고 ‘혼돈’은 중앙의 왕이다. 일화는 ‘숙’과 ‘홀’이 ‘혼돈’에게 대접을 잘 받고 그 은덕에 보답하려고 얼굴에 7개의 구멍을 뚫어주었다는 비교적 짧은 내용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숙’과 ‘홀’이 뚫어준 구멍 때문에 ‘혼돈’이 죽게 된 것이다. 결과는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혼돈’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장자』의 이 일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장자』 전반에 드러난 주된 사유의 맥락 안에서 ‘혼돈’의 죽음은 인위적인 것에 대한 거부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이 이야기에서 인위적인 것은 타인이 만든 판단 기준에서 비롯된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누군가의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숙’과 ‘홀’은 자신의 관점에서 ‘혼돈’을 판단했다. 그들이 뚫어준 7개의 구멍은 그 구멍을 지니고 태어난 ‘숙’과 ‘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혼돈’의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구멍이었다.

 

여기에 7개의 구멍이 상징하는 바는 이 일화의 의도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들이 ‘혼돈’에게 뚫은 7개의 구멍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 코, 귀, 입의 구멍을 말한다. 이것은 나를 외부의 대상, 즉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감각기관이다. 또한, 7이라는 숫자는 인간에게 욕망을 만드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일곱 가지 감정과도 연관되어 있다.02 인간은 이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대상을 접하며, 여기에서 어떠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이나 느낌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을 판단의 근거나 기준으로 삼게 된다. 결국, 장자는 7개의 구멍을 통해 개인의 경험으로 형성된 주관적 판단의 위험성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쉽게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그 기준을 제시한다. 나의 기준이 상대방의 입장과 맞아떨어진다면 좋은 도움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생긴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기준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도움이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에게 안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가 발생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이런 모습들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강요했던 성공을 위한 방법들이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사례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며 고통받는 연인들의 사례를 쉽게 접하게 된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서구와는 다른 민족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생각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관을 강요했던 선교의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과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그것으로부터 결국 생각의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수도인들은 ‘혼돈’의 일화가 주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수도인들은 상제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상제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상제님의 가르침을 전해나가는 과정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가 그 존재의 역할과 삶의 방법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리고 그 능력 또한 다양하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할때 비로소 시작된다.

 

상제님께서는 남을 비방하는 사람에 대하여 “사람마다 제 노릇 제가 하는 것인데 제 몸을 생각지 못하고 어찌 남의 시비를 말하리오”(교법 1장 20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남의 시비를 논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신 말씀이지만 이해하는 마음을 기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방하게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을 쉽게 남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달리하여 누구나 자기 삶의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남을 쉽게 비방할 일은 없을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며 존중하는 태도 속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마음은 열리고, 이렇게 마음이 열릴 때 우리의 진리는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혼돈’을 죽게 한 7개의 구멍은 우리에게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01 『장자』 「응제왕(應帝王)」 “南海之帝為儵, 北海之帝為忽, 中央之帝為渾沌, 儵與忽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

之甚善. 儵與忽, 謀報渾沌之德, 曰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이에

대한 번역은 안병주, 전호근 공역, 『역주 장자1』,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08)을 참고하였다 .

02 안병주, 전호근 공역, 『역주 장자1』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08), 344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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