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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정양사 헐성루와 방광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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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7.09 조회5,0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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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훈사 뒤쪽으로 1km 정도 우거진 산길을 오르면, 방광대(放光臺, 1062m) 허리에 위치한 정양사(正陽寺)가 나타난다. 이 절은 표훈사의 말사(末寺)로, 금강산 정맥(正脈)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정양(正陽)이란 이름을 얻었다. 지대가 높고 탁 트여 있어 금강산 내외의 뭇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전망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표훈사와 더불어 600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짓거나 중수(重修)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조 15년(1791)에 중창되었지만 한국전쟁 때 심하게 파괴된 후 일부만이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양사의 가람배치는 반야전, 약사전, 3층 석탑과 석등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전(般若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법기보살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운 것이다. 반야전 앞의 약사전(藥師殿)은 약사여래석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들보를 하나도 쓰지 않고 기둥 위 안팎으로 공포 01를 여러 겹 짜 올려 천장을 대신한 점이다. 육각 평면이라는 건축적 기교와 더불어 지붕 꼭대기의 화강암을 연꽃 모양으로 다듬어 올린 것이 이채를 띠고 있다. 약사전 앞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세워진 3층 석탑02과 6각 석등이 남아 있는데, 그 구조의 정교함과 그윽한 모습은 산중 명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절간의 문에 해당하는 헐성루와 영산전, 명부전, 승방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정양사가 자리한 곳은 해발 800m 정도밖에 안 되지만, 동쪽이 탁 트여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볼 수 있다. 사악한 마음을 없애고 자성에 드는 문이란 뜻인 헐성루(歇性樓) 때문에 더욱 유명한데, 특별히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내금강의 47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문의 난간에 서면 내금강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일렬로 늘어서는데, 오직 색채의 농담(濃淡)과 윤곽의 정밀하고 거친 정도로만 그 거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헐성루에는 지봉대(指峰臺: 봉우리를 가리키는 대)라는 전망 장치가 있어 정양사의 명물로 이름이 높다. 지봉대는 헐성루에서 볼 수 있는 각 봉우리의 이름을 새겨놓은 원추형 모형돌들로, 미리 고정시킨 줄을 당겨 모형 끝에 맞추어 방향을 잡고 바라보면 누구나 봉우리의 이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든 기발한 장치이다. 하지만 현재는 지봉대도 헐성루와 함께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또한 정양사 부근에는 옛날부터 개심대, 천일대, 진헐대 등으로 불리는 전망대들이 있다. 이곳은 높이 800여 m밖에 안 되는 산중턱이지만 사방이 탁 트여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환히 볼 수 있고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전망은 더욱 좋아진다. 하지만 정양사 앞뜰에서만 보아도 온갖 기묘하고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데 모아 진열해 놓은 듯한 장관이 연출되기 때문에 헐성루에 올라서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경관에 도취되기 쉽다.

  그래서 예로부터 문인(文人)들이 헐성루에 올라 그 감회를 토로하는 많은 명작들을 남겨 놓은 듯하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백미로 꼽히는 <금강전도(金剛全圖)>를 비롯한 <내금강총림도>는 거의 다 정양사 헐성루에서 바라본 경치를 부감법(俯瞰法)03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금강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 헐성루가 있다. 가장 요긴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모습과 참 정기를 볼 수 있다. 마치 구슬 굴속에 앉은 듯 맑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 뱃속 티끌까지 어느 틈에 씻어 버렸는지 깨닫지 못한다.

 

 

  한편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에 왔을 때 산 위에서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법기보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한다. 방광대(放光臺: 빛을 놓은 대)는 법기보살이 나타난 곳이고, 그때 왕건이 절한 자리가 장안사 터에서 정양사로 넘어가는 고개인 배점(拜岾) 또는 배재령(일명 절고개)이다. 그 전설의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정양사는 본래 동쪽을 향하여 세운 절이었다. 그런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돌부처 하나만이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돌부처 주변에는 잡초와 관목만이 무성해졌고 부처 위에는 담장이풀과 머루, 다래 넝쿨 등이 가득 씌워졌다. 그런데 밤이면 이따금씩 이 불상에서 신비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한 늙은 중이 이 근방에 와서 초막을 짓고 홀로 살았는데 어느 날 밤 돌부처가 꿈에 나타나 그 중에게 말하였다.

  “내일 임금이 남쪽 언덕으로 넘어올 것이니, 나를 남쪽을 향해 돌려놓아 마중하는 모습이 되게 하라.”

  꿈에서 깨어난 중은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돌부처의 말대로 불상을 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고려 태조(太祖)가 금강산에 들어오기 위해 앞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고개를 넘던 왕건은 심신이 피로하여 혼잣말로, “금강산의 주불인 법기보살(法起菩薩)이 현현하여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낸다면 내가 이 길을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가겠노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곧 법기보살이 황금빛을 발하며 하늘에 나타났고 그가 뿌리는 광명으로 온 천지가 밝아졌다. 태조는 즉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그 자리에 엎드려 법기보살의 발밑에 절을 하였다. 이때부터 법기보살이 출현한 곳을 방광대라 이르고 왕이 절한 자리는 배재령(절고개)이라 불렀다.

  이후 태조가 고개를 넘어 암자에 이르자 늙은 중이 나타나 꿈에서 본 사실을 아뢰었다. 사실 태조가 본 것은 법기보살이 아니라 늙은 중이 돌려놓은 돌부처가 햇빛에 반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긴 태조는 돌부처가 있던 자리에 정양사를 재건토록 하면서, 그 불상을 금상의 법기보살로 만들어 반야전에 안치하고 약사여래상 위에는 6각전을 지어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후 정양사는 남쪽을 향해 앉은 절간이 되었다고 한다.  

 

 

 

 

 

01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02 금강산 3대 고탑(古塔)이 현재 모두 남아 있는데 이에는 정양사, 장연사, 신계사 3층 석탑이 있다.

03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사물을 그리는 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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