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곡우(穀雨) 절후를 관장하는 소우(蕭瑀)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3.24 조회5,635회 댓글0건본문
수(隋)에서 당(唐)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몰수한 전답과 가옥이 있어 조정(朝廷)은 이를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들에게 하사하였다. 소우는 자신이 받은 전답과 가옥을 친척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은 오직 제사를 받들 묘실(廟室)만을 남겨두었다.
소우는 왕세충(王世充, ?~622)01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진급되었다. 소우의 진가(眞價)는 행정 관료로서의 일처리에 있었다. 그는 내외(內外) 관리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공과(功過)를 조사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를 잘 처리했다. 관리를 평가하고 그들의 공과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소우가 적용한 기준은 이후 관리들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
당(唐) 왕조의 창업 초기로 모든 면에서 갖추어진 것이 없었던 때인지라 중앙의 관료로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소우에게는 여러 가지 사무(事務)가 많이 몰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이를 잘 처리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행정업무가 아닌 특수한 사안들에 관한 일처리에는 신중을 기하여 정책 집행상의 실수를 최대한 줄이도록 하였다. 이는 당 왕조가 기틀을 다지는 데 소우가 기여한 공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태종에게 국정을 조언한 소우
626년 고조 이연의 뒤를 이어 고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 당의 2대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당태종이다.
정관(貞觀) 초에 새로이 서정(庶政)을 맡게 된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 두여회[杜如晦, 대한(大寒) 절후를 관장] 등은 새로이 등극한 당태종의 최측근 신하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이세민과 더불어 오랜 시간 국가 경영에 관한 심도 있는 의견 개진을 통해 확고한 청사진을 갖고 집권한 세력이었다. 이들이 국정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소우의 역할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소우로서는 이들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이때 소우의 나이는 53세였다. 소우의 입장에서 보면 고조의 신임을 입어 국가 창업 초기 자신의 주도하에 새로운 당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그 자신을 대신할 쟁쟁한 인사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새로운 군주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소우는 새롭게 등장한 이들 신진관료들을 비방하였는데 그의 말은 거칠고 조급했다. 이러한 소우의 행위는 당태종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는 파면(罷免)되었다.
그러나 소우는 당의 창업 공신이나 다름이 없었고 당태종의 등극에도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금 특진(特進)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임명되었고 다시 좌복야(左僕射)로 임명되었다.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끊임없는 간언(諫言)을 촉구하고 국정에 관한 자문을 구했는데 소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태종이 소우에게 물었다.
“짐은 자손과 사직(社稷)을 길이 보존코자 하는데 어찌하면 되겠소?”
소우가 대답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하은주(夏殷周) 3대(代)가 천하를 소유하며 오래 보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봉건제후(封建諸侯)들을 두어 이들을 왕조의 울타리로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한 뒤 제후(諸侯)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하여 수령(守令)을 두었는데 두 세대 만에 망했습니다. 한(漢)이 제왕(諸王)과 그 자제들에게 분봉(分封)하니 400여 년간 나라를 유지하였습니다. 한이 망하고 난 뒤 위(魏)와 진(晉)이 분봉을 폐지하니 나라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봉건의 명확한 효력입니다.”
당태종이 이 말을 받아들여 비로소 봉건(封建)을 실시토록 의논케 했다.
소우는 진주도독(晉州都督)으로 기용되었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 태상경(太常卿)을 배수(拜受)받고 어사대부(御使大夫)로 옮겨져서 정사(政事)에 참여했다.
소우는 논의(論議)가 분명하고 변별력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단점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은 간혹 치우치기도 했는데 자신의 생각이 비판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되지 못하면 오랜 관직 생활의 경험을 활용하여 법(法) 조문(條文)의 해석을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소우의 이러한 행위는 방현령, 위징[魏徵, 입춘(立春) 절후를 관장], 온언박(溫彦博)에 의해 통렬히 탄핵되었다. 소우 또한 이에 지지 않으려고 방현령 등의 작은 잘못을 잡아 탄핵했으나 소우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소우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신임을 잃어 또다시 일시 파면되었다가 곧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고 이후 특진(特進)이 가해져서 태상경(太常卿)이 되었고 이어서 하남도 순성대사(河南道巡省大使)가 되었다. 그리고 635년(정관 9) 다시 조정의 일에 참여했다.
소우는 국가 원로의 대접을 받고는 있었지만 어느새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것이 소우로 하여금 신진관료들과 불화를 일으키도록 한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신진관료들과의 불화 속에서도 소우가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태종의 배려였다. 당태종의 집권과정에서 소우의 기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소우를 극찬했다.
“무덕(武德) 말년(末年)에 아버님께서 황태자를 폐위할 것인가 그냥 둘 것인가 논의를 하셨다. 이때 짐은 상(賞) 받을 만한 공로가 없었고 형제들 또한 용납하지 않았었다. 소우는 재물의 유혹과 형벌(刑罰)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시종일관 짐을 지지하였으니 사직(社稷)을 지킨 신하이다.”
당태종의 정권 획득을 지지한 소우
당태종이 이렇게까지 칭찬한 이유를 살펴보자. 당태종은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정권을 획득했다. 626년(무덕 9) 6월 4일. 현무문의 정변이 있던 날 아침은 태자(太子) 건성(建成)과 제왕(齊王) 원길(元吉) 그리고 이세민이 동시에 소환되었던 날이었다. 전날인 6월 3일 이세민이 태자와 제왕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조 이연에게 보고했고 놀란 고조가 이들 형제의 소환을 명하였다. 아울러 고조는 이들과 함께 자신의 측근인 배적(裴寂), 소우, 진숙달(陳叔達)을 같이 불렀다.
현무문에서 태자와 제왕을 제거한 이세민은 울지경덕[尉遲敬德,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을 보내 고조를 보호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이세민의 신속한 조치였다. 이세민의 명령으로 울지경덕이 고조를 알현(謁見)했는데 그는 무장(武裝)을 풀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는 일종의 무력시위로 간주될 수도 있는 일이었으며 지금부터 실질적인 황제는 이세민이라는 것을 알린 행위였다. 놀란 고조는 울지경덕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고 울지경덕이 “태자와 제왕이 난을 일으켜 진왕(秦王, 이세민)이 이를 평정했습니다.”고 보고했다.
울지경덕의 보고를 받고 고조는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깨달았다. 이때 소우, 진숙달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고조 이연에게 한 말과 고조의 반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보인다.
소우와 진숙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진왕 이세민의 공이 크고 신망(信望)이 두터운 것을 질시하여 이세민을 죽일 것을 꾀하여 왔습니다. 이제 진왕이 이들을 토벌하였습니다. 이미 진왕의 공은 우주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진왕에게 귀부(歸附)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진왕 이세민을 태자로 대우하여 나라의 일을 맡긴다면 다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에 고조는 “옳은 말이다. 이는 내가 일찍부터 품어왔던 마음이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고조의 반응에 대한 진위(眞僞)는 논외(論外)로 한다. 하지만 당태종의 집권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우와 진숙달의 발언은 당태종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것이었다. 이미 모든 일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결정적 순간에 고조를 설득해 준 소우의 공로를 당태종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태자와 제왕을 한 축으로 하고 이세민을 또 한 축으로 하는 대권 쟁탈 과정에서 양대 세력은 자파(自派)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하고 있던 소우도 중요 포섭 대상의 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소우는 이때부터 변함없이 이세민의 힘이 되어 주었다. 당태종으로선 소우가 이 과정에서 태자 건성이 재물로 유혹하고 또는 형벌로 위협했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해 준 것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태종은 소우에게 다음과 같은 시(詩)도 하사하며 다시금 고마움을 표시했다.
疾風知勁草 바람이 거세게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版蕩識誠臣 어려운 일을 당해야 성실한 신하를 알 수 있다
소우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謝禮)하여 말하였다.
“이미 폐하의 가르침을 입었고 게다가 충성스럽다는 칭찬을 들었으니 소신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위징이 말했다.
“소신은 예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하가 중론(衆論)을 거스르고 법을 지키면 임금은 공정함으로써 용서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전에 말로만 들은 것을 지금 보았습니다. 만일 소우가 폐하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뒷날 당의 3대 황제 고종(高宗)이 되는 진왕(晉王)이 태자가 되자 소우는 태자태보(太子太保)와 함께 중서문하성삼품(中書門下省三品)에 임명되었다.
당태종이 태자에게 말했다.
“세 분의 스승은 덕(德)으로써 태자를 인도하시는 분들이시다. 태자는 제자로서 스승을 예(禮)로 존중하지 않으면 본받을 바가 없게 된다.”
그리고 태자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태자는 스승께서 오시면 문 밖으로 나가 먼저 인사드리고 맞이하도록 하고 태자의 인사를 받은 스승께서 답례하시도록 하라. 문에 들어설 때면 반드시 스승에게 양보하여 스승께서 먼저 문을 통과하신 다음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 또한 스승께서 자리에 앉으시면 그 다음에 자리에 앉도록 하라. 공부하는 책의 앞뒤에 스승의 이름을 써 놓고 배움을 청함에 황공하다고 칭(稱)하라.”
소우는 불교의 교리를 좋아하여 틈만 나면 집을 버리고 승려가 되겠다고 청원하곤 하였다. 소우의 출가(出家)는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집안이 대대로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려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불교사에 있어 중요 인물인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이 소우의 고조(高祖)이다. 양무제는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추앙받고 있는 달마대사(達磨大師)와 공덕(功德)에 관한 유명한 대담을 나눈 인물이다. 양무제는 48년간의 재위 기간을 통해 불교를 장려하여 불경번역과 수천의 사찰을 지어 ‘황제보살(皇帝菩薩)’이란 칭호를 들을 정도였다. 이렇게 소우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집안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당태종도 소우와 그의 가문이 불교에 심취한 것을 잘 알고 있어 그에게 자수(刺繡)로 만든 불상(佛像)과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하사한 적도 있었다.
소우는 647년(정관 21) 다시금 송국공(宋國公)으로 봉해졌는데 이해에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당태종은 소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기반찬을 물리치며 애도(哀悼)를 표하고 신하를 보내 조문했다. 태자도 스승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소우는 사공(司空)과 형주도독(荊州都督)에 증직(贈職)되고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었다.
태상(太常)02이 소우의 시호(諡號)를 숙(肅)이라 하였는데 당태종이 말하기를 “시호는 그 사람의 살아 있을 당시의 행적을 살펴 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시호는 그와 맞지 않으니 마땅히 실상과 같게 고쳐야 한다.”고 하여 정편(貞楄)으로 고쳤다.
소우의 장례는 아주 검소하고 소박하게 거행되었는데 그가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르니 이것이 변하지 않는 이치이다. 내가 죽으면 시신을 깨끗이 하여 옷 한 벌 입히고 이불 싸는 것으로 염(殮)하면 된다. 시신(屍身)은 빨리 썩는 것이 좋으니 관 안에 다른 물건을 절대 넣지 말라. 돗자리 하나면 족하다. 장례 치를 좋은 날짜를 잡는다고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치르도록 하라.” (끝)
01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양제(隋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2 구경(九卿)의 하나. 종묘(宗廟) 등의 제사를 맡은 벼슬.
<대순회보 96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