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소만(小滿) 절후를 관장하는 유홍기(劉弘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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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16 조회6,240회 댓글0건본문
당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유홍기
유홍기(劉弘基, 581~650)는 옹주(雍州) 지양(池陽)01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유승(劉升)은 수(隋)나라에서 하주자사(河州刺史)를 지냈다. 유홍기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크고 주변의 협객(俠客)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았다. 유홍기는 수(隋)의 우훈시(右勳侍)02를 지냈는데 아버지가 하주자사를 역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홍기는 수(隋)나라 대업[大業, 양제(煬帝)의 연호로 605~616] 말년 양제를 따라 요동(遼東)03 정벌에 나섰다. 그런데 집안이 가난하여 자신에게 배당된 물자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였다. 그는 문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태원(太原)으로 망명하였고 당시 유수이던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을 섬겼다.
이연을 섬기게 된 유홍기가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을 살펴보니 그가 매우 뛰어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유홍기는 이세민에게 스스로를 의탁했다. 이때부터 이세민은 유홍기를 크게 신임하고 예우하였다. 그에 대한 이러한 예우는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유홍기는 궁궐에 출입할 때에 기병(騎兵)이 호위했고 임금의 침실까지도 드나들 수 있었다.
유홍기가 태원으로 망명한 이후 정국(政局)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참담한 실패로 중국 전역은 이른바 천하대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수양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정부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국적인 반란을 작은 도둑의 무리가 일으키는 소동 정도로 인식하여 수습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중국 전역은 도둑의 무리들이 휩쓸고 어지러운 정세에 편승한 자칭 황제, 대왕, 장군이 판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치열한 세력 쟁탈전으로 무수한 인명이 어이없이 소모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연에게 거병(擧兵)을 촉구한 이는 그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진양궁감(晉陽宮監) 배적(裴寂)04을 내세워 아버지 이연을 회유했다. 여기에 진양령(晉陽令)이던 유문정(劉文靜)05까지 가세하여 결국 이연의 결심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군대를 소집하고 또한 움직이는 데에는 중앙정부의 재가(裁可)가 필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임의로 군대를 소집하고 움직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반역이다. 하지만 중앙 정부의 재가를 얻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했다. 장안(長安) 또는 강도(江都)로 가는 길은 이미 도적들의 수중에 떨어졌고 중앙 정부의 승인을 기다리는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마읍[馬邑, 현재 산서성(山西省) 삭현(朔縣)] 교위(校尉)로 반란을 일으킨 유무주(劉武周, ?~622)06가 태원을 침공했다. 유무주는 수양제의 이궁(離宮) 중 하나인 분양궁(汾陽宮)07을 공격하여 점거하였다. 이연은 부유수(副留守) 왕위(王威)와 호아랑장(虎牙郞將) 고군아(高君雅)를 비롯한 관리들과 장수들을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제 내가 유수(留守)의 신분으로 도적들이 이궁(離宮)을 점거하였음에도 이들을 잡아들이지 못하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출병(出兵)에는 보고가 필요하고 상부의 지시가 뒤따라야 하는데 지금 강도(江都)에 이르는 길은 멀고 다른 도적들이 이를 점거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왕위와 여러 관리들이 모두 말하였다.
“공은 황실의 친척이시며 현명함을 겸하고 계신데 만약 상주(上奏)한 것의 화답을 기다린다면 어찌 기회를 잡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도적을 평정하는 일에 있습니다. 공께서는 지금 도적을 평정하는 일에 전념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연이 이들의 말을 따르는 것처럼 하면서 말하였다.
“좋다. 그렇다면 우선 군사를 모아야 한다.”
이에 이세민에게 명하여 유문정, 유홍기, 장손순덕[長孫順德, 대서(大暑) 절후를 관장] 등과 더불어 각기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불과 열흘 사이에 만 명을 모았다. 유홍기는 2,000명을 모았으니 전체 병력의 1/5을 모은 것이다. 더불어 소집된 군사들을 유홍기와 장손순덕에게 지휘하게 하는 등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왕위를 비롯한 관리들은 고조 이연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위와 고군아 등이 무사확(武士)에게 말하였다.
“장손순덕과 유홍기는 모두 정벌에서 등을 돌려 도망한 자들로 이들의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들이 어찌 군사를 거느릴 수 있습니까.”
왕위, 고군아 등이 유홍기와 장손순덕을 잡아서 조사하려고 하니 무사확이 말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당공(唐公, 이연)의 빈객(賓客)인데, 만약 이처럼 하면 반드시 크게 분란에 이를 것이오.”
무사확의 말에 왕위, 고군아 등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이들 관리들은 무사확도 고조 이연에게 거병을 촉구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태원에는 이연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많아서 이연을 체포하려는 이들의 계획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주변의 상황에 어두웠던 왕위, 고군아 등은 이연이 군대를 소집하고 편제를 완성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반란이 확실하다고 판단하여 이연이 진사(晉祠)08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릴 때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왕위의 계획은 진양(晉陽)의 향장(鄕長)인 유세룡(劉世龍)이 이연에게 보고함으로써 발각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유홍기와 장손순덕이 좌우의 군사들을 지휘하여 왕위 등을 체포하였다.
내부의 분란을 간단하게 잠재운 이연은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을 태원 유수에 임명하여 맡기고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수나라는 송노생(宋老生)과 좌무후대장군(左武侯大將軍) 굴돌통[屈突通, 망종(芒種) 절후를 관장]을 내세워 이연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연의 군대가 서하(西河)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송노생(宋老生)이 패배하여 말을 버리고 도랑 속으로 몸을 던졌다. 유홍기가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목을 베었는데 이연의 군대는 이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유홍기는 이 전투의 공로로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를 배수받았다.
이연의 군대가 포(蒲) 땅에 이르자 유홍기는 병사를 이끌고 먼저 황하(黃河)를 건너 풍익(馮翊)을 항복시켰다. 고조는 유홍기를 위북도(渭北道) 대사(大使)에 임명하고 은개산[殷開山, 하지(夏至) 절후를 관장]을 부대사(副大使)에 임명하였다. 이들이 서쪽을 순행하여 부풍(扶風) 땅에 당도하니 이들을 따르는 무리가 6만에 이르렀다. 유홍기는 이들을 조직하여 남쪽으로 위수(渭水)를 건너 장안의 외곽까지 나아갔다. 유홍기의 군은 장안의 외각 서문의 하나인 금광문(金光門)에서 대오(隊伍)를 정비했다.
유홍기의 군대를 수(隋)나라 장수 위문승(衛文昇)이 공격했으나 유홍기가 도리어 반격하여 사로잡은 수나라의 갑사(甲士)가 1,000이요 노획한 말이 수백 필(匹)이었다. 이때 당의 제군(諸軍)은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고조는 장안 공략전 서전(緖戰)의 승리를 기뻐하며 유홍기에게 말 20필을 하사했다. 장안이 평정되고 유홍기의 공은 일등급(一等級)이었으므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에 제수되었다.
설거(薛擧, ?~618)09 토벌(討伐)에서도 유홍기는 유감없이 분전했다. 천수원(淺水原) 전투에서 당군은 팔총관(八總管)의 군이 다 패했으나 오직 유홍기의 군대만이 끝까지 싸웠다. 유홍기군은 화살이 다하여 적들에게 사로잡혔는데 황제는 어려움에 임해서도 불굴의 정신력으로 분전했다 하여 그의 집안을 더욱 보호했다.
천수원의 패배는 당 왕조의 성립 초기에 당군이 겪은 참패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여러 장군들이 전사(戰死)했는데 유홍기도 그 중 한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졸(士卒) 중에 전사한 이들이 열에 대여섯이었는데 설거는 이들을 한 곳에 모아 큰 구경거리를 만들어 자신의 승리를 과시했다고 한다.10 유홍기가 전사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기록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패배였다. 설거에 사로잡힌 유홍기는 설거의 진영을 탈출하여 당군(唐軍)에 합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찾지는 못했다.
유홍기는 다시금 설거 토벌에 나섰다. 이때 설거는 죽고 그의 아들 설인과(薛仁果)가 뒤를 이었는데 이를 평정함으로서 천수원 전투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무주가 다시금 태원을 침범하자 유홍기는 평양(平陽)에 주둔하여 이들을 무찔렀다. 이러한 공로로 좌일총관(左一總管)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돌궐을 등에 업은 유무주의 세력은 강력하였다. 이제 성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당으로서 유무주를 토벌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세민(李世民)이 유무주의 토벌에 나서 백벽(栢壁)에 주둔하여 경졸(勁卒) 2천을 거느리고 습주(州)로부터 서하(西河)로 가서 유무주 군이 돌궐로 도망가는 길을 막았다. 이때 유홍기는 방벽을 견고히 하고 용맹한 병졸을 모았다. 유무주 휘하의 장수 송금강(宋金剛, ?~620)11이 도망치자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를 공격하여 개휴(介休)에서 이세민의 군대와 합동으로 공격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이 공격은 큰 성과를 거두어 이후 유무주는 더 이상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유홍기는 이 공로로 거듭하여 임국공(任國公)에 봉해졌다.
유홍기는 이세민을 따라 유흑달(劉黑, ?~623)12을 물리치고 돌아와서 정월장군(井鉞將軍)을 배수 받았다. 유홍기는 돌궐이 변방을 침입하자 보기(步騎) 만 명을 거느리고 이에 대비하였다. 그는 빈(豳) 땅으로부터 북동쪽으로는 자오령(子午嶺)을 막고 서쪽으로는 임경(臨涇)을 막아 방벽을 쌓아 돌궐의 침입에 대비했다.
627년[정관(貞觀) 원년(元年)] 이주도독(利州都督) 이효상(李孝常) 등이 반란을 꾸몄는데 유홍기는 그들과의 친분으로 말미암아 제명(除名)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일 년 남짓만에 역주자사(易州刺史)에 기용되어 봉작(封爵)이 회복되었다. 당 태종이 유홍기를 불러 위위경(衛尉卿)을 제수하고 기국(夔國)에 봉(封)했다. 유홍기는 나이를 이유로 쉴 것을 청하니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초하루와 보름날에만 조회(朝會)에 참석하도록 하였는데 봉록(俸祿)은 실무를 담당했을 때와 똑같았다.
당 태종이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섰을 때 유홍기를 불러서 전군대총관(前軍大總管)으로 삼았는데 주필산(駐山) 전투에서 공적을 세워 봉토가 거듭 더해져 식읍(食邑)이 1,100호(戶)에 이르렀다.
650년[영휘(永徽)1, 당의 세 번째 황제인 고종(高宗)의 연호] 유홍기가 죽으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병주도독(幷州都督)에 증직(贈職)되었다. 유홍기는 소릉(昭陵)에 장사 지내졌는데 그의 시호(諡號)는 양(襄)이다.
처음에 유홍기가 병석에 있을 때에 아들들에게 노비 각 15명과 밭 5경(頃)씩을 나누어주고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자식들이 만약 현명하다면 진실로 많은 재물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현명치 못하다고 해도 이 정도 재산이라면 추위와 굶주림은 면할 것이다.”
하고 그 외 나머지 재산은 모두 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유홍기의 아들 인실(仁實)이 봉작(封爵)을 세습(世襲)했다.
01 현재 섬서성(陝西省) 삼원(三原).
02 훈시(勳侍). 귀족의 자제나 공훈(功勳)이 있는 자의 자제들로 충당되던 숙위지사(宿衛之士)를 가리킨다.
03 요동(遼東)은 고구려를 뜻한다.
04 포주(蒲州) 상천[桑泉, 지금의 산서(山西) 임진(臨晉)]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배유(裴瑜)는 강주자사(絳州刺史)를 지냈다. 배적은 어려서 고아(孤兒)가 되어 여러 형들의 손에서 컸다. 대업(大業) 연간에 시어사(侍御史), 가부승무랑(駕部承務郞), 진양궁부감(晉陽宮副監)을 역임했다. 그가 진양궁부감이 되었을 때 오랜 친구인 고조 이연이 태원 유수로 부임하였다. 배적이 진양궁으로 이연을 초정하여 매일같이 대접하니 이때에 더욱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세민이 거병(擧兵)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감히 고조 이연에게 바로 말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배적이 고조의 신임을 얻고 있음을 알고 배적을 포섭하여 그로 하여금 이연에게 거병을 촉구하도록 하였다. 이연이 거병하자, 진양궁에 쌓여 있던 재물을 풀어 도왔다. 배적은 이연이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열었을 때 장사(長史), 장안(長安)을 평정한 뒤에는 위국공(魏國公), 이연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다. 고조는 배적을 특히 우대하여 여러 신하들 중에 비할 바 없었다. 배적을 부를 때도 그를 우대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배감(裴監)’이라 불렀다. 그는 60세에 죽었는데 상주자사(相州刺史), 공부상서(工部尙書), 하동군공(河東郡公)에 추증(追贈) 되었다.
05 팽성[彭城, 현재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사람. 대대로 경조(京兆) 무공(武功) [현재 섬서성(陝西省) 무공(武功)]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유소(劉韶)가 전몰유공자(戰歿有功者)였던 까닭으로 관직이 내려졌는데 어린 유문정이 그 아버지의 관직을 잇게 되면서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그는 수(隋)나라 말에 진양령(晉陽令)이 되었는데 이때 진양궁감(晉陽宮監)이었던 배적(裴寂)을 알게 되었다. 배적, 이세민과 함께 당시 태원 유수였던 당 고조 이연을 설득하여 수나라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키자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사절로 갈 것을 자청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고 이들이 이연의 배후를 공략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그는 이연이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열었을 때 군사마(軍司馬), 이연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납언(納言)이 되었다. 당 창업 초기 고조는 유문정에 명하여 수나라의 개황율령(開皇律令)에 첨삭을 가하여 당의 법령으로 사용하였다. 유문정은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공공연히 배적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여 권력 내부의 긴장을 형성하였다. 배적이 이 일로 고조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취지의 진언(進言)하게 되었다. 배적을 신임하고 있던 고조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유문정을 죽이니 그의 나이 52세였다.
06 하간(河間) 경성(景城) [현재 하북성(河北省) 헌현(獻縣)] 사람으로 마읍(馬邑)으로 옮겨 살았다. 날래고 사나우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교위가 되었다. 이후 마읍에 돌아와 응양부교위(鷹揚府校尉)로 있던 617년(대업 13) 같은 군(郡)의 장만세(張萬歲) 등과 모의하여 태수 왕인공(王仁恭)을 죽이고 세력을 규합하여 스스로 태수라 칭했다. 그는 세력 확장을 위해 돌궐(突厥)에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될 것을 자청하여 이들의 무력을 기반으로 안문(雁門), 누번(樓煩), 정양(定襄) 등의 군(郡)을 점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돌궐로부터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임명되었고 황제를 자칭(自稱)했다. 619년(武德 2) 당군(唐軍)에 연승(連勝)하여 태원(太原), 진주(晉州), 회주(澮州)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돌궐로 도망갔다. 이후 다시 마읍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피살(被殺)되었다.
07 진양성(晉陽城) 서부에 있었다.
08 진양성 서부.
09 하동(河東) 분음(汾陰) [지금의 산서(山西) 만영(萬榮)] 사람. 부친 설왕(薛汪)이 난주(蘭州) 금성(金城) [지금의 감숙(甘肅) 난주(蘭州)]으로 이주했다. 용맹했고 활을 잘 쐈는데 아주 큰 부자였다. 처음에는 금성부의 교위(校尉)였다가 대업(大業) 말년에 그의 아들 설인과[薛仁果, 또는 인고(仁)]와 같이 반란을 일으켜 자칭(自稱) 서진패왕(西秦覇王)이라 했다. 얼마 안 가서 농서[西, 지금의 감숙성(甘肅省)]를 차지하니 따르는 무리가 13만에 이르렀다. 617년 칭제(稱帝)하고 도읍을 진주(秦州)로 옮기고 다음해에 장안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병사(病死)했다. 그의 아들 설인과가 뒤를 이었는데 죽은 설거의 시호(諡號)를 무황제(武皇帝)라 했으나 장례를 마치기 전에 당(唐)에 패배했다.
10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資治通鑑 20』, 도서출판 삼화, 2009, p.66 참조.
11 상곡(上谷) [현재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사람. 수나라 말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위도아(魏刀兒, ?~618)가 두건덕(竇建德)을 공격하다가 위기에 빠지자 위도아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유무주(劉武周)의 부하가 되었다. 유무주는 송금강을 신임하여 군사의 일을 맡기고 송왕(宋王)이라 칭했다. 또한 서남도대행대(西南道大行臺)에 임명하여 당의 기반이 된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은 619년(무덕 2) 병주(幷州), 회주(澮州)에서 당군(唐軍)에 연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유무주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였다. 이후 돌궐에서 다시 상곡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잡혀 죽었다.
12 두건덕과 같은 청하(淸河) 장남(南) [현재 산동성(山東省) 무성(武城)] 사람이다. 수나라 말기에 학효덕(孝德)을 따라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 618년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와강군이 패하자 왕세충의 포로가 되어 군마총관(軍馬總管)에 임명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리를 이끌고 두건덕에게 가서 한동군공(漢東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두건덕이 당군에 패하자 두건덕을 따르던 무리들을 수습하여 반년 만에 두건덕의 옛 영역을 회복했다. 다음해인 622년 한동왕(漢東王)을 칭했으나 이세민에 패해 돌궐로 달아났다가 623년 태자 건성이 이끄는 당군에 패해 잡혀 죽었다.
<대순회보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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