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망종(芒種) 절후를 관장하는 굴돌통(屈突通)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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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26 조회6,249회 댓글0건본문
왕조교체기, 두 왕조에 모두 충성을 다한 굴돌통
굴돌통은 매번 싸움에 나가면 신중하여 비록 대승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패배하지도 않았다. 수양제는 남쪽으로 순행을 떠나면서 장안(長安)을 진정시킬 임무를 굴돌통에게 맡겼다. 전국적인 반란과 왕조를 떠받치고 있던 관료, 장수까지 반란의 대열에 합류하는 상황에도 순행(巡行)에 집착하는 양제를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617년[대업(大業) 13] 태원유수(太原留守)로 이쪽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던 이연(李淵)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공략하였다. 이연의 군대가 장안을 공격하자 장안을 책임지고 있던 대왕(代王) 양유(楊侑)01는 굴돌통을 보내어 하동(河東)을 지키게 했다.
양군은 오랫동안 싸웠지만 결판을 내지 못했다. 이연은 하동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하동을 일단의 병사들로 하여금 포위하도록 하고 자신은 드디어 황하(黃河)를 건넜다. 황하를 건넌 당군은 수장(隋將) 상현화(桑顯和)의 군대와 음마천(飮馬泉)에서 싸웠는데 이들을 격파했다. 상현화의 패배에 위기를 느낀 굴돌통은 요군소(堯君素)에게 명하여 포(蒲)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동관(潼關)02 수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동관을 공략하고 있던 당군은 유문정(劉文靜)03의 지휘하에 있었다. 유문정의 군대는 동관에서 굴돌통에 저지당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였다. 양군은 한 달 남짓 서로 버티고 있었다. 서로 간에 대치상태로 시간만 보내고 있던 시점에서 굴돌통은 상현화(桑顯和)에게 야습(夜襲)을 명했다. 상현화의 야습은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야습 다음날 양군 사이에 대전투가 전개되었다.
유문정은 군대를 세 곳으로 나누어 각각의 울타리를 만들어 대비하고 있었다. 이 중 두 곳에 상현화의 군대가 공격을 가했다. 두 곳의 진영은 계속된 공격으로 울타리가 무너지고 양군의 병사들이 서로 칼을 맞대는 상황이었다. 유문정이 지키는 마지막 한 곳의 진영만이 온전하였지만 이곳 또한 유문정이 화살에 맞아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군에게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상현화의 수군(隋軍)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들은 야습을 한 군대이다. 또한 그 다음날까지 이어진 전투로 이들 역시 지쳐있었다. 상현화 군은 밤을 새워 전투했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소량의 식량으로 아침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치고 굶주린 군대의 공격은 그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유문정이 적군의 공세가 주춤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군대를 나누어 집중 공격을 받은 두 곳의 진영에 군사를 보충했다.
때마침 당의 기병(騎兵) 수백이 남산(南山)으로부터 돌아와 상현화 군의 배후(背後)를 습격하였다. 기병의 배후 공격으로 당군(唐軍)의 사기는 크게 고무되었고 반대로 상현화의 수군은 힘겨운 싸움에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당군은 아군(我軍)의 기병을 보고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던 진영에서 동시에 큰 함성소리와 함께 반격을 가하였다. 상현화의 수군은 피곤에 지치고 협공을 받은 상황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였다. 마침내 상현화는 도망가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당군에 사로잡혔다.
굴돌통으로서는 상현화의 야습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야습은 실패하고 오히려 상현화의 군대가 궤멸(潰滅)되니 전체 병력이 줄어들고 군대의 사기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어떤 사람이 굴돌통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굴돌통은 거부했다.
“나는 나라에 큰 은혜를 입어 두 임금을 모시고 후한 녹(祿)을 받았는데 어찌 어려움을 당했다 하여 피할 수 있으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또한 굴돌통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마땅히 나라를 위해서라면 적의 칼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
굴돌통의 결의에 찬 언행은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미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있던 병사들은 총사령관의 이와 같은 말에 눈물을 흘리면서 분발했다. 고조(高祖) 이연이 굴돌통의 집안 하인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굴돌통은 이 하인의 목을 벰으로써 자신의 결의가 바뀔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굴돌통 군의 입장에서 보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얼마 안 있어 수도 장안(長安)이 함락된 것이다. 이에 굴돌통은 상현화로 하여금 동관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낙양(洛陽)으로 가려 했다. 낙양으로 가서 왕세충(王世充, ?~622)04의 군대와 합류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굴돌통이 군대를 이끌고 떠나자마자 상현화는 당군에 항복했다.
유문정이 상현화와 함께 두종(竇琮), 단지현[段志玄, 입하(立夏) 절후를 관장]의 정예 기병을 보내 조상(稠桑, 하남성 영보현 북부)까지 쫓아왔다. 굴돌통은 이들과 대치하였다. 이때 두종이 굴돌통의 아들 굴돌수(屈突壽)를 보내 항복할 것을 종용하였다.
아들을 본 굴돌통이 크게 소리쳤다.
“옛날에 너와 나는 부자지간이었지만 지금은 원수다.”
하고 좌우의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라고 명했다.
이때 당에 투항한 상현화가 그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수도가 이미 함락되었다. 그대들의 집은 모두 관서(關西)인데 어디로 가려하는가.”
총사령관의 결의로 겨우 마음을 다잡은 굴돌통의 병사들에게도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는 듯했다. 굴돌통의 군대는 모두 병장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굴돌통 또한 이미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동남쪽을 향해 재배(再拜)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망국의 신하가 된 그로서는 통곡(痛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의 힘이 부족하여 싸움에 지고 말았지만 폐하를 등진 것이 아닙니다. 천지신명이 이를 아실 것입니다.”
굴돌통은 사로잡혔고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고조 이연이 굴돌통을 위로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어찌 이리도 늦게 만나게 되었는가?”
굴돌통이 울면서 말했다.
“내가 신하의 절개를 다하지 못하고 힘이 부족하여 여기에 이르게 되었으니 나라를 욕(辱)되게 하였도다.”
끝까지 수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한 굴돌통에게 고조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수나라의 충신이로다.”
고조는 굴돌통을 풀어 주고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장국공(蔣國公)에 임명하여 진왕(秦王) 이세민의 행군원수장사(行軍元首長史)로 삼았다.
굴돌통이 이세민을 따라 설인과(薛仁果)05를 토벌하였는데 그때에 노획한 진귀한 보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이것을 본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가졌는데 굴돌통은 홀로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고조가 이를 전해 듣고 말했다.
“굴돌통은 청렴함으로 나라를 받든다고 하더니 그 말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특별히 금은(金銀) 600량(兩)과 비단 500필을 하사했다.
굴돌통은 섬동도행대좌복야(陝東道行臺左僕射)에 임명되어 낙양의 왕세충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굴돌통의 두 아들이 낙양에 있었다.
걱정이 된 고조가 물었다.
“이제 경(卿)으로 하여금 동쪽을 정벌하고자 하는데 낙양에 있는 그대의 두 아들은 어찌하겠는가?”
굴돌통이 말했다.
“신은 이미 늙어 중임(重任)을 맡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난 달 폐하께서 포로가 된 이 몸을 풀어주시고 은혜를 베푸시어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입과 마음으로 죽어서라도 보답할 것을 맹세한 바 있습니다. 이번 출정에서 선봉을 맡기로 하였으니 만약 제 두 아들이 죽는다면 그것은 다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사사로운 정 때문에 큰일을 망치지 않겠습니다.”
고조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열사(烈士)의 충절(忠節)을 내 지금 보았다.”
두건덕(竇建德, 573~621)06이 왕세충의 구원을 위해 군대를 움직였을 때 이세민의 휘하 군대의 절반은 굴돌통이 지휘했다. 왕세충을 토벌하고 난 다음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데 굴돌통이 제일(第一)이었다. 굴돌통은 섬동도행대우복야(陝東道行臺右僕射)에 임명되어 낙양을 안정시킬 임무를 맡았다. 몇 해 뒤 고조는 굴돌통을 불러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했는데 그 자신이 문장을 익히지 못했다 하여 끝내 거절하였다. 고조는 굴돌통을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임명했다.
626년[무덕(武德) 9]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 때에는 검교행대복야(檢校行臺僕射)가 되어 다시 낙양을 안정시킬 임무를 부여받았다. 정관(貞觀) 초에 임시 관청격인 행대(行臺)가 폐하여지니 낙주도독(洛州都督),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임명되었다. 628년[정관(貞觀) 2] 굴돌통이 죽으니 그의 나이 72세였다. 당태종은 그의 죽음을 오랫동안 애통해했다. 굴돌통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를 충(忠)이라 했으며 그의 아들 굴돌수(屈突壽)가 작위(爵位)를 세습(世襲)했다.
당태종이 낙양(洛陽)에 행차하였을 때 굴돌통의 충절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굴돌전(屈突詮)을 과의도위(果毅都尉)로 삼고 굴돌통의 집안에 의복과 곡식을 내렸다. 643년[정관(貞觀) 17] 조서를 내려 능연각(凌煉閣)에 여러 공신들과 함께 그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고 649년[정관(貞觀) 23]에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과 더불어 태종(太宗)의 묘정(廟廷)에서 제사를 받도록 했다. 654년[영휘(永徽) 5, 당의 세 번째 황제인 고종(高宗)의 연호] 굴돌통은 다시금 사공(司空)에 증직(贈職)되었다.
왕조교체기에 고위직 인사로 양쪽에서 모두 살아남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반적인 방법은 앞선 왕조를 배신하는 것이다. 수당(隋唐) 교체기에도 이런 인물들은 많았다. 위징[魏徵, 입춘(立春) 절후를 관장]이 지적하였듯이 충신(忠臣)이라는 이름은 한 왕조(王朝)를 위해 그 자신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한 댓가이기도 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굴돌통과 같이 왕조교체기, 두 왕조 모두에 충성을 다했으면서도 또한 자신의 몸을 온전히 지킨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는 굴돌통이 매 순간 정직한 삶을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목숨을 건 간언(諫言)으로 1,500명을 살린 덕분이 아닐까.(끝)
01 수공제(隋恭帝, 605~619) 양유(楊侑). 양제의 장자(長子) 양소(楊昭, 507~606)의 아들. 처음에는 진왕(陳王)에 책봉되었으나 대왕(代王)으로 옮겨졌다. 양제가 남쪽 강도(江都)로 순행을 떠나고 돌아오지 않자 장안을 지켰다. 617년[대업(大業) 13] 이연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당시 대왕(代王)이던 양유를 황제로 즉위케 했다. 618년[의령(義寧) 2] 양유는 이연에게 선위(禪位)하여 당이 성립하게 되었는데 다음해에 15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諡號)가 수공제(隋恭帝).
02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현(縣)의 이름으로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사이에 위치한 요새.
03 팽성[彭城, 현재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사람. 대대로 경조(京兆) 무공[武功, 현재 섬서성(陝西省) 무공(武功)]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유소(劉韶)가 전몰유공자(戰歿有功者)였던 까닭으로 관직이 내려졌는데 어린 유문정이 그 아버지의 관직을 잇게 되면서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그는 수(隋)나라 말에 진양령(晉陽令)이 되었는데 이때 진양궁감(晉陽宮監)이었던 배적(裴寂)을 알게 되었다. 배적, 이세민과 함께 당시 태원 유수였던 당 고조 이연을 설득하여 수나라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키자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사절로 갈 것을 자청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고 이들이 이연의 배후를 공략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그는 이연이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열었을 때 군사마(軍司馬), 이연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납언(納言)이 되었다. 당 창업 초기 고조는 유문정에 명하여 수나라의 개황율령(開皇律令)에 첨삭을 가하여 당의 법령으로 사용하였다. 유문정은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공공연히 배적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여 권력 내부의 긴장을 형성하였다. 배적이 이 일로 고조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취지의 진언(進言)을 했는데 고조가 이를 받아들여 유문정을 죽이니 그의 나이 52세였다.
04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양제(隋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5 설거(薛擧, ?~618)의 장자(長子). 힘이 세고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는데 군대 안에서는 만 명을 대적한다고 하였으나 욕심이 많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아버지 설거의 뒤를 이었으나 곧 당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세력을 잃고 항복했다. 장안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06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대순회보 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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