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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하지(夏至) 절후를 관장하는 은개산(殷開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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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02 조회5,9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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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왕조 창업에 기여한 은개산

 

은개산(殷開山, ?~622)의 이름은 교(嶠)로 옹주(雍州) 호현(縣)[현재 섬서성(陝西省) 호현(戶縣)]사람이다. 은개산은 자(字)가 개산인데 이름보다 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강남(江南)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은불해(殷不害)는 진(陳, 557~589)01나라에서 벼슬해 사농경(司農卿)으로 있었는데 진나라가 망(亡)하자 관중(關中)으로 이사했다. 아버지 은승수(殷僧首)는 수(隋)나라에서 비서승(秘書丞)으로 유명했다.

 

은개산은 어려서부터 책을 두루 섭렵하고 행실이 뛰어났으며 특히 편지글을 잘 썼다. 그는 수(隋)나라에 벼슬하여 태원부(太原府)에 소속된 태곡(太谷)02 현장(縣長)이 되었는데 이곳을 잘 다스려서 유명해졌다.

 

617년[대업(大業) 13] 당을 창업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당시 태원유수였는데 거병(擧兵)하면서 은개산을 불러들여 대장군부(大將軍府)의 소속관리로 삼아 대장군을 보좌하게 했다. 은개산이 맡은 일은 각종 전략의 수립과 실행에 관한 것이었다. 참모(參謀)의 역할은 심복(心腹)이나 실력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는 일이다. 은개산은 그만큼 고조 이연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은개산은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군공을 세우게 되었으며 그 공로로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되었다.

 

은개산은 이연의 첫 번째 아들인 이건성(李建成)을 따라 서하(西河) 공략에도 참여했다. 이후 이세민(李世民)이 위북도원수(渭北道元帥)가 되자 은개산을 불러 그를 장사(長史)03로 삼았다. 이때에 관보(關輔)04 지역의 도적떼들을 진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세민이 은개산에게 명하여 이들을 회유하도록 하니 이들이 모두 복종했다.

 

은개산이 유홍기[劉弘基, 소만(小滿) 절후를 관장]와 더불어 장안(長安) 외각까지 진격했을 때 이들을 저지하러 온 수장(隋將) 위문승(衛文昇)의 군대를 만나 격파하였다. 장안의 공략전의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한 이 전투의 공로로 은개산은 진군공(陳郡公)의 작위를 받았고 승상부(丞相府)로 옮겨졌다.

 

618년[무덕(武德) 원년(元年)] 수나라 말에 농서[西, 지금의 감숙성(甘肅省)]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킨 설거(薛擧, ?~618)05가 경주[涇州, 감숙성 경주현(涇州縣)]를 노략질했다. 당 조정은 진왕(秦王) 이세민을 서토원수(西討元帥)로 삼고 유문정(劉文靜)06을 사마(司馬)로 삼아 설거 토벌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부시랑(吏部侍郞)이었던 은개산도 여기에 참가하였다.

 

이세민은 해자(垓字)07를 깊이 파고 성곽을 높게 하여 수비에 치중할 뿐 싸우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이세민이 학질(疾)에 걸려 군사에 관한 일은 유문정과 은개산에게 맡겼다. 이세민은 이들에게 군사의 일을 맡기면서 적들과의 싸움을 피할 것을 지시했다.

 

“적군은 바야흐로 기세가 치열하니 빨리 싸워 이익을 보고자 할 것이요. 공들은 싸우지 말고 적군의 양식이 떨어져 적의 병사들이 굶주리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싸우도록 하시오.”

 

그러나, 은개산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유문정에게 말했다.

 

“진왕(秦王, 이세민)께서는 질병이 계속되자 공(公)께서 적군을 이기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싸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도적들이 왕께서 질환을 가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의당 무력으로 그들을 위압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설거가 당군을 기습하였고 양쪽의 군대는 절척(折)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기선을 제압당한 당군이 마침내 크게 패하였다. 이 패전의 결과 당군은 여덟 총관이 나섰으나 모두 패했고 사졸(士卒) 가운데 죽은 사람이 열에 대여섯이었다.

 

은개산과 유문정은 패전의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웠다. 이들의 죄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으나 고조가 조서를 내려 이들을 제명(除名)08시키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니 은개산과 유문정은 평민(平民)으로 전락했다.

 

이 일이 있고 조금 있다가 은개산은 이세민을 따라 설거의 아들 설인과(薛仁果)09를 평정하는 데 참여하여 작위(爵位)가 회복되었다. 은개산은 섬동도대행대병부상서(陝東道大行臺兵部尙書)를 겸직(兼職)하였으며 이부(吏部)로 옮겨졌다. 은개산은 계속해서 이세민을 따라 왕세충(王世充, ?~622)10을 토벌하는 데 참여하여 그 공로로 운국공(國公)에 봉해졌다.

 

622년[무덕(武德) 5] 은개산이 유흑달(劉黑, ?~623)11을 평정하러 가는 도중에 병으로 죽으니 이세민이 심히 통곡했다. 은개산에게 섬동도대행대우복야(陝東道大行臺右僕射)가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를 절(節)이라 했다. 640년[정관(貞觀)14] 당태종은 은개산을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神通), 하간왕(河間王) 이효공[李孝恭, 소한(小寒) 절후를 관장], 민부상서(民部尙書) 유정회[劉政會, 상강(霜降) 절후를 관장]와 더불어 고조(高祖)의 묘당(廟堂)에서 함께 제사를 받도록 했다. 영휘[永徽, 당의 세 번째 황제인 고종(高宗)의 연호] 중에 은개산은 사공(司空)으로 다시 추증(追贈)되었다.

 

 

 

01 남조(南朝)의 하나. 진패선(陳覇先)이 양(梁)나라의 선위(禪位)를 받아 지금의 장강(長江)과 월강(江) 유역에 세운 나라. 서울은 건강(建康). 5주(主) 33년 만에 수(隋)나라에 망하였음.

02 『신당서(新唐書)』에는 대곡(大谷)이라 하고 『구당서(舊唐書)』에는 태곡(太谷)이라 되어 있는데 고조 이연이 불렀다는 점에서 태곡이 맞는 것 같다. 태곡은 수대(隋代) 산서성(山西省) 지역에 두었던 현(縣)으로 태원부(太原府) 소속.

03 한(漢)나라 때 승상(丞相) 또는 삼공(三公)의 속관(屬官). 위진(魏晉) 이후엔 왕공부(王公府)의 속관. 후세(後世)엔 자사(刺史)의 부관(副官).

04 관중[關中, 함곡관(函谷關)의 서쪽에 있는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땅을 이르는 말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의 옛 이름]과 삼보[三輔, 삼보는 한서(漢書)에 우부풍(右扶風), 좌풍익(左馮翊), 경조윤(京兆尹)])의 지역을 이르는 말.

05 하동(河東) 분음[汾陰, 지금의 산서(山西) 만영(萬榮)] 사람. 부친 설왕(薛汪)이 난주(蘭州) 금성[金城. 지금의 감숙(甘肅) 난주(蘭州)]으로 이주했다. 용맹했고 활을 잘 쐈는데 아주 큰 부자였다. 처음에는 금성부의 교위(校尉)였다가 대업(大業) 말년에 그의 아들 설인과[薛仁果, 또는 인고(仁)]와 같이 반란을 일으켜 자칭(自稱) 서진패왕(西秦覇王)이라 했다. 얼마 안가서 농서[西, 지금의 감숙성(甘肅省)]를 차지하니 따르는 무리가 13만에 이르렀다. 617년 칭제(稱帝)하고 도읍을 진주(秦州)로 옮기고 다음 해에 장안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병사(病死)했다. 그의 아들 설인과가 뒤를 이었는데 죽은 설거의 시호(諡號)를 무황제(武皇帝)라 했으나 장례를 마치기 전에 당(唐)에 패배했다.

06 팽성[彭城, 현재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사람. 대대로 경조(京兆) 무공[武功, 현재 섬서성(陝西省) 무공(武功)]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유소(劉韶)가 전몰유공자(戰歿有功者)였던 까닭으로 관직이 내려졌는데 어린 유문정이 그 아버지의 관직을 잇게 되면서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그는 수(隋)나라 말에 진양령(晉陽令)이 되었는데 이때 진양궁감(晉陽宮監)이었던 배적(裴寂)을 알게 되었다. 배적, 이세민과 함께 당시 태원 유수였던 당 고조 이연을 설득하여 수나라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키자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사절로 갈 것을 자청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고 이들이 이연의 배후를 공략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그는 이연이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열었을 때 군사마(軍司馬), 이연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납언(納言)이 되었다. 당 창업 초기 고조는 유문정에 명하여 수나라의 개황율령(開皇律令)에 첨삭을 가하여 당의 법령으로 사용하였다. 유문정은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공공연히 배적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여 권력 내부의 긴장을 형성하였다. 배적이 이 일로 고조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취지의 진언(進言)을 했는데 고조가 이를 받아들여 유문정을 죽이니 그의 나이 52세였다.

07 성 밖으로 둘러 판 못이나 능(陵)·원(園)·묘(墓) 등의 경계.

08 이름을 삭제한다는 뜻으로 이때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09 설거(薛擧, ?~618)의 장자(長子). 힘이 세고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는데 군대 안에서는 만 명을 대적한다고 하였으나 욕심이 많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아버지 설거의 뒤를 이었으나 곧 당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세력을 잃고 항복했다. 장안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10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11 두건덕과 같은 청하(淸河) 장남[南, 현재 산동성(山東省) 무성(武城)] 사람이다. 수나라 말기에 학효덕(孝德)을 따라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 618년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와강군이 패하자 왕세충의 포로가 되어 군마총관(軍馬總管)에 임명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리를 이끌고 두건덕에게 가서 한동군공(漢東郡公)에 봉해졌다. 621년 두건덕이 당군에 패하자 두건덕을 따르던 무리들을 수습하여 반년 만에 두건덕의 옛 영역을 회복했다. 다음해인 622년 한동왕(漢東王)을 칭했으나 이세민에 패해 돌궐로 달아났다가 623년 태자 건성이 이끄는 당군에 패해 잡혀죽었다.

 

 

<대순소식 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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