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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불보살김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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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03 조회5,6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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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편-

김가기(?∼859)

     


    김가기(金可紀)는 신라 사람이다. 신라 말기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등 3, 4년(836-839)동안에 여러 왕이 시해, 폐립되는 등 신라조정에는 큰 혼란이 일고 있었다. 그 시기에 김가기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당나라의 벼슬을 받았고 한 때 당의 사신으로 신라에 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이(李)씨 성이 창업한 나라로서 노자(老子)의 성명이 이이(李耳)로 전해지고 있는 것에 관련되어 노자를 극도로 숭상하게 되었고 당연히 도가(道家) 또는 신선사상이 매우 풍미하였다. 특히 당 현종(712∼756재위)은 신선사상을 신봉하는 열의가 대단하여 노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라는 존호를 붙여 친 묘에서 궁향하고 장자를 남화진인(南華眞人), 열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으로 받들어 노자에 배향 할 정도였다.
    김가기는 이러한 당나라의 문종(文宗), 개성(開城) 연간(836∼839)에 최승우(崔承祐), 자혜(慈惠: 의상 대사라는 견해가 있음)와 당에 유학을 갔는데 김가기와 최승우는 선후해서 당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벼슬을 하였다. 가기와 승우 두 사람이 당의 수도 장안의 종남산에 있는 광법사(廣法寺)에 놀러 갔다가 마침 그 절에 기숙하고 있던 자혜의 알선으로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와 친근해져 가기와 승우는 늘 신원지에게 놀러 다녔고 급기야는 신원지가 어느 날 그곳을 찾아온 종리권(鍾離權)에게 가기, 승우, 자혜 세 사람을 소개해 주게 되었다.
    종리권은 한, 위, 진나라에 걸쳐 관직에 있다 당나라 때 등선(登仙)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로, 호는 화곡자(和谷子), 정양자(正陽子), 운방(雲房)등 여러 가지가 있고 전진교에서는 그를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부른다. 특히 그는 여동빈에게 장생술을 가르친 스승으로 유명하다. 여동빈이 64세의 고령으로 진사시에 낙제하여 실의에 빠진 채 강호를 유랑하다가 종리권을 만나 상진비결(上眞秘訣)을 전수 받고 천둔검법(天遁劍法:시해법의 일종)을 체득하여 중국 팔선(八仙)중의 한 명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전설이다. 종리권은 김가기, 최승우, 자혜 등을 보고 그들의 근기를 상선지재(上善之才)로 평가하여 장생술을 전수하였는데 그 비법으로는「청화비문(靑華秘文)」「영보필법(靈寶畢法)」「금고(金誥)」「팔두악결(八頭岳訣)」「내관옥문보록(內觀玉文寶錄)」「천둔연마법(天遁練磨法)」 등이었다. 이들 3인은 3년의 수련을 닦은 끝에 장생술의 완성단계인 금단(金丹)을 이룩하였다. 그 후 최승우는 먼저 신라로 돌아가 태위 벼슬까지 지냈고 자혜 역시 귀국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명법(明法)에게 장생의 도를 전수하고 145세에 태백산에서 입적하였다. 김가기는 그 후 한차례 신라에 돌아왔다가 다시 입당(入唐)하여 중국에 유학 온 최치원(崔致遠)에게 장생술을 전하고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운급칠첨(雲 七籤)」113 하 「속선전(續仙傳)」에 다음과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김가기(金可紀)는 신라 사람으로 빈공진사(賓貢進士)다.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도를 좋아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지 않았다. 혹 복기(服氣), 연형(煉形)을 하여 스스로 즐거워하기도 했다. 박학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글을 지으면 청려(淸麗)했다.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거동과 담론에 중화(中和)의 기운이 뚜렷했다. 돌연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집 자리를 택해 집을 꾸려서 살며 은일(隱逸)의 의취를 품고 기이한 꽃과 과수를 손수 심고 늘 향을 피우고 조용하게 앉아 있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또 『도덕경(道德經)과 여러 선경(仙經)』을 낭송하는 것을 중단하지를 않았다. 그 후 3년이 되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여 항해해서 갔다가 다시와 종남산에 들어가 음덕을 행하기에 힘썼다. 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거절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정려, 근면하게 일을 해서 남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당(唐) 대중(大中)11년(857) 12월에 홀연히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들어 영문대(英文臺)의 시랑(侍郞)이 되었습니다. 내년 2월 25일에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당 선종(宣宗)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겨 중사(中使)를 보내 궁중에 들라고 불렀으나 고사하고 나가지 않았고, 옥황상제의 조서를 요구하였으나 다른 신선이 관장하여 인간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다고 하여 거절했다. 마침내 궁녀 4인과 향약(香藥), 금채(金綵)를 내리고 또 중사 2인을 보내 시중을 들게 했다. 가기는 밤중이면 방안에서 내객의 담소성이 나서 중사가 몰래 들여다보면 다만 선관(仙官)과 선녀(仙女)각각 용과 봉황 위에 앉아서 엄연하게 마주 보고 있어 궁녀와 중사가 감히 호들갑을 떨 수 없었다. 2월 25일 봄 경치가 아름답고 꽃이 난만했는데 과연 오색 구름과 소리치는 학과 나는 난새와 생소(笙蕭)와 금석(金石)의 풍악과 깃 수레 지붕에 경옥 바퀴를 한 수레가 나타났고, 깃발이 하늘에 가득 찼고, 신선의 의장대가 극히 많은 가운데 하늘에 올라가서 떠나갔다. 조정의 여러 관원과 사서인(士庶人)들로 구경하는 자들이 산골짝을 넘치도록 메워 바라보고 절하며 감탄하고 이상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순회보》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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