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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입춘(立春) 절후를 관장하는 위징(魏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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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10 조회5,8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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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魏徵, 580~643)의 자는 현성(玄成)이고 위주(魏州) 곡성(曲城, 현재 河北 曲周)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실의에 빠져 가산을 돌보지 않았으나 큰 뜻이 있어서 책과 술법(術法)에 통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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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은 고구려 침공을 위한 징집령이 내려지자 징집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도사(道士) 행세를 하였다. 그가 거짓 도사 행세를 할 때 무양군승(武陽郡丞, 군 태수의 보좌관) 원보장(元寶藏)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인연으로 그의 서기가 되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면 수나라는 전국적인 반란에 직면하여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수 왕조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관료층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무양군승이던 원보장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이밀(李密)01 에게 투항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보장이 이밀에게 투항하며 보낸 편지는 위징이 쓴 것이었다. 이밀은 원보장이 보낸 편지를 보고 잘 썼다고 칭찬하면서 이 편지를 위징이 썼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러 들였다. 이때 위징이 이밀에게 열 가지 책략을 바쳤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수(隋)에 최초로 반기를 든 인물은 양제(煬帝)의 집권에 큰 공을 세운 양소(楊素)의 아들인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이었다. 양현감은 613년 2차 고구려 침공을 틈타 반란을 일으킨다. 양현감의 반란에 놀란 양제는 바로 원정군을 돌려 진압했다. 이때 이밀은 양현감의 반란을 도왔기 때문에 관군에 쫓기는 신세였다. 하지만 이밀은 전국적인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양제의 학정으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는 자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밀이 여러 반란 세력을 돌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중국을 재통일할 계책을 설파했는데 이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그들의 추대로 ‘위공(魏公)’으로 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양제 사후 낙양에서 월왕 양통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 왕세충(王世充)02 이 이밀의 세력관할인 낙구(洛口)를 공격하였다. 위징이 낙구를 지키고 있던 장사(長史) 정정(鄭)을 찾아가 말하기를 “위공(魏公, 이밀)이 비록 승리를 거듭하고 있지만 용감한 장수와 날랜 병사들은 거의 다 죽거나 부상당한 형편이고, 또 막부(幕府) 안에 재물이 없어서 전쟁에서 승리해도 상(賞)을 내리지 못하는 실정이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전쟁을 치를 수 없습니다. 지구전(持久戰)을 펴면서 적들의 식량이 떨어져 도망갈 때를 기다려 추격한다면 필승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정은 위징의 충고를 늙은 유생들이 언제나 하는 말 정도로 치부하였다. 위징은 이 말을 듣고 미련 없이 떠나왔다.

 

훗날 이밀이 왕세충에 패하여 당에 귀순하게 되었다. 이때 위징은 이밀과 함께 장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위징은 조정에 산동(山東)지역을 평정할 것을 자청하여 비서승으로 임명되어 여양(黎陽)에 이르렀다.

 

이때 이세적[李世勣:소설(小雪) 절후를 관장]은 이밀의 명으로 여양을 수비하고 있었다. 위징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처음에 위공이 반란군을 일으켜 군사를 모으니 수십만이요. 이로써 그 위세가 천하의 절반을 뒤덮었는데 한 번 패하자 재기(再起)하지 못하고 끝내 당(唐)에 귀의하였으니, 천명(天命)이란 응당 돌아갈 곳이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대는 필시 싸움이 일어날 지역에 있으니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이세적은 위징의 편지를 보고 당에 귀순하게 되었다.

 

그런데 위징이 여양에 있을 때 두건덕03 이 여양 땅을 함락시키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두건덕은 위징에게 작은 벼슬을 내렸다. 이후 두건덕은 이세민의 공격을 받은 왕세충을 구원하러 갔다가 당군(唐軍)에 패하게 되었다. 위징은 배구와 같이 도망하였는데 황태자 건성이 그를 끌어들여 세마(洗馬)04 를 맡겼다.

 

위징은 진왕(秦王) 이세민의 명성이 높은 것을 알고 은밀히 황태자에게 조속히 계책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형제간 권력 다툼의 최종 승자는 진왕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황태자 건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정변 후 이세민은 위징을 잡아오게 하여 꾸짖으며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를 이간시킨 것인가?”

 

위징이 대답했다. “태자가 진작 제 말을 들었다면 이번 화(禍)로 죽임을 당하진 않았을 겁니다.”

 

이세민은 위징이 강직하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문책하지 않았다. 이때 위징의 나이 47세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고 거록현(鋸鹿縣)의 현남(縣男)05 에 임명했다. 당시 하북(河北)의 주(州), 현(縣)은 평소에 태자(太子) 건성과 제왕 원길을 받들어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정변(政變)을 인정할 수 없었고 난(亂)을 일으키려 하였다. 위징이 태종에게 말하길 “그들에게 지극히 공평함을 보이시지 않으면 이 화(禍)를 진정시킬 수 없게 됩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대가 하북(河北) 사람들을 잘 달래서 진정시키시오.”

 

위징이 태종의 명을 받고 하북으로 가는 도중에 황태자 이건성의 호위관(護衛官)이었던 이지안(李志安)과 제왕(齊王) 이원길의 호군(護軍)이었던 이사행(李思行)을 수도로 압송(押送)하는 행렬을 만나게 되었다. 위징이 이들에게 태종의 조서를 보이고 곧바로 이지안과 이사행을 석방하니 그 후로 민심이 안정되었다. 위징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태종이 기뻐하였다. 또한 날로 친애하여 그를 침실 안으로 불러서 천하의 일을 물어보곤 하였다.

 

위징이 비록 큰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었다. 아무도 위징의 진가(眞價)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징은 당 태종 이세민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었다. 그는 태종에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거침없이 아뢰어 이백여 번 주의[奏議: 황제에게 상주(上奏)하는 의견서]를 올렸다. 어느 것이나 태종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로 인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고 간의대부를 겸하게 되었다.

 

신하들 중에 위징이 황제의 인척에게 아부하고 당파를 짓는다고 비방한 자가 있었다. 태종이 온언박(溫彦薄)에게 조사를 명하였는데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러나 언박이 말하기를 “신하된 자는 처세를 분명히 하여 의심을 제거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위징은 신하된 자로서 의심을 제거하지 못하고 비방을 받으니 이는 마땅히 문책하실 일입니다.”

 

이 일로 태종이 위징을 부르니 그가 말했다. “제가 듣기에 임금과 신하는 마음이 하나여야 된다고 하였으니 이를 일체(一體)라고 합니다. 어찌 공(公)을 버리고 사사로움을 일삼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모두 서로를 의심하여 일체가 되지 못한다면 나라의 흥망성쇠는 기약할 수 없습니다.”

 

태종이 놀란 눈을 하며 말하기를 “나는 깨달았도다.” 위징이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하며 말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저를 양신(良臣)이 되게 하시고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마소서.” 태종이 말하기를 “충신과 양신이 다른 것인가?”

 

위징이 말했다. “양신으로는 직(稷)06 , 설(契)07 , 고요(皐陶)08 등이 있사옵고, 충신으로는 용봉(龍逢), 비간(比干)09 등이 있습니다. 양신은 그 임금도 같이 칭송되며 그 자신은 명성을 얻을 뿐 아니라 자손만대에까지 복(福)이 흘러 끝이 없습니다. 충신은 몸이 화를 당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 임금은 혼군(昏君)이란 악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나라와 가문이 파멸케 되면서 오직 충신이란 헛된 명성만 남을 뿐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로구나. 임금이 어찌하면 밝아지고, 또 어찌하면 어두워지게 되는 것인가?”

 

위징이 말했다. “임금이 밝아지게 되는 것은 신하들의 말을 겸허히 듣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은 편벽되게 한 신하의 말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순(堯舜)은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에 공(共), 곤()과 같은 신하가 있었어도 그들이 임금을 막히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진(秦)의 이세(二世) 황제는 조고(趙高)를 전적으로 신임하여 대궐에 몸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에 반란이 일어나 진 제국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주이(朱)를 믿었던 까닭에 후경(侯景)을 중용하였는데 그 후경이 수도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隋) 양제(煬帝)는 우세기(虞世基)를 믿었던 탓에 전국에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이 창궐한 것도 몰랐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임금이 두루 들을 수 있다면 간사한 신하가 그의 귀와 눈을 막히게 할 수 없고 아랫사람들의 사정(事情)이 전해지게 됩니다.”

 

정인기(鄭仁基)의 여식이 아름답고 재능이 뛰어나 문덕황후(文德皇后)가 그녀를 후궁으로 삼을 것을 청하여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미 정인기의 여식이 약혼을 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미 임금의 명이 내려진 일이다.”고 하였다.

 

위징이 태종에게 간언(諫言)하기를, “폐하께서 대궐에 계시려면 먼저 백성들이 집을 가지고 있는가 살피셔야 하고, 기름진 음식을 드실 때에는 백성들은 배부르게 하였는가를 살피셔야 하고, 후궁을 들이실 때에는 백성들이 가정을 이루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이번에 후궁으로 들이시려는 정인기의 여식은 이미 혼약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정인기의 여식을 취하신다면 이것이 어찌 부모의 도리이겠습니까.” 태종이 스스로를 책하며 곧바로 그 일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정관(貞觀) 3년(629년) 위징은 비서감(秘書監)으로 조정(朝廷)의 정사(政事)에 참여하였다. 고창왕(高昌王) 국문태(麴文泰)가 장차 조정에 들려 하는데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문태를 통하여 재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태종이 문태가 사자로 보낸 염달흘간(厭紇干)에게 명하여 그들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위징이 말하길 “지난 번에 문태가 입조(入朝)할 때에 가지고 온 공물은 제대로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사꾼으로서 온다면 변방 사람들이 이익을 보게 되며, 그들이 빈객(賓客)으로 온다면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들게 되니 이는 중국의 손해입니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서역 여러 나라들이 도호부(都護部)를 두고 신하를 보내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랑캐가 중국을 피폐케 하지 못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 중지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대순회보 83호>

 

 

01 이밀(李密, 582~618) 아버지 이관(李寬)의 포산공(蒲山公) 지위를 세습하여 수 양제의 친위부 대도독에 임명되었다. 613년 양현감의 반란을 도왔고 617년 적양(翟襄)의 추천으로 그들의 주군이 되어 자신을 위공(魏公)이라 칭했으나 618년 왕세충에 패하여 당에 귀순하였다. 그러나 이후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당의 복병에 의해 죽었다.

02 왕세충(王世充, ?~622)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 )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나서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3 두건덕(竇建德, 573~621)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04 태자(太子)가 출행할 때 말 앞에서 선도하는 동궁(東宮) 관속(官屬).

05 작위(爵位)의 이름. 진(晉) 이후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을 모두 현에 봉하였다.

06 주(周)나라의 시조(始祖) 이름은 기(棄). 요(堯)임금 때 농사(農師, 농사를 관장하는 벼슬)를 맡아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태(邰)에 봉해지고 후직(后稷)이라 칭해졌으며 희씨(姬氏) 성을 하사 받았다.

07 상(商)나라의 시조(始祖).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치수사업을 도와 공을 세웠다. 또한 우임금 밑에서 사도(司徒)로 백성의 교화를 맡았고 이러한 공로로 상(商)을 봉지(封地)로 받았다.

08 요순(堯舜) 시대의 명신(名臣)중 한 사람. 순임금 때 형법을 관장하였는데 판단이 공평하여 백성들이 모두 심복하였다.

09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신하 관용봉(關龍逢)과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신하 비간. 둘 다 임금에게 충간(忠諫)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충간지사(忠諫之士)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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