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입춘(立春) 절후를 관장하는 위징(魏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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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10 조회6,132회 댓글0건본문
- 매서운 간언으로 당 태종을 바른 길로 이끈 위징 -
정관 13년(639)에 돌궐족으로 당에 귀순했던 아사나결사율(阿史那結社率)이 반란를 일으켰다. 그리고 운양(雲陽) 땅이 돌덩이처럼 되었고 겨울부터 오월 달에 이르도록 비가 오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일은 군주제 하에서는 제왕의 부덕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위징은 태종의 10가지 잘못을 거론하며 이는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할 조짐이라고 주장하였다.
10가지 잘못은 다음과 같다.
1. 정관 초기의 검약을 잊고 준마와 진귀한 물건을 사들인다.
2. 정관 초기 가벼이 일을 벌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백성이 일이 없으면 교만
해지기 쉽다고 공언한다.
3. 정관 초기 폐하 스스로를 수고롭게 하셨는데 지금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이것이 없어서 당신이 불편하다고 한다.
4. 정관 초기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배척했는데 지금은 군자를 공경한다
면서 멀리하고 소인은 배척한다면서 가깝게 대한다.
5. 폐하를 위한 공사가 그칠 날이 없다.
6. 어진 사람이라도 폐하의 마음에 따라 하루아침에 의심하고 배척한다.
7. 사냥과 말 타기에 빠져 있으니 변란의 기미를 예측할 수 없다.
8. 정관 초기 아랫사람을 예의로 대했는데 지금은 신하들이 일을 상주하면 안
색이 변하며 듣지 않는다.
9. 정관 초기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염려하였으나 지금은 당신의 현명함을 자
부하여 거만하다.
10. 정관 초기처럼 백성의 마음을 살피지 않으니 그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화와 복은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피를 발라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요괴도 망령되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지금 극심한 가뭄이 일어나고 그 재앙이 멀리 제후국들에게까지 미치고 관리들이 지나는 곳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계시(啓示)를 보이시는 것으로 폐하께서는 삼가 두려워하며 근면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현명하신 폐하께서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으시니 이것이 소신이 길게 탄식하는 까닭입니다.
이 상소문을 보고 태종이 말했다. “오늘 짐의 허물을 들었으니, 그 점들을 고쳐 올바른 도리를 시종 견지하기를 원하노라. 이 말을 어긴다면 어찌 얼굴을 들고 공을 바라볼 수 있으랴! 아울러 공이 상소한 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조석(朝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자 하며, 더불어 사관(史官)에게 기록하도록 하여 만세의 후손들로 하여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알게 하리라.” 그리고는 황금 열 근과 말 두 필을 하사했다.
정관 14년(640) 고창국(高昌國)01이 평정(平定)되자 태종이 양의전(兩儀殿)에서 연회를 베풀며 말하기를 “고창국이 덕을 잃지 않았다면 어찌 망했겠는가! 그러하니 짐 또한 마땅히 스스로를 경계하여 소인의 말로써 군자를 논평하지 않아 나라의 안녕을 유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하자 위징이 말했다.
“옛날에 제(齊) 환공(桓公)이 관중(管仲), 포숙아(鮑叔牙), 영척(戚)과 더불어 술을 마시는데 환공이 포숙에게 ‘어찌 과인을 위해 축수(祝壽)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포숙아가 잔을 들고 일어나 말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땅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마시기를! 관중은 노(魯)나라에 잡혀 있었던 적이 있었음을 잊지 말기를! 영척은 수레 아래에서 소 먹이던 때를 잊지 말기를!’ 그러자 환공이 자리에서 물러나서 사례(謝禮)하며 말하길 ‘과인과 관중, 영척이 선생의 말씀을 잊지 않는다면 국가는 위태롭지 않으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평민으로 있던 때를 잊지 못하니, 공도 포숙아의 사람됨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황태자 승건(承乾)과 위왕(魏王) 태(泰)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태종이 말하길 “오늘날 충직하고 존귀함이 위징만한 이가 없다. 내가 그를 파견해 황태자를 보좌토록 하여, 황태자를 잘 보필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며 위징을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임명하였다. 위징이 병이 있다면서 사양하자 태종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한(漢) 고조(高祖)의 태자는 상산(常山)에 숨어 살던 네 노인의 도움을 받았는데 내가 공에게 의뢰하는 것도 그와 같은 뜻이오. 공이라면 공이 비록 누워있더라도 황태자를 옹위하여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오.02
정관 17년(643) 위징의 병이 악화되었다. 위징의 집에는 애당초 제대로 된 건물이 없었다. 태종이 명령을 내려 작은 궁궐의 목재를 뜯어다가 만들어 주도록 하니 5일 만에 완성되었다. 아울러 흰 비단 요와 베 이불을 하사하여 위징이 숭상하던 검소함을 따랐다. 그리고 중랑장(中郞將)에게 명하여 위징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동정(動靜)을 보고하게 했다. 위징의 집에는 태종이 하사한 약과 음식물이 셀 수 없이 많고 궁중에서 파견한 사자(使者)들이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친히 문병하러 가면 좌우를 물리치고 종일토록 이야기하다가 돌아갔다. 후일 다시 태자와 함께 위징의 집에 이르렀는데 위징이 누운 위에 관복과 띠를 덮고 갔다. 태종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를 어루만지면 눈물을 흘리면서 원하는 바를 물으니 위징이 답하길 “옛사람은 길쌈하는 과부도 오직 나라 걱정을 한다고 하는데 달리 원하는 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종이 장차 형산(衡山) 공주를 위징의 아들 숙옥(叔玉)에게 주려고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이 억지로라도 신부를 좀 바라보시오.”라고 하자 위징이 사양하지 못했다. 이날 밤 태종이 꿈에 위징을 보았는데, 아침에 위징이 죽으니 위징의 나이 64세였다. 태종이 위징의 집에 이르러 울며 슬퍼하여 닷새 동안 정사(政事)를 보지 않았고 태자는 서화당(西華堂)에서 애도(哀悼)했다.
내외의 모든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아침에 모두 모여서 상가(喪家)에 조문 가도록 했다. 사공(司空)과 상주(相州) 도독(都督)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했다. 태종은 깃털 덮개, 북, 피리, 무늬를 새긴 목검(木劒)과 마흔 명의 목우(木偶)를 하사하여 소릉(昭陵)에 함께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런데 위징의 처 배씨(裵氏)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위징은 평소 검소했습니다. 지금 일품(一品) 벼슬아치의 의례(儀禮)로 장례에 쓰이는 물품이 너무 화려하고 많으니 이는 위징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고는 임금의 허락을 얻어 하얀 베로 흰 수레를 두르고 장례를 치렀다. 태종이 서쪽 누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통곡하며 애도했다. 그리고 진왕(晉王)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제사지내러 갔다. 태종이 비석에 새길 글을 지으니 진왕이 그것을 썼다. 또 위징의 집에 봉읍(封邑) 구백 호를 하사했다.
태종이 후일 조정에 나와 탄식하며 말하기를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衣冠)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옛일을 거울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삼으면 잘잘못을 밝힐 수 있다. 짐이 예전에는 이 세 개의 거울을 가지고서 안으로 스스로의 과실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한 개가 없어졌구나. 짐은 근래에 사람을 시켜 그의 집에 가도록 하여 책 한 권을 얻었는데, 절반 정도 초고(草稿)가 완성된 것이었다. 그 알아볼 수 있는 부분에 쓰여 있기를 ‘천하에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다. 선한 이에게 맡기면 나라가 편안하여 지고 악한 이를 등용하면 나라가 피폐케 된다. 공경(公卿) 대신 중에 마음으로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자가 있으면 미워하는 자는 오직 그의 나쁜 점만 보고 좋아하는 자는 오직 그의 좋은 점만 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좋아하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좋은 점을 알아서 삿(邪)된 이를 제거하며 현명한 이에게 맡겨 의심하지 않으면, 나라가 흥성할 수 있다.’라는 것이 대략의 내용이었다. 짐은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이러한 과실을 면치 못할까 두렵소. 공경대신 및 시종 신하들은 홀(笏)03 에다 이 내용을 써서 나의 잘못이 보이면 필히 간언해 주길 바라오.”
위징의 용모는 중간치를 넘지 못했으나 지략과 담력이 있어 매번 임금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간언을 하고 비록 임금이 매우 노여워할 경우에도 간언하는 정신과 낯빛을 바꾸지 않으니 태종 또한 노여움을 거두곤 했다.
위징이 일찍이 분묘에 갔다가 돌아와 말하길 “이전에 듣자하니 폐하께서 관남(關南)에 행차하시려 하셨다는데 지금 채비가 다 갖추어진 다음에 그만두셨으니, 왜입니까?”라고 하니 태종이 “그대가 두려워서 그만두었소.”라고 대답했다.
처음에 나라가 교체되고 혼란했던 후에 국가의 문물제도가 무너지니 위징이 임금에게 아뢰어 여러 유학자들을 데려다가 궁중의 책들을 정리케 하여 국가의 전적(典籍)이 이로써 찬연히 정비되었다. 일찍이 『소대례(小戴禮)』의 내용에 차례가 없자 다시 『유례(類禮)』 스무 편을 지어 몇 년 만에 완성했다. 태종이 그 책을 좋다고 여겨 궁궐 내에 비치해 두었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능연각(凌煙閣)에 위징을 비롯하여 자신을 도운 24 공신(功臣)을 그리게 했다. 태종은 위징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시를 짓고 애도(哀悼)했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위징을 시기하여 온갖 방법으로 위징을 비방했다. 그들은 위징이 두정륜(杜正倫)과 후군집[侯君集, 처서(處暑) 절후를 관장]을 재상(宰相)으로 천거했는데 두정륜은 죄를 지어 쫓겨나고 후군집이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이들과 위징이 한패라고 비방하였다. 또한, 위징이 일찍이 자신의 간언(諫言)과 쟁론(爭論)들을 기록하여 사관(史官)인 저수량(遂良)에게 보였다고 말하니 태종이 차츰 불쾌하여져서 위징의 아들 위숙옥과 형산공주의 혼사를 중지하고 비석을 넘어뜨리고 위징의 집안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
태종은 위징이 죽은 다음해인 정관 18년(644) 고구려 원정(遠征)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초전에 승승장구하던 당군은 안시성(安市城)에 묶여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마침내 정관 19년(645) 회군(回軍)하였다. 군대가 돌아오면서 태종이 슬피 말하기를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내게 이번과 같은 행차가 있었겠는가!”라고 하며 곧 위징의 처자를 군대가 있는 곳까지 불러 하사품을 내리고 소뢰(小牢)04 제사를 그의 묘에서 지내게 하고 비석을 다시 세우도록 했다. 고구려 친정(親征) 이전까지 그 자신이 나선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고 당의 성립에도 지대한 공헌했으며 이로 인해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당 태종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고구려 원정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태종에게는 최대의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 원정 실패의 순간에 위징의 간언과 그 간언의 가치는 다시금 부각되었다.
당 태종의 여러 신하들 중 위징 이외에도 간언한 신하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양과 질에서 위징에 비할 수는 없다.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의 정점에 있는 제왕(帝王)에게도 매서운 비판자가 있었다는 것, 그것이 중국 역사상 치세(治世)로 손꼽히는 정관지치(貞觀之治)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대순회보 86호>
01 고창국은 5~7세기 지금의 신강(新疆) 투르판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실크로드는 고창에서 천산남로(天山南路)와 천산북로(天山北路)로 갈라진다. 이 갈림길에 위치한 고창은 동서 교통의 요지로 당시 서역(西域) 제국(諸國)이 당에 조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다. 당이 성립한 후 고창국과 당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서돌궐이 흥성하자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고창은 당으로 가는 통행로를 막고 서역 각국의 조공사들을 억류하거나 물건을 빼앗는 등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정관 13년(639) 당 태종은 후군집에게 명하여 정벌군을 파견하였고 다음해인 정관 14년에 고창국을 평정한 뒤 주, 현을 설치하였다. (황충호, 『제왕 중의 제왕 당태종 이세민』, 도서출판아이필드, 2008, pp.336~341 참조)
02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말년에 태자 교체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한 고조가 존경하고 있던 상산에 사는 네 노인이 태자를 돕는다고 하자, 자신이 불러도 오지 않는 사람들이 태자를 돕는다고 하니 그러한 태자를 교체할 수 없었고 태자는 고조 다음으로 제위(帝位)에 오를 수 있었다. 당 태종은 위징에게 이 고사를 인용하며 태자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03 홀(笏). 천자(天子) 이하 공경(公卿) 사대부(士大夫)가 조복(朝服)을 입었을 때 띠에 끼고 다니는 것. 군명(君命)을 받았을 때는 이것을 기록해 둠. 옥(玉), 상아(象牙), 대나무 등으로 만들었음.
04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양(羊)을 통째로 제물(祭物)로 바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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