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수 신명각(角) 별을 관장하는 등우(鄧禹) 신명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25 조회5,353회 댓글0건본문
각(角) 별을 관장하는 등우(鄧禹) 신명 (1)
각수(角宿)
각수(角宿)는 28수 가운데 첫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처음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2개로 이를 각각 좌각이(左角李), 우각장(右角將)이라 칭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청룡의 뿔과 같다하여 각수라고 칭해진 것이다.01 각수는 동방 목(木), 봄에 해당하며, 동물은 교(蛟), 즉 교룡(蛟龍)이다. 교룡은 용 가운데서도 뿔이 없는 용으로 홍수를 일으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훼(虺. 살모사, 작은 뱀)가 천년을 경과하면 교(蛟)가 되고, 교가 오백년을 경과하면 용이 되는데, 이 용이 다시 오백년을 경과하면 머리에 각(角)이 생기게 되고, 다시 천년을 경과해야 진정한 용이 된다고 한다.
각수를 의인화하여 각수성군(角宿星君)이라고도 부르는데 손에 창(槍)을 쥔 모습으로 형상화되며 교룡과 같이 등장하고, 28수 가운데 가장 싸움을 잘한다고 알려져 있다.
후한 창업의 최고 공신 등우
각(角) 별을 관장하는 등우(鄧禹, 2-58)는 후한(後漢)의 건국 공신 중에서도 두드러진 인물이다. 후한의 창업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02에게는 건국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운 건국 공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들을 중흥(中興) 28장(將)이라고 하는데 등우는 그 중에서도 첫 번째 공신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등우의 자(字)는 중화(仲華)로 남양(南陽) 신야(新野, 현재 河南省) 사람이다. 13세에 이미 『시경(詩經)』을 암송할 정도의 재능을 보였던 등우는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공부했다. 등우가 장안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유수도 장안에서 유학하고 있어서 둘은 이때 처음으로 만났다. 유수는 등우의 나이가 자신보다 6살 연하지만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가깝게 지냈다. 등우는 장안에서 그 후 몇 년 더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잠깐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전한(前漢, BCE 206-CE 8)은 무제(武帝) 유철(劉徹, BCE 156-87) 때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런데 무제 이후의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제위(帝位)에 오르는 사례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후견인으로 등장한 외척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건국한 왕망(王莽, BCE 45-CE 23)03도 그 외척 중 한 사람이었다. 왕망의 출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원제(元帝, BCE 48-33)의 황후이며 성제(成帝, BCE 32-7)의 모후인 왕정군(王政君)이다. 그녀는 왕망에겐 고모가 되는데 성제의 뒤를 이은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태황태후의 권한으로 왕망을 불러 그에게 나라의 대소사를 일임하였다.
권력을 잡게 된 왕망은 왕정군과 함께 평제(平帝, BCE 1-CE 5)를 옹립한다. 평제도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국가의 모든 실질적인 권한은 태황태후인 왕정군의 손에 있었다. 왕정군은 왕망을 전폭적으로 신임하고 있었으므로 왕망의 권력은 이미 황제를 능가했다. 이후 신(新)을 건국하기까지 왕망은 민심과 여론 조작에 대단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참위설(讖緯說)에 근거하여 부명(符命)04을 조작하여, 마침내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2년 뒤 전한을 타도한다. 그러나 신(新)을 건국하고 난 이후, 황제가 된 왕망의 통치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그의 이상적인 정책은 현실과 맞지 않았고, 빈번한 제도 개편은 실질적이지 않으면서 번거롭기만 했다.
게다가 정책의 실패로 인한 민심 이반과 연이은 기근이 겹치면서 중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왕망은 이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사회가 심각한 혼란에 빠지자 많은 이들은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게 되었다. 이러한 민심을 배경으로 한나라의 후예들이 힘을 규합하여 다시 정권을 세우는 것은 비교적 용이했다.
23년 한 황실의 후예들과 농민반란의 지도자들은 유현(劉玄)을 새로운 황제로 내세우니 이가 곧 경시제(更始帝)05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유현이 제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유능했다던가 또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반란의 주체 세력들이 볼 때 유현은 유수의 형인 유연(劉演)보다 편한 상대였다. 경시제에 반해 유연은 껄끄러운 상대였다. 이런 인물이 황제가 된다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 경시제를 추대한 것이다.
따라서 경시제가 즉위한 후, 유연을 처단한 것은 권력 투쟁의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였다. 유수가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것도 소용없었다. 곤양대전은 중국 전쟁사에서도 소수의 군대가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유수는 불과 수천 기로 왕망의 42만 대군을 물리친다. 하지만 유연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경시제는 유연의 휘하 장수의 작은 과실을 빌미로 유연을 처단했다.
유수는 곧장 형의 잘못을 사죄했다. 전후의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던 간에 실권을 쥔 쪽은 경시제였기 때문이다. 경시제의 입장에서 만약 유수가 형의 죽음이 잘못된 일이라고 반발했다면 그것을 구실로 유수를 처단하면 되었다. 하지만 도리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유수를 경시제는 더 이상 책망할 수 없었다. 경시제는 유수를 행대사마(行大司馬)에 임명하고 작은 병력을 주어 하북(河北)을 평정하도록 했다.
등우의 유세(遊說)
경시제가 즉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다시 한나라가 들어서고 세상은 안정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생각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시제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곳곳에서 관청을 습격하고 경시제로부터 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등우에게도 동참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등우는 이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등우가 보기에 경시제는 난국을 타개할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주목한 인물은 유수였다. 등우는 유수가 하북(河北)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책략을 품고 하수를 건너 업(鄴, 하남성 臨潼縣) 땅에 이르렀다.
유수는 등우를 기쁘게 맞아들이면서 물었다.
“나는 마음대로 벼슬을 줄 수가 있소. 그대가 멀리서 왔으니 정녕 벼슬하기를 원하시오?”
등우가 대답했다.
“원치 않습니다.”
유수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시오?”
등우가 대답했다.
“공께서 훌륭하신 덕을 사해(四海)에 펼치심에 제가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어 공명을 청사(靑史)에 남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유수가 웃으며 함께 머물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때, 등우는 자신이 유수에게 온 까닭과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힐 기회를 얻게 되었다. 등우가 입을 열었다.
“경시(更始)가 비록 관서(關西)에 도읍을 정했지만 지금 산동(山東)지역은 아직 불안하고 적미(赤眉)06와 청독(靑犢)07의 무리는 한번 모였다하면 수만 명이 움직이고 삼보(三輔)는 명분을 빌어 자주 군중을 모으고 있습니다. 경시는 이제껏 싸움에 져 본 적이 없어 교만합니다. 또한 정책을 듣고 스스로 결정치 못하고 장수들은 모두가 용렬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군사를 일으킨 뜻은 실로 재물에 있을 뿐이고 이제 밤낮으로 위세 과시하기를 즐기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들 중 충성스러우며 명철한 지혜를 지니고, 깊고 원대한 생각을 가져 임금을 보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지금 민심은 흩어지고 천하는 분열되었으니 그 형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밝으신 공께서 비록 제후로서 천자를 보좌하는 공을 세우신다 해도 그 공이 오히려 성립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금은 영웅들을 맞아들이시고 민심을 편안케 하는 데 힘쓰시어 고조(高祖)의 업적을 세우셔서 만민의 목숨을 구하시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현재 공의 신분으로는 천하를 염려하신다 해도 족히 평정시킬 수 없습니다.”
이때 유수는 고단한 처지였다. 행대사마가 되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경시제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상황이었지만, 소수의 병력에 불과했고 그나마 자신의 휘하 장수 가운데 누가 자신의 편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경시제가 어떤 일이든 구실을 삼아 소환을 통보하면 유수의 최후도 그의 형인 유현과 다를 수 없는 처지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유수에게 그의 큰 형인 유현은 부모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형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음에도 그 죽음에 조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답답한 처지의 유수에게 등우의 말은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힘을 키워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등우의 주장에 유수는 기뻐했고 공감했다.
유수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등우를 부를 때에는 등장군이라 칭하도록 하고 항상 막사에 머물게 하여 그와 더불어 계책을 의논하고 결정했다. 이때 유수의 나이는 28세, 등우의 나이는 22세였다. 이때부터 30여 년간 등우는 후한의 창업자 광무제 유수가 가장 신임한 신하 중 한 사람이었다.
시대는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혼란한 시대에 편승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려는 야심가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곤양대전의 결과 왕망의 힘이 사실은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곳곳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스스로 천자, 왕, 장군을 자처했다. 왕랑(王郞)도 그 중 하나였다. 왕랑은 왕망의 신(新)나라 말기에 일어난 숱한 반란 집단 중에서도 두드러진다. 그 또한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당시의 민심을 이용했다. 그는 자신을 전한의 황제였던 성제(成帝)의 적통인 유자여(劉子輿)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예전에 왕망이 성제의 후손인 유자여라고 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왕랑은 왕망에게 죽은 유자여는 가짜이고 자신이 생존을 위해 출생의 비밀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왕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왕랑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소수였고, 대다수는 왕랑을 성제의 아들로서 한의 정통 계승자임을 믿었다. 이렇게 왕랑의 세력은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왕랑은 자신이 천자임을 선포하고 한단을 수도로 정하는 한편 사신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자신의 명에 따를 것을 지시했다.
왕랑 이외에도 적미, 청독, 동마(銅馬), 오교(五校), 대동(大彤), 고호(高湖), 중련(重連), 철형(鐵脛), 대창(大槍), 우래(尤來), 상강(上江), 오번(五幡), 단향(檀鄕), 획색(獲索) 등 중국 전역이 거대한 도적의 소굴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한의 부흥을 선언한 경시제는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정국은 점점 더 혼미해져 갔다.
유수는 계(薊, 북경시 大興縣)땅으로부터 신도(信都, 하북성 冀縣)로 와서 등우로 하여금 결사대 수천 명을 뽑아 직접 그들을 거느리고 별도로 악양(樂陽)을 공략하도록 했다. 그 후 등우가 유수를 좇아 광아(廣阿, 하북성 隆平縣)에 이르렀는데 유수가 성의 누각에서 머물면서 지도를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등우에게 물었다.
“천하에 제후국들의 형세가 이와 같은데 나는 이제야 그 중의 한 모퉁이를 얻었소. 일전에 그대가 나의 신분으로 천하를 도모하면 평정시키기에 부족할 것이라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이제는 어찌해야 하겠소.”
그 누구라도 첫 시작은 미약하며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디딘 유수에게 등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하고 고무했다.
“오늘날 세상이 소란하니 백성들이 훌륭한 임금을 고대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합니다. 옛날에 나라를 일으킨 사람들은 그 덕이 두터운가 아닌가에 성패가 달려 있었습니다. 차지한 땅이 큰가 작은가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라도 처음의 시작은 미약한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적절한 지적이었다. 유수에게는 작지만 자신만의 근거지가 확보된 것 이외에도 28장이 하나씩 등장하는 시점이었다. 유수의 최측근에 풍이[馮異, 실(室) 별을 관장]와 왕패[王覇, 벽(壁) 별을 관장]가 있었고, 등우를 비롯하여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 구순[寇恂, 우(牛) 별을 관장], 경감[耿弇, 기(箕) 별을 관장], 임광[任光, 루(婁) 별을 관장], 비융[邳肜, 정(井) 별을 관장] 등이 달려와서 유수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이때 유수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먼저 등우에게 보냈다. 등우는 유수가 보낸 사람들 중에 적합한 인재를 천거했다. 등우가 천거한 사람들은 매번 그 재주가 직분에 꼭 맞았으므로 유수는 등우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여겼다. 이때 등우가 추천한 인사로는 언제나 선봉에 서서 적진을 돌파한 맹장인 오한, 구순이 있다.
한번은 등우로 하여금 별도로 기병을 거느리고 합연[蓋延, 삼(參) 별을 관장]과 더불어 청양(淸陽, 하북성 淸河현) 땅에서 동마(銅馬)를 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이때 합연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성을 지키려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적들에게 포위당했다. 이러한 전황을 접한 등우가 진격하여 적들을 격파하고 그 대장을 생포하여 이들을 구원한 일도 있었다. 또한 등우는 유수를 수행하여 적을 추격하고 포양(蒲陽)땅에 이르러서 연이어 크게 승리하였다. 등우의 승리로 북주(北州)가 평정되었다.
한편 최대의 반란 집단인 적미는 당시의 수도이면서 경시제가 있는 장안을 공격했다. 이들이 서쪽에서 성문으로 진입해 오자 경시제가 정국상공(定國上公) 왕광(王匡), 양읍왕(襄邑王) 성단(成丹), 항위(抗威)장군 유균(劉均) 및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하동(河東), 홍농(弘農) 지역에 분산 주둔하여 그들을 막게 했다. 적미는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도적에 불과했지만 그 숫자가 워낙 많았으므로 왕광이 당해내지 못했다.
유수는 적미가 틀림없이 장안을 함락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틈을 타서 관중(關中)지역을 방어코자 했으나 자신은 산동(山東)지역을 지켜야 했으므로 누구를 대신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유수는 등우가 그 적임자라 판단하여 등우에게 서쪽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수는 등우를 전장군(前將軍)08에 임명하여 휘하의 정병 이만 명을 나누어서 서쪽으로 파견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지시하고, 등우 스스로 보좌관 및 이하 함께 행동할 사람들 선발하도록 했다. 이때 등우는 군사(軍師)에 한흠(韓歆), 좨주는 이문(李文), 이춘(李春), 정려(程慮) 3인, 적노(積弩)장군에는 풍음(馮愔), 효기(驍騎)장군에는 번숭(樊崇), 거기(車騎)장군에는 종흠(宗歆), 건위(建威)장군에는 등심(鄧尋), 적미(赤眉)장군에는 경흔(耿訢), 군사(軍師)장군에는 좌우(左于)를 임명하여 이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갔다.
(다음 편에 계속)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01.
02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재위, 25-57). 전한(前漢)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의 9세손(世孫)으로 자(字)는 문숙(文叔). 9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 유량(劉良)의 밑에서 성장했다. 1세기 초 외척 왕망(王莽)이 궁정 쿠데타를 통해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을 건국한다. 그러나 왕망의 복고적 개혁 정책이 실패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한실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등에 업은 한 왕실의 후예들의 한 사람이었던 유수는 22년 가형(家兄) 유연(劉縯)과 함께 남양(南陽)에서 호족들과 연합하여 봉기했다. 이후,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대파하고 25년 낙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를 재건하였다.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즉위 이후 10년 동안 경시제(更始帝), 적미(赤眉), 외효(隗囂), 공손술(公孫述) 등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했다. 묘호(廟號)는 세조(世祖), 시호(諡號)는 광무제(光武帝)이다.
03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68세였다.
04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주는 표로 한나라 때는 누가 제왕이 된다고 하는 천명(天命)에 부응하는 징조로 여겨졌다.
05 유현(劉玄, ?-25)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更始) 장군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곧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혼란을 수습할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의 잘못된 정치는 모반을 불러와 혼란을 부채질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6 18년 왕망 말기에 번숭(樊崇)이 중심이 되어 산동(山東)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자신들을 다른 무리들과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물들인 까닭에 적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07 왕망 말기에 부곡(部曲)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의 하나.
08 과거(過去)라는 의미가 아닌 선봉이라는 의미의 관직명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위진(魏晉) 남북조시대까지 두었던 군대의 직함. 직위는 대장군(大將軍), 표기(驃騎)장군의 아래.
《대순회보》 154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