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수 신명항(亢) 별을 관장하는 마성(馬成)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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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02 조회5,369회 댓글0건본문
항수(亢宿)
항수(亢宿)는 28수 가운데 두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두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동물은 용이다.01 항수는 동방 청룡 칠수 전체를 용으로 볼 때 용의 목에 해당한다 하여 항(亢. 목, 목구멍)이라 한 것이다. 항수의 용을 금룡(金龍)이라 하는데 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발이 있어서 잘 달린다고 한다. 또한 구름을 삼키고 불을 토해낸다고 알려져 있다.
항수를 의인화하여 항수성군(亢宿星君)이라고도 부르는데 손에 장극(長戟), 즉 긴 창(끝이 좌우가 갈라진 창)을 지닌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항수(亢宿)는 28수 가운데 두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두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동물은 용이다.01 항수는 동방 청룡 칠수 전체를 용으로 볼 때 용의 목에 해당한다 하여 항(亢. 목, 목구멍)이라 한 것이다. 항수의 용을 금룡(金龍)이라 하는데 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발이 있어서 잘 달린다고 한다. 또한 구름을 삼키고 불을 토해낸다고 알려져 있다.
항수를 의인화하여 항수성군(亢宿星君)이라고도 부르는데 손에 장극(長戟), 즉 긴 창(끝이 좌우가 갈라진 창)을 지닌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후한의 창업공신 마성
항(亢) 별을 관장하는 마성(馬成, ?-56)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02를 도와 후한(後漢, 25-220)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CE 8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의해 성립된 한[前漢, BCE 206-CE 8]은 외척 왕망(王莽, BCE 45-CE 23)03의 궁정쿠데타로 전복되고 신(新, 8-23)이 성립한다. 그러나 왕망의 신나라는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왕망의 신나라가 몰락하고 다시 한을 세운 이가 바로 후한의 초대황제 유수였다.
마성의 자(字)는 군천(君遷)으로 남양(南陽) 극양(棘陽, 현재 河南省 南陽 남쪽)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 현리(縣吏)를 지냈다. 유수가 영천(穎川)을 순행할 때 마성을 안집연(安集掾)으로 삼았다가 다시 겹(郟)의 현령(縣令)에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유수가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 마성은 관직을 버리고 포양(蒲陽)까지 종군했다. 유수는 마성을 기문(期門)04으로 삼아 그가 계속해서 종군할 수 있도록 했다.
25년 유수가 후한의 초대황제인 광무제로 즉위하면서 한의 부흥을 선언했지만 그를 따르는 세력은 크지 않았고 시대는 여전히 난세 그 자체였다. 당시의 정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전한 말 각지에서 발생한 작은 반란들의 불길이 확대되어 중국 전역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전국이 도적의 소굴로 변했고 식량과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일상적인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의 부흥을 선언한 이상 이런 반란 세력을 하나씩 진압해 가는 것이 유수에게 부과된 시대적 사명이었다. 바야흐로 전국 평정을 위한 악전고투의 10년이 시작된 것이다. 쉽지 않은 투쟁이었으며 누구도 결과를 쉽게 예단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보는 입장에서 보면 유수와 28장이 주인공이며 승리자였지만 당대에는 그 누구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하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마성은 후한이 개국하면서 호군도위(護軍都尉)로 임명되었다. 마성이 기문과 호군도위 등 주로 유수의 최측근에서 그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은 그에 대한 광무제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28(건무 4)년 8월에 광무제는 마성을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삼아 주로장군(誅虜將軍) 유융[劉隆, 진(軫) 별을 관장], 진위장군(振威將軍) 송등(宋登), 사성교위(射聲校尉) 왕상(王賞) 등을 이끌고 회계(會稽, 강소성 소주시), 단양(丹陽, 안휘성 宣城縣), 구강(九江, 안휘성 구강현), 육안(六安, 안휘성 육안현)의 4개 군(郡)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이헌(李憲, ?-30)05을 공격하게 하였다. 광무제는 이때 수춘(壽春, 안휘성 壽縣)에 행차하여 제단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예에 따라 마성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이헌은 왕망의 신나라 시기에 여강(廬江, 안휘성 여강현) 연솔(連率)06이었다. 23년 그는 중국 전역이 혼란에 빠지고 중앙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자기 군을 점거하고 회남왕(淮南王)이라고 칭하였다. 이헌과 같이 왕이나 장군을 칭한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27년 세력을 확장한 이헌이 황제를 칭하고 백관(百官)을 두게 된다. 그는 9개의 성곽을 점령하였으며 따르는 무리가 10만이었다. 당시 여강은 12개의 현이 있었는데 이 중 9개를 이헌이 점령하였던 것이다. 이헌이 황제를 자칭했다는 것은 그의 세력이 단순한 반란 세력이 아니며 나라를 세울 정도로 증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헌이 황제를 자칭한 이상 광무제의 입장에서 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광무제가 직접 수춘에까지 행차하여 또한 제단을 차려 제사를 지내면서 이헌의 토벌에 공을 들인 것은 그의 토벌이 황제가 직접 나서서 군대를 독려할 정도로 중요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 9월 마성은 서(舒)에서 이헌을 포위했는데, 그의 작전은 이헌을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마성은 각 군대에 명령을 하달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여 이헌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헌은 마성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성의 철통같은 방어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1년 여가 흐른 30(건무 6)년 봄, 이헌의 진영에는 마침내 식량이 바닥났다. 마성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마침내 서를 평정하였다. 마성은 이헌과 그 처자들을 처단하고 도망간 그 나머지 무리들을 추격하여 잔당을 소탕함으로써 강회(江淮) 땅을 모두 평정시켰다. 이듬해인 31(건무 7)년 여름에 광무제는 이헌의 세력을 뿌리 뽑은 마성의 공을 치하하며 그를 평서후(平舒侯)에 봉했다.
32(건무 8)년 마성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외효(隗囂, ?-33)07를 깨뜨린 공으로 천수태수(天水太守)에 임명되었고 이전과 같이 군대를 계속 거느렸다. 이해 겨울에 마성은 광무제의 부름을 받고 서울인 낙양으로 돌아왔다.
33(건무 9)년 마성은 내흡(來歙)을 대신하여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을 인솔하고 하지(河池)를 깨뜨려 무도(武都)를 평정하였다. 그 다음해 대사공 이통(李通)이 파면당하여 마성이 대사공의 일을 보았는데 훌륭하게 그 직무를 수행했다. 몇 개월 후에 마성은 다시 양무장군(揚武將軍)에 임명되었다.
항(亢) 별을 관장하는 마성(馬成, ?-56)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02를 도와 후한(後漢, 25-220)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CE 8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의해 성립된 한[前漢, BCE 206-CE 8]은 외척 왕망(王莽, BCE 45-CE 23)03의 궁정쿠데타로 전복되고 신(新, 8-23)이 성립한다. 그러나 왕망의 신나라는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왕망의 신나라가 몰락하고 다시 한을 세운 이가 바로 후한의 초대황제 유수였다.
마성의 자(字)는 군천(君遷)으로 남양(南陽) 극양(棘陽, 현재 河南省 南陽 남쪽)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 현리(縣吏)를 지냈다. 유수가 영천(穎川)을 순행할 때 마성을 안집연(安集掾)으로 삼았다가 다시 겹(郟)의 현령(縣令)에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유수가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 마성은 관직을 버리고 포양(蒲陽)까지 종군했다. 유수는 마성을 기문(期門)04으로 삼아 그가 계속해서 종군할 수 있도록 했다.
25년 유수가 후한의 초대황제인 광무제로 즉위하면서 한의 부흥을 선언했지만 그를 따르는 세력은 크지 않았고 시대는 여전히 난세 그 자체였다. 당시의 정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전한 말 각지에서 발생한 작은 반란들의 불길이 확대되어 중국 전역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전국이 도적의 소굴로 변했고 식량과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일상적인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의 부흥을 선언한 이상 이런 반란 세력을 하나씩 진압해 가는 것이 유수에게 부과된 시대적 사명이었다. 바야흐로 전국 평정을 위한 악전고투의 10년이 시작된 것이다. 쉽지 않은 투쟁이었으며 누구도 결과를 쉽게 예단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보는 입장에서 보면 유수와 28장이 주인공이며 승리자였지만 당대에는 그 누구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하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마성은 후한이 개국하면서 호군도위(護軍都尉)로 임명되었다. 마성이 기문과 호군도위 등 주로 유수의 최측근에서 그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은 그에 대한 광무제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28(건무 4)년 8월에 광무제는 마성을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삼아 주로장군(誅虜將軍) 유융[劉隆, 진(軫) 별을 관장], 진위장군(振威將軍) 송등(宋登), 사성교위(射聲校尉) 왕상(王賞) 등을 이끌고 회계(會稽, 강소성 소주시), 단양(丹陽, 안휘성 宣城縣), 구강(九江, 안휘성 구강현), 육안(六安, 안휘성 육안현)의 4개 군(郡)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이헌(李憲, ?-30)05을 공격하게 하였다. 광무제는 이때 수춘(壽春, 안휘성 壽縣)에 행차하여 제단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예에 따라 마성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이헌은 왕망의 신나라 시기에 여강(廬江, 안휘성 여강현) 연솔(連率)06이었다. 23년 그는 중국 전역이 혼란에 빠지고 중앙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자기 군을 점거하고 회남왕(淮南王)이라고 칭하였다. 이헌과 같이 왕이나 장군을 칭한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27년 세력을 확장한 이헌이 황제를 칭하고 백관(百官)을 두게 된다. 그는 9개의 성곽을 점령하였으며 따르는 무리가 10만이었다. 당시 여강은 12개의 현이 있었는데 이 중 9개를 이헌이 점령하였던 것이다. 이헌이 황제를 자칭했다는 것은 그의 세력이 단순한 반란 세력이 아니며 나라를 세울 정도로 증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헌이 황제를 자칭한 이상 광무제의 입장에서 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광무제가 직접 수춘에까지 행차하여 또한 제단을 차려 제사를 지내면서 이헌의 토벌에 공을 들인 것은 그의 토벌이 황제가 직접 나서서 군대를 독려할 정도로 중요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 9월 마성은 서(舒)에서 이헌을 포위했는데, 그의 작전은 이헌을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마성은 각 군대에 명령을 하달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여 이헌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헌은 마성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성의 철통같은 방어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1년 여가 흐른 30(건무 6)년 봄, 이헌의 진영에는 마침내 식량이 바닥났다. 마성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마침내 서를 평정하였다. 마성은 이헌과 그 처자들을 처단하고 도망간 그 나머지 무리들을 추격하여 잔당을 소탕함으로써 강회(江淮) 땅을 모두 평정시켰다. 이듬해인 31(건무 7)년 여름에 광무제는 이헌의 세력을 뿌리 뽑은 마성의 공을 치하하며 그를 평서후(平舒侯)에 봉했다.
32(건무 8)년 마성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외효(隗囂, ?-33)07를 깨뜨린 공으로 천수태수(天水太守)에 임명되었고 이전과 같이 군대를 계속 거느렸다. 이해 겨울에 마성은 광무제의 부름을 받고 서울인 낙양으로 돌아왔다.
33(건무 9)년 마성은 내흡(來歙)을 대신하여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을 인솔하고 하지(河池)를 깨뜨려 무도(武都)를 평정하였다. 그 다음해 대사공 이통(李通)이 파면당하여 마성이 대사공의 일을 보았는데 훌륭하게 그 직무를 수행했다. 몇 개월 후에 마성은 다시 양무장군(揚武將軍)에 임명되었다.
변방의 수호자 마성
38(건무 14)년 마성은 군대를 상산(常山), 중산(中山)에 주둔시켜 북쪽 변방을 지켰다. 이때 마성은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규(奎) 별을 관장]를 거느리고 군을 지위했다. 또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 두(斗) 별을 관장]를 대신하여 장벽을 쌓고 요새를 정비하였는데 서하(西河)에서 비롯하여 위교(渭橋)까지 이르렀다. 이 외에도 북방의 여러 곳에 보루와 성벽을 쌓고 봉화대를 세웠다. 여기에 십리에 하나씩 정찰소를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마성이 변방에서 일을 맡아본 지 5∼6년이 되어 광무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낙양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때 많은 변방 사람들이 마성을 다시 파견해 달라는 요청서를 광무제에게 올렸다. 광무제가 이들의 청을 받아들여 마성을 변방에 다시 파견하였다.
중국의 통일 왕조에게 변방의 기마민족은 언제나 근심거리였다. 신속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중국의 변경을 약탈하고 바로 자신들의 근거지로 귀환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마성이 국경의 수비를 맡고 있을 때 흉노의 남선우(南單于)가 침입하였는데 마성은 요새를 굳게 지켜 이들의 공격을 막으니 그가 북방에 있을 때는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광무제가 마성을 중산태수(中山太守)에 임명하면서 장군의 인수를 반납하도록 하면서도 여전히 주둔병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변방 수비에 마성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8(건무 24)년 마성은 남쪽의 무계만(武谿蠻)의 도적들을 공격하였지만 공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태수의 인수를 반납했다. 51(건무 27)년 광무제는 마성을 전초후(全椒侯)에 봉하였고 그는 자신의 식읍(食邑)으로 돌아가 56(건무 32)년에 생을 마감했다.
38(건무 14)년 마성은 군대를 상산(常山), 중산(中山)에 주둔시켜 북쪽 변방을 지켰다. 이때 마성은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규(奎) 별을 관장]를 거느리고 군을 지위했다. 또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 두(斗) 별을 관장]를 대신하여 장벽을 쌓고 요새를 정비하였는데 서하(西河)에서 비롯하여 위교(渭橋)까지 이르렀다. 이 외에도 북방의 여러 곳에 보루와 성벽을 쌓고 봉화대를 세웠다. 여기에 십리에 하나씩 정찰소를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마성이 변방에서 일을 맡아본 지 5∼6년이 되어 광무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낙양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때 많은 변방 사람들이 마성을 다시 파견해 달라는 요청서를 광무제에게 올렸다. 광무제가 이들의 청을 받아들여 마성을 변방에 다시 파견하였다.
중국의 통일 왕조에게 변방의 기마민족은 언제나 근심거리였다. 신속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중국의 변경을 약탈하고 바로 자신들의 근거지로 귀환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마성이 국경의 수비를 맡고 있을 때 흉노의 남선우(南單于)가 침입하였는데 마성은 요새를 굳게 지켜 이들의 공격을 막으니 그가 북방에 있을 때는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광무제가 마성을 중산태수(中山太守)에 임명하면서 장군의 인수를 반납하도록 하면서도 여전히 주둔병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변방 수비에 마성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8(건무 24)년 마성은 남쪽의 무계만(武谿蠻)의 도적들을 공격하였지만 공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태수의 인수를 반납했다. 51(건무 27)년 광무제는 마성을 전초후(全椒侯)에 봉하였고 그는 자신의 식읍(食邑)으로 돌아가 56(건무 32)년에 생을 마감했다.
<대순회보 156호>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03.
02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재위, 25-57). 전한(前漢)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의 9세손(世孫). 자(字)는 문숙(文叔). 9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 유량(劉良)의 밑에서 성장했다. 1세기 초 외척 왕망(王莽)이 궁정 쿠데타를 통해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을 건국한다. 그러나 왕망의 복고적 개혁 정책이 실패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한실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등에 업은 한 왕실의 후예들의 한 사람이었던 유수는 22년 가형(家兄) 유연(劉縯)과 함께 남양(南陽)에서 호족들과 연합하여 봉기했다. 이후,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대파하고 25년 낙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를 재건하였다.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즉위 이후 10년 동안 경시(更始), 적미(赤眉), 외효(隗囂), 공손술(公孫述) 등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했다. 묘호(廟號)는 세조(世祖), 시호(諡號)는 광무제(光武帝)이다.
03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68세였다.
04 황제의 호위병을 칭하는 말이다.
05 영천(穎川) 허창(許昌, 현재 하남성) 사람. 왕망 말기에 일어난 많은 반란 중 하나이다. 22(更始 元)년 자칭(自稱) 회남왕(淮南王). 27(건무 3)년 자립(自立)하여 천자가 되고 백관(百官)을 설치하고 10만의 무리를 모았다. 28년 광무제가 파견한 마성이 이헌을 포위 공격하였고, 30년 처자와 더불어 처단되었다.
06 왕망이 세운 신나라에서는 태수를 연솔이라 했다.
07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니 이가 곧 경시제(更始帝)인데 외효는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관직이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그런데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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