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차치구(車致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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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29 조회5,336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조규제
또 하루는 경석에게 가라사대 “갑오년 겨울에 너의 집에서 三인이 동맹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렇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그 일을 어느 모해자가 밀고함으로써 너의 부친이 해를 입었느냐”고 하시니 경석이 낙루하며 “그렇소이다”고 대답하니라. 또 가라사대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좇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 하시니라. -하략- (교법 3장 15절)
위 구절에 나오는 차경석 부친의 이름은 차치구(車致九, 1851-1894)이다. 그는 1851년 현 전북 정읍시 입암면 마석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스무 살쯤에 대흥리로 옮겨 살았다. 본관은 연안(延安), 초명은 중필(重弼)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비범하여 일찍이 장군감으로 이름이 났다.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대흥리와 이웃한 마을인 지선동에 감역 벼슬을 한 천석꾼 임씨가 살고 있었다. 임감역은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주었다. 몰락한 소작인 양반들은 소작료인 도조(賭租)01를 내지 않는 일이 빈번하였다. 임감역은 차치구를 불러 “도조를 받아 마음대로 쓰라”고 하였다. 본때를 보여주라는 뜻일 것이다.
차치구는 소작인들을 불러 모아 그중 힘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을 꺾어 놓고는 “양반인 주제에 도조를 안 내는 도둑놈 짓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이렇게 해서 도조 수백 섬을 거두고 나서 소작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잘 대접하고 말했다. “갑자기 도조를 내느라 무리했을 터이니 3분의 2는 도로 가져가고 다음부터는 도조를 꼬박꼬박 내시오”라고 하였다.02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동네의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차치구의 배포와 기개를 나타내 주는 일화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당시 조선 사회는 조정의 무능으로 인하여 삼정이 문란해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를 틈타 고부 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었다. 배들평야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고통을 호소하기 위하여 관아로 달려갔으나 조병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농민들의 생활은 견디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농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을 무력으로 저지하고자 하였다.
1894년 정월 10일 밤 배들평야에 자리 잡은 예동 마을에 천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군중들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으나 조병갑은 도망가고 없었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억울하게 투옥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군기고를 열어 무기와 총기를 챙긴 후 사태를 관망하였다. 조병갑은 책임을 추궁당해 해임되고 박원명이 부임하였다. 모든 일을 관에서 조사하여 처리할 것이니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군수 박원명의 유화책을 믿고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按覈使)03 이용태는 군중들을 동학당으로 몰아 토벌하는 한편 양민들을 수탈하였다. 사태를 관망하던 전명숙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전명숙은 본격적인 혁명 준비를 하면서 대흥리에 살고 있던 차치구를 찾아가서 거사에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차치구는 “우리 군의 수령을 내쫓는 일은 할 수 있으나, 군의 경계를 넘어서 거사를 하면 역적이 된다”며 거절하였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전봉준의 간곡한 설득에 따라 차치구는 농민혁명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치구는 손여옥(孫如玉, 1860~1899)04과 함께 농민군 1,200여 명을 이끌고 고창 봉기에 출전하였다. 그리고 정읍의 두령으로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에 입성할 때 선봉에 섰다. 1894년 9월 2차 봉기 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도 그는 농민군의 선봉에서 전봉준과 생사를 같이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 연합군의 근대식 무기와 막강한 화력으로 인해 공주 전투, 그리고 우금치(于金峙)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논산으로, 금구로, 태인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태인 전투를 끝으로 1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장성의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순창 피노리에 몸을 숨겼다. 이때 차치구도 아들 경석과 함께 피노리까지 동행하였다고 한다.05
차치구는 피노리에서 전봉준과 헤어지고 대흥리로 향했다. 그리고 정읍 입암면 마석 마을 뒷산에 있는 국사봉의 토굴에서 숨어 지냈다. 국사봉 아래에 사는 친구 최제칠이 몰래 밥을 날라다 주며 도피생활을 도왔다. 이 소문이 흥덕 관아에 전해져 최제칠이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본인 목숨보다 친구 목숨이 중요하냐”는 부인의 설득에도 최제칠은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최제칠이 관아에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마을 사람이 차치구가 숨어 있는 곳을 관아에 고발하고 말았다. 그러자 흥덕 관아를 지키던 군사들은 득달같이 달려와서 국사봉 토굴 앞에 도착하여 차치구를 수색했다. 토굴 속에 있던 차치구는 한 자루의 칼과 피우던 담뱃대를 손에 들고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군사들이 그를 묶으려 하자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겠다. 이대로 같이 가자”고 하며 흥덕 관아로 동행하였다.
현감 윤석진은 그동안의 행적과 동조자에 대하여 말하라고 회유와 고문을 섞어 차치구를 닦달했다. 그러나 차치구는 “나를 죽일 뿐 더 이상 심문하지 말라”고 호통쳤다. 이에 화가 난 윤석진은 차치구를 죽여버렸다.
이 일이 있기 전 전주 화약 이후 집강소가 설치될 때의 일이다. 집강소 시기 차치구는 정읍 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흥덕 현감 윤석진이 농민군 두령 고영숙(高永叔, 1867~1894)06을 잡아 가두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차치구는 즉시 농민군을 이끌고 흥덕 관아를 들이쳐서 고영숙을 구하였다. 차치구는 윤석진을 죽이려 하였으나 고영숙의 만류로 살려주었다.07
그러나 윤석진에게 차치구는 반란군의 두령일 뿐이었다. 차치구는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선봉에서 민중을 이끌던 영웅은 이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를 지켜본 차경석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 업고 30리를 걸어가서 선산 밑에 가매장했다. 이때 차경석의 나이 15세였다.
한편 살아남은 동학농민혁명군은 영학계(英學契)08를 조직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는데 차경석도 그 일원이었다. 1898년 음력 11월 10일 새벽 차경석은 300여 명의 영학계원들과 함께 고창에 있는 흥덕 관아를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었다.09 현감 윤석진은 잡혀온 차경석에게 “네 아비가 잘못 죽었느냐?, 잘 죽었느냐?”고 비꼬듯 물었다. 경석은 “부모의 죽음에 시비를 가릴 수 없다. 다만 국법이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국법을 위반하였으니 재판도 없이 죽었을 뿐이라는 뜻일 것이다. 현감 윤석진은 차경석에게도 사형 명령을 내렸으나 때마침 서울에서 내려온 어느 참위(參尉)10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11
차치구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는 차치구는 의협심이 강하고 대의에 따라 행동하는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타인의 어려움에 가슴 아파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의로운 행위는 죽어서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그의 위패는 전북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사당 구민사(救民祠)에 모셔져 있다.
<대순회보> 2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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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 후기의 소작제도이다. 이는 소작료를 미리 협정하고 매년의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으로, 풍작과 흉작에 관계없이 소작료가 일정하다.
02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파주: 김영사, 2008), pp.179~180
03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사를 위해 파견된 임시 직책.
04 전봉준과 함께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고부 봉기를 주동하였다. 고창 농민봉기에 참전하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손화중(孫華仲)의 족질(族姪)이다.
05 이이화, 앞의 책, p.181.
06 흥덕현(興德縣)의 대표적인 농민군 지도자로 농민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07 이이화, 앞의 책, p.181.
08 정읍의 최익서(崔益瑞, 1858∼1918)를 비롯한 고창(高敞), 무장(茂長), 장성(長城), 함평(咸平) 등지의 동학(東學)의 여당(餘黨)들이 동학농민혁군의 재기를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
09 백원철, 안후상, 이병열, 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기역(ㄱ), 2013년.
10 대한제국 때, 위관(尉官)급 무관의 맨 아래 계급 (지금의 ‘소위’격에 해당됨)
11 이이화, 앞의 책,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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